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기행

#강원 고성 #금강산 화엄사 #금강산 화암사 #수바위 #진표

포리시스 2023. 11. 6. 22:29

예전에 한 번 다녀온 곳인 듯 한데, 조금은 낮설기도 하다. 아마도 시간이 꽤나 경과되어 그러한 것 같다.

 

금강산 화암사 일주문

 

벼화(禾)자와 빛날화(華)자, 그리고 엄할엄(嚴)자와 바위암(巖)자의 글자가 각각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어 어느 이름으로 불러야할지 약간 고민해 보았다.

 

일주문의 현판 - #금강산 화암사

 

일주문에는 '禾巖寺'라 적혀있고, 사찰의 입구 커다란 바위엔 '華嚴寺'라 쓰여있으니 말이다. 이 사찰의 연혁을 보니 본디 화엄사로 명명되었다.

 

일주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부도군

 

오랜 세월 화재로 인한 피해가 거듭되었고, 이후에 화암사로 바뀌었다. 수바위에 전해져오는 쌀이야기로 미루어 화암사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열반송 - 허백/명조(1561~1647) : 삶과 죽음의 얽매임에서 벗어난 후 사명스님에게 귀의하여 임란에 참가하여 전승을 남긴 후 묘향산 불영대에서 입적

 

단풍이 많이 내려오기는 하였지만, 이 사찰의 어귀까지는 초록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며칠은 더 있어야겠다.

 

오도송 - 퇴옹/성철(1912~1993) : 경남 산청 출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법어로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큰 감동의 물결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인 거인. 십년을 장좌불와하고 4개국을 독파하여 선교에 막힘이 없었고 깨달음의 경지를 한층 높인 눈 밝은 선지식.

 

그늘진 숲길 옆으로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싯구와 주인공에 대한 기록을 음미해 보며 걸었다.

 

열반송 - 혜림/향곡(1912~1978) : 그가 지녔던 기용은 대방무외하여 산과 바다를 누르고 한 번 할을 하면 산악이 무너지고 봉을 휘두르면 바다가 뒤집히고 입으로 백억화신을 토해내던 걸림이 없었던 선지식.

 

싯구 하나 하나 읽다보니 금세 사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곱게 물들면 풍경이 정말 아름답겠다 싶다.

 

약사대불 조성 대시주공덕비

 

주말을 맞아 가족단위, 연인사이, 그룹을 지어 많이들 찾아왔다. 단풍의 적기에 왔더라면 정말 기쁨도 두 배가 되지 않았을까?

 

열반송 - 나옹/혜근선사(1320~1376) : 젊은날 친구가 죽는 것을 보고 출가한 고려시대 눈 맑은 선지식. 중국으로 건너가 지공을 친견하고 평산처림선사를 만나 인가를 받았다. 평산을 만나 인사를 하자 누구를 만났느냐고 묻자 지공을 만났다고 했다. 지공을 항상 무엇을 쓰더냐 묻자 천검을 쓰고있다고 대답하니 지공의 천검은 그만두고 너의 검 하나를 가져오너라. 스님은 좌구를 가지고 평산선사를 치자 이 도둑놈이 나를 죽인다 소리쳤다.

 

과거엔 사찰의 규모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여러차례 화재와 전란으로 소실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래의 내용은 네이버에서 옮겨왔다.  

 

오도송 - 효봉/찬형(1888~1966) : 평남 양덕 출신.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 졸업. 평양 등지에서 고등법원 판사역임. 치열한 정진 끝에 견성을 체험하고 나서 죽음에서 벗어나는 해탈을 체득. 비구.대처 통합종단 초대 종정 역임.

 

[화암사] 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 진표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오도송 - 성림/월산(1913~1997) : 젊어서 삶과 죽음을 고민하다가 해탈을 얻은 후 집착을 내려놓고 자유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 마음 속에 영원한 평화인 안신입명을 깨닫게 한 푸른 눈을 가진 선지식.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 장안사를, 남쪽에 이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열반송 - 동곡/일타(1929~1999) : 깨침을 이룩하기 위해 연비를 하고 훗날 태운 손가락 마다 사리가 출현한 선통을 보였고 삼장에 해박했을 뿐 아니라 선교에도 해안이 번득이었던 특별한 기용을 갖춘 선지식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오도송 - 원광/경봉(1892~1982) : 경남 밀양 출신. 깨달음을 얻고부터 일체만물과 더불어 걸림이 없었고 선적 낭만과 풍류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맛보게 한 한국불교 최고의 선승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설악무산(1932 ~ ) : 경남 밀양 출생. 현재 설악산 신흥사 조실 시인. 그가 지닌 기용은 때론 산과 바다를 누르고 사람의 마음에 해와 달을 뜨게도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 월영암을 창건했으며, 1401(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으로 이름을 바꿨다.

 

석가모니와 제자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을 창건하였다.

 

금강산 화엄사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화암사 세심교 풍경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풍악제일루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수바위와 #세심교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 주6,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전통찻집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동한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풍악제일루 옆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마당이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 최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계단을 오르며 바라본 풍악제일루와 수바위 그리고 세심교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를 정해 주었다.

 

대웅전 앞 9층석탑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을 형성할 수 있었다.

 

구층석탑과 설법전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풍악제일루와 수바위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은 탱화를 조성했다.

 

대웅전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대웅전 앞 풍경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대웅전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와 선월이 철원 장구사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손만 씻으세요?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 축성이 중수했으며, 1909년 영운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약수

 

1912년에는사찰영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대웅전 풍경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추억담기,...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사찰을 거닐며,..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삼성각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 금강루, 일주문, 미타암, 요사채 등이 있다.

 

경내 풍경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삼성각과 소나무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스님들의 공간인가 보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화암사와 수바위 풍경

 

그러나 구멍에서는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풍경

 

[진표]

신라의 고승. 성은 정.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는 길보랑. 완산주 만경현 사람.

 

대웅전 풍경과 9층석탑

 

<고승전>의 기록에는 그가 어려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 두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한 후 개구리 일은 잊고 지내다가,

 

대웅전 현판

 

이듬해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 그곳에 가보니 지난해에 담가 둔 그대로 버들가지에 꿰어진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았다 한다.

 

9층탑과 풍악제일루 풍경

 

이에 뉘우치고 불도에 뜻을 두어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명부전

 

숭제법사는 일찍이 당 나라에 들어가 선도에게 배우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맞아 오계를 받고 돌아왔으므로

 

#석가모니 고행불상

 

진표가 도통의 요령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선계산 불사의암에 들어가 7야 7일을 고행으로 마음을 닦은 끝에 740년(효성왕 4) 3월 15일 지장보상의 헌신을 맞아 정계를 받았다.

 

9층석탑과 수바위

 

다시 영산사에 옮아가 도를 닦고 마침내 소원이던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아, 752년(경덕왕 11) 2월에 <점찰경 2권>과 간자(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

 

#풍악제일루

 

그 뒤 경덕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보살계를 베풀고 조 7만 7천 섬, 견 5백 단, 황금 50냥을 시주받아 이것을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불교를 융흥케 했다.

 

화암사 풍경

 

제자에 영심. 보종. 신방. 체진. 진해. 진선. 석충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의 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