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기행
#강원 고성 #금강산 화엄사 #금강산 화암사 #수바위 #진표
포리시스
2023. 11. 6. 22:29
예전에 한 번 다녀온 곳인 듯 한데, 조금은 낮설기도 하다. 아마도 시간이 꽤나 경과되어 그러한 것 같다.
벼화(禾)자와 빛날화(華)자, 그리고 엄할엄(嚴)자와 바위암(巖)자의 글자가 각각 상이하게 기록되어 있어 어느 이름으로 불러야할지 약간 고민해 보았다.
일주문에는 '禾巖寺'라 적혀있고, 사찰의 입구 커다란 바위엔 '華嚴寺'라 쓰여있으니 말이다. 이 사찰의 연혁을 보니 본디 화엄사로 명명되었다.
오랜 세월 화재로 인한 피해가 거듭되었고, 이후에 화암사로 바뀌었다. 수바위에 전해져오는 쌀이야기로 미루어 화암사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단풍이 많이 내려오기는 하였지만, 이 사찰의 어귀까지는 초록의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니 며칠은 더 있어야겠다.
그늘진 숲길 옆으로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싯구와 주인공에 대한 기록을 음미해 보며 걸었다.
싯구 하나 하나 읽다보니 금세 사찰이 가까워졌다. 단풍이 곱게 물들면 풍경이 정말 아름답겠다 싶다.
주말을 맞아 가족단위, 연인사이, 그룹을 지어 많이들 찾아왔다. 단풍의 적기에 왔더라면 정말 기쁨도 두 배가 되지 않았을까?
과거엔 사찰의 규모가 꽤나 컸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여러차례 화재와 전란으로 소실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래의 내용은 네이버에서 옮겨왔다.
[화암사] 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769년(혜공왕 5) 진표가 창건하여 이름을 금강산 화엄사(華嚴寺)라고 하였다.
사적기에 의하면, 당시 금강산으로 들어온 진표는 금강산의 동쪽에 발연사를, 서쪽에 장안사를, 남쪽에 이절을 각각 창건했는데, 화엄사라고 한 까닭은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화엄경>을 배운 제자 100명 가운데 31명은 어느 날 하늘로 올라갔으며, 나머지 69인은 무상대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또 진표는 이 곳에서 지장보살을 친견하고 그 자리에 지장암을 창건하여 이 절의 부속 암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941년(태조 24) 월영암을 창건했으며, 1401(태종 1) 지장암을 동쪽으로 옮기고 미타암으로 이름을 바꿨다.
1623년(인조 1) 불에 타자 1625년 중건하였다. 1628년에는 광명이 지장보살상을 조성했으며, 안양암을 창건하였다.
그러나 1635년 산불이 일어나 다시 불탔다. 이에 동쪽 20리 지점으로 임시 이전했다가 1644년(인조 22)에야 옛터에 중건하였다.
1662년(현종 3)에도 화재가 있어 중건하였고, 1716년(숙종 42)에는 산적들이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승려들은 동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무릉도에 초옥을 짓고 거주하다가, 1721년(경종 1) 옛 절터로 돌아와 중건하였으며, 해성은 안양암을 중수하였다.
1760년(영조 36) 대웅전과 향각 주6, 승당이 불 타자 승려들이 협력하여 이듬해 승당을 세웠고, 1762년에 대웅전과 향각을 중건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화성 동한이 약사전에서 나라를 위한 기도를 주야 21일 동안 올렸는데, 기도가 끝나자 방광이 뻗쳐 그 빛이 궁궐의 뜰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정조는 제조상궁 최씨를 이 절에 파견하여 도한을 궁궐로 데려 오도록 하여 경위를 듣고 크게 감격하여 이 절을 가순궁의 원당으로 삼았으며, 요사채 2동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미타암의 화응전을 정조의 원당으로 정하여 관음보살상과 정조의 친필 병풍 6폭, 연을 하사하고 절의 사방금표를 정해 주었다.
이로써 이 절은 창건 이래 가장 큰 사역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철종 11) 산불로 암자까지 모조리 소실했으며, 춘담이 중심이 되어 중건에 착수하였다.
전국 여러 곳을 다니며 시주를 모으고 왕실의 도움을 받아 화엄사와 안양암을 중건했으며, 수봉은 탱화를 조성했다.
"1864년(고종 1) 다시 산불로 소실하자 불타지 않은 승당에 임시 법당을 마련하고 지냈으며, 1868년에 지장탱화와 신중탱화, 현왕탱화를 조성 봉안하였다."
그리고 화재를 면하고자 풍수지리에 입각해서 남쪽의 화기를 지닌 수암과 북쪽의 코끼리바위의 맥이 상충하는 자리를 피하여 100m 아래에 절을 짓기로 하였다.
1872년 수봉이 새 터에 법당과 영각, 누각, 요사채를 중건했으며, 1882년(고종 19) 자허와 선월이 철원 장구사에서 아미타여래상과 약사여래상을 모셔와 봉안하였다.
1893년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안양암이 붕괴되었고, 1894년 축성이 중수했으며, 1909년 영운이 안양암에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1912년에는사찰영에 따라 전국 31본산 중 건봉사의 말사가 된 뒤부터 화암사라는 이름을 공식 명칭으로 사용했다.
1915년 9월 다시 불타서 1917년 중건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때 크게 파손되어 건물 1동만 남게 되었다.
1953년 휴전 뒤에 건봉사 극락암에 있던 비구니가 정착하여 머물렀다.
1986년에는 주지로 부임한 양설이 중창하여 다시 큰 절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 삼성각, 인법당, 금강루, 일주문, 미타암, 요사채 등이 있다.
특별한 문화재는 없다. 수암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수암에는 구멍이 하나 있었는데, 끼니 때마다 그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2인분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욕심 많은 한 객승이 이를 보고 "3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면, 300번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팡이를 마구 흔들었다.
그러나 구멍에서는피가 나왔고, 이후 쌀도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진표]
신라의 고승. 성은 정. 아버지는 진내말, 어머니는 길보랑. 완산주 만경현 사람.
<고승전>의 기록에는 그가 어려서 활을 잘 쏘았는데 어느 날 논둑에서 개구리를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 두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한 후 개구리 일은 잊고 지내다가,
이듬해 봄에 개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생각이 나 그곳에 가보니 지난해에 담가 둔 그대로 버들가지에 꿰어진 채 울고 있는 개구리를 보았다 한다.
이에 뉘우치고 불도에 뜻을 두어 12세에 금산사로 들어가 숭제법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숭제법사는 일찍이 당 나라에 들어가 선도에게 배우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현신을 맞아 오계를 받고 돌아왔으므로
진표가 도통의 요령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선계산 불사의암에 들어가 7야 7일을 고행으로 마음을 닦은 끝에 740년(효성왕 4) 3월 15일 지장보상의 헌신을 맞아 정계를 받았다.
다시 영산사에 옮아가 도를 닦고 마침내 소원이던 미륵보살의 현신을 맞아, 752년(경덕왕 11) 2월에 <점찰경 2권>과 간자(점치는 대쪽) 189개를 받았다.
그 뒤 경덕왕의 부름을 받아 궁중에 보살계를 베풀고 조 7만 7천 섬, 견 5백 단, 황금 50냥을 시주받아 이것을 여러 절에 나누어 주어 불교를 융흥케 했다.
제자에 영심. 보종. 신방. 체진. 진해. 진선. 석충 등이 있는데 모두 산문의 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