경기 고양 - 고양 600년
고양 600년
올해는 <고양>이라는 지명이 생겨난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고봉(高峰)'과 '덕양(德陽)'을 합쳐 '고양(高陽)'이라 하라! (태종실록 25권 1413년 3월 23일 2번째 기사 기록)
[호수공원 내 고양600년 기념전시관]
고려에 이어 조선이 세워진 지 20여 년이 지난 서기 1413년 음력 3월 23일(태종 13년), 고양은 삼국시대부터 여러가지 지명으로 불리었으나, 옛 지명 고봉현과 덕양현에서 한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이름이며, 고양현이 설치되면서 현재와 같은 고양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2013년 5월 2일은 고양 6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고양향교 - 고양동 소재]
올해는 이와 관련된 많은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지난달 6월 1일부터 9일까지 일산 호수공원 내에서 장미꽃축제가 열렸다. 한 참 지난 일이지만 땡볕에 땀을 흘려가며 담아 온 예쁜 모습들과 기념관내 고양의 기록물을 창고에 넣어 두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다.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 행주산성 내에 있다]
호수공원은 집에서 잔차로 30여분이면 갈 수 있는 넉넉한 거리다. 평소에는 이러한 축제가 없어도 늘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찾았던 날에도 관람객과 진사님들 참 많이들 어우러져 있었다.
[서오릉의 정자각]
호수의 규모와 그러하거니와 풍경이 참 좋고 해마다 꽃박람회가 열려 모르는 분들이 없을거라는 짐작이다. 광장에는 예쁘게 꾸며 놓은 정원과 정원 속에 고양시의 문화재의 모형이 아담하게 담겨져 있어 많은 분들의 기념촬영 장소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북한산성 대서문]
고양시의 중요 문화재로는 북한산성, 행주산성, 서오릉, 서삼릉, 벽제관, 향교 등이 있는데, 아쉽게도 벽제관은 터만 남아 있고 서울 성동구에 있는 <살곶이다리>처럼 서울의 주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강매동석교> 가 남아 있다.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행주산성내에 자리하고 있으며 해마다 행주문화재가 열리는 주 무대이기도 하다.
[기념관 앞 위안부소녀상 -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도 있다]
<고양 600년관>,... 고양의 옛 기록들을 둘러볼 겸 찾아 보았다. 입구에는 위안부소녀상이 홀로 서 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일본대사관>앞의 소녀과 같다. 줄기차게 망언을 쏟아붓는 넘들 참 얼마나 시간이 흘러야 철이들런지,... 우리는 그 기억을 꼭 잊지 말아야 할 거다.
[기념관 앞 독도 조형물 - 왼쪽(동도)와 오른쪽(서도)]
둥근 원형 기둥 위에는 우리나라 동쪽 심해 끝에 외로이 서 있는 독도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작년에 아이들을 데리고 독도에 발을 내려 보면서 정말 찡한 마음을 느껴 보았지만, 섬의 전체적인 모습의 모형을 보니 새삼 그때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의 사랑을 받아 듀~~~오 ㅎㅎ]
기념관 내에는 비록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소중한 자료와 기록들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고양시를 알기에 충분하다 싶다. 내게도 생소한 유물들,.... 그리고 자료들,...
[세상살이가 참 소박하고 청렴했으면 좋겠다]
내가 알지 못했던 자료들이 많았고, 또 이러한 분야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을 위해 많이도 담아 왔는데, 얼마나 전달이 될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소중한 자료들이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다. 모든 자료를 올리지 못해 아쉬움이 크지만 몇 몇 기록과 자료들을 담아 본다.
[용두]
[용두]
이 용두는 19세기 제작되어 최근까지 실제로 사용되었으며, 두레패가 공연 할 때 농기의 윗부분에 부착하는 것으로 편을 나누어 용두의 깃발을 빼앗는 놀이를 <기뺏기>라고 불렀으며, 고양시 지축동 지역에서 사용 되었던 유물이라고 한다.
[지석]
[지석]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무덤 속에 묻는 판석으로 고양시 삼송 택지개발지구에서 출토된 유물이라고 한다. 흙과 석회를 섞어 만들어 졌으며 홈을 판 후 숯을 채워 글씨가 눈에 보이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후기 지석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내용이다.
[가와지볍씨 - 좌(1:1), 우(1:100)]
[가와지볍씨]
1991년 일산신도시 개발 문화유적 발굴조사 중 고양군 송포면 대화리 가와지 마을에서 5000년전 재배 볍씨가 발굴되었다. 송포평야 토탄층에서 발굴된 이 가와지볍씨는 미국 베타연구소의 방사성 탄소연대측정을 한 결과 5000년전 볍씨로 확인되었다.
[북한산성 대서문 문루 용마루의 양쪽 끝에 두었던 용두]
고양 가와지볍씨의 발굴로 한반도 재배 벼농사의 기원이 청동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년대가 올라갔으며 고양지역의 선조들이 5000년 전부터 벼농사를 짓고 생활하였던 한반도 최초의 농경문명을 꽃피운 주역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볍씨유물이다.
