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기행
#서울 마포구 #절두산성지 #양화진 #잠두봉 #김대건 신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포리시스
2023. 10. 18. 00:30
잔차를 타고 주변을 많이 다녔지만, 성지를 관람하기는 처음이다. 입구의 조각상까지는 다녀갔으면서도 왜 둘러 볼 생각을 못 했는지,......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나오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시던 분에게 박물관의 관람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위치를 자세히 알려주었고, 예배당과 박물관이 따로여서 전혀 예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다시 건물로 들어서서 알려준 곳의 박물관에 들어섰다. 입구에서 친절하게 맞아 주신다.
박물관은 복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천주교가 전파될 무렵 많은 분들이 희생되었던 곳에 이렇게 건물을 건축해 놓았다.
입구의 안내문과 '십자가의 길' 조성 안내문 그리고 네이버에서 옮겨와 기록해 본다.
[절두산 순교성지]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순교사적지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에 조선을 침범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한강의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범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림과 동시에 그 본보기를 보이려 한 것이다.
그로 인해 수많은 유명. 무명 신자들이 처형된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목이 베어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 '절두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29명(무명 5명 포함)뿐이다.
1956년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전개된 순교터 확보 운동의 결과 같은 해 12월에 곳곳의 부지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962년에는 순교 기념탑을 세웠고, 1967년에는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순교자들의 신앙을 배우고 느끼며 고양하기 위해 이곳에 기념 성당과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을 맞이하여 기념 성당 지하실에 순교자 유해 안치실을 설치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순교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984년 5월 3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103위 순교자의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찾아 한국 순교자들에게 뜨거운 경의를 표하였다.
한편, 1997년 11월 7일에는 성지가 위치해 있는 양화진 잠두봉이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으며, 2008년 8월에는 성지 내 박물관의 명칭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
[절두산 '십자가의 길' 안내문]
십자가의 길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형선고를 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고 갈바리아 산에 오르셨다.
'십자가의 길'은 예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신 이후 부활에 이르는 열 다섯 장면을 묵상하는 기도의 여정이다.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한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리스도께서 밟으셨던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 부활의 기쁨에 참여했다.
절두산 성지를 찾은 오늘의 우리도 이곳에서 순교했던 신앙의 선조처럼 다른 그리스도이며 잠든 예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 세상을 향해 사람의 참다운 길이 무엇인지를 외치고자 한다.
이곳 '십자가의 길'에는 오늘의 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도문의 첫 부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순교했던 신앙의 선조들이 바쳤던 옛 기도문 '성노선공'의 머리 부분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이 부분은 1864년에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던 "텬쥬셩교공과"에서 따왔다.
이곳에서 순교했던 분들도 틀림없이 이 목판본 천주성교공과에 실려 있던 성노선공 즉 '십자가의 길'을 바쳤으리라.
지금 우리는 이곳의 순교자들과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가르침을 증언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증인이 되기를 그들과 함께 다시 다짐하련다.
신유박해 순교200주년 2001년 11월 1일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천주교 서울대교구 재단에서 소유하고 있다.
누에가 머리를 든 모양 같다 하여 '잠두봉'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절두산은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가을두(加乙頭)'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말은 한국어의 '들머리', 즉 머리를 높이 든 형상을 가리키는 말이며, 용의 머리 모양 같다 하여 '용두봉'이라 불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원래 잠두봉은 예로부터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는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성에서 김포에 이르는 나루터 양화진을 끼고 있어 명승을 이루었던 곳으로,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꼭 유람선을 띄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이곳에서 참수당하자 절두산 성지로 불리게 되었다.
1966년 병인양요 100주년을 기념하여 천주교측에서는 잠두봉을 중심으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고, 주변지역을 공원으로 조성하여 성역화하였다.
지하 2층, 지상 1층에 연면적 3,382㎡인 기념관은 순례 성당과 순교 성인 28위의 성해를 모신 지하 묘소,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념관은 우뚝 솟은 벼랑 위에 웅장하게 세워졌는데 접시 모양의 지붕은 옛날 선비들이 의관을 갖출 때 머리에 쓰던 갓을,
구멍이 뚫려 있는 벽은 순교자들의 목에 채워졌던 목칼을, 그리고 지붕 위에서 내려뜨려진 사슬은 족쇄를 상징한다.
기념관에는 초대 교회 창설에 힘썼던 이벽, 이가환 등의 유물과 선교자들의 유품, 선교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형구를 비롯한 여러 순교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기념관 광장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동상,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순교한 성녀 줄리아의 묘비, 박순집의 묘, 남종상의 흉상이 있으며, 사적비를 비롯한 각종 기념물이 전시되어 있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곳을 다녀간 뒤 순례자들의 발길이 더욱 끊이지 않고 있다.
잠두봉 유적은 1997년 11월 11일자로 사적으로 지정, 고시되었으며 유적과 밀접한 연관성이 잇는 주변지역,
당시의 양화나루터 부지로 추정되는 광장 남쪽 사면과 한강에 접해 있는 도로, 제방 일부지역과 성당 서쪽 성체대기념관(1889년 건립 : 교육관으로 활용)부지 일대에 대해서도 사적으로 추가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