[청자기 그릇]
[청자기 그릇]
청자는 고려시대 최고의 예술품이며 한국문화의 진수라 할 수 있다. 고양시 원흥동에 있는 청자도요지는 우리나라 초기 청자를 만들던 곳이며, 청자 그릇과 갑발이 녹아 붙어있는 형태로 발견된 유물이다.
[땔감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벽제관 현판 - 故 전상옥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벽제관 현판]
벽제관 삼문에 걸려있던 현판이다. 일설에 의하면 현판의 글씨가 한석봉의 친필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한때 난로에 땔감으로 사용될 위기에 처했으나, 고양초등학교 故 전상옥 교장선생님께서 구해 고양시에 기증하면서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벽제관 전경 - 좌측 끝에 있는 문이 출입문인 삼문이다.]
벽제관은 우리나라에 오가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으로 조선 세종 10년(1428)에 다시 세워졌다. 고려의 도성인 개성과 조선의 도성인 한성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길의 중심에 있는 주요 건물이었다.
[벽제관 육각정 - 일제에 의해 찬탈되어 야마구치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이곳 벽제관을 기점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경의대로, 의주로, 관서대로, 연행로는 한양, 개성, 평양, 연경을 잇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북한산 산영루 - 현재는 기둥을 받쳐 주었던 석주만 남아 있다]
도한 고양지역을 방문한 고위관리나 손님들이 머물렀으며, 고양군수가 임금을 상징하는 패를 두고 예를 올리는 장소였다. 고양 인근에는 왕릉이 있어 이곳을 왕의 임시거처인 행궁(行宮)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화가와 소녀의 꿈이 같았으면 좋겠다]
[앗! 고양에 이런 일이 있었네~~]
☞ 고양현에 105세된 노인이 있어 옷과 모자, 쌀 3석을 내렸다. 세종 즉위년(1418)
☞ 고양의 백성이 굶어 죽자 고양현감(김자경)에게 곤장 80대로 벌을 주다. 세종 5년(1423)
[노랑 장미 한 송이 -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꽝이야]
☞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의 어진(초상화)을 안성에서 공양왕의 무덤이 있는 고양으로 옮겨라. 세종 19년(1437)
☞ 세종실록지리지 고양현의 주요내용 : 집 679호, 인구 1,314명, 역(벽제역), 봉수대 3곳, 군인 65명이엇으며, 고양현의 관청은 서삼릉 부근에 위치하였다. 유명한 섬으로는 현재 호수공원 부근에 압도(기러기섬)가 있다.
[하얀 장미 한 송이 -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세조대왕이 직접 고양 땅에 행차하여 어린나이 죽은 자신의 큰 아들인 덕종의 무덤(서오릉 경릉) 자리를 정하였다. 세조 3년(1457)
☞ 불효한 고양사람(송인례)에게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환형)을 명하였다. 세조 13년(1467)
[빨간 장미 한 송이 - 왜 이제야 내게 나타난 거야, 44송이 - 사랑하고 또 사랑해요, 119송이 - 나의 불타는 가슴에 물을 뿌려 주세요]
☞ 고양현을 고양군으로 높이다. 성종 1년(1470)
☞ 손가락을 잘라 어머니를 살린 고양사람(배철중)에게 효자문과 상을 내리다. 성종 20년(1489)
[분홍 장미 한 송이 - 당신은 묘한 매력을 지녔군요]
☞ 고양 땅에 금표비석을 세우고 고양금표구역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죽이고, 그 시신은 길바닥에 버리라는 기시형벌을 내리다. 연산군 11년(1505)
☞ 고양 땅에 지진이 일어났다. 중종 10년(1515)
☞ 고양 땅에 새알만한 우박이 내렸다. 명종 1년(1546)
☞ 흰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과 가축 400두를 죽였으므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이 벌어졌다. 선조 4년(1571)
☞ 고양 유생(이계영)이 고양 땅에서 과거를 실시하자고 건의 하였다. 영조 2년(1726)
☞ 고양군에 머리하나에 발이 다섯으로 다리가 등에 있는 소가 태어났다. 영조 9년(1733)
☞ 고양군에 몸은 하나에 머리가 둘, 귀가 셋, 눈이 넷인 소가 죽어서 태어났다. 영조 23년(1747)
☞ 영조 31년, 1755년 고양군지의 주요내용 : 고양군에는 집 3,508호, 인구 13,861명, 군인 1,996명이 있었으며, 행정구역은 8개면, 군청은 현재 고양동에 위치하였다. 서원은 문봉서원이 있다.
☞ 영조가 고양 북한산성의 행궁에 행차하고 시단봉(동장대) 위에 올랐다. 영조 48년(1772)
☞ 정조가 고양 땅에 행차하여 노인들을 만나 질병에 대해 묻고 위로 하였다. 길에서 왕의 행렬을 막고 떡을 바친 백성을 타이르다. 정조 8년(1784)
[남미 음악 공연장]
☞ 전국에서 고양 행주 기공사(행주서원)를 비롯한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하다. 고종 8년(1871)
☞ 북한산성의 행궁을 다시 고치도록 하였다. 고종 16년(1879)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언젠가 들어 본 문구다. 자신의 행복,.... 스스로 만들어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