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2) - #율곡선생 #유적지 #자운서원 #파평면 #신사임당 #율곡기념관 #10만양병론
경기 파주(2) - #율곡선생 #유적지 #자운서원 #파평면 #신사임당 #율곡기념관 #10만양병론
경기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 5-1에 위치한 <율곡선생 유적지>는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 그리고 가족묘가 있는 곳으로, 사적 제525호로 승격 지정된 곳이다.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선생은 신사임당과 함께 우리나라 지폐에 모자가 나란히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이다.
[율곡선생 유적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며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다.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 판관 의석(宜碩)의 증손이고, 사헌부 감찰 원수(元秀)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선생 초상화]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때 이름을 현룡이라 하였으며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신사임당 초상화]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명화(命和), 어머니는 용인이씨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덕수이씨 원수와 결혼 하였다.
[매표소를 지나면 우측으로 기념관이다]
율곡기념관 - 가족묘 - 자운서원 그리고 신도비 등 주변의 볼거리에 눈과 귀를 기울이며 걷는다면 아마도 두어시간 족히 걸리겠다. 넓은 잔디밭 광장에 그늘이라도 지어줄 커다란 나무 몇 그루 서 있다면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을 다녀도 참 좋을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기념관 앞 잔디 광장]
율곡기념관은 1986년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팔각형 양식의 건물로 지상 1, 2층을 기념관을 돌아보고 목조건물은 아니지만 2층 난간을 따라 한바퀴 돌아보며 주변 풍경을 음미해 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전시관의 1층에는 디지털사진을 촬영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궁궐을 배경을 한 장 담아 보았다. 입구에 선생과 사임당의 초상화가 있다.
기념관 벽면에 기록된 선생의 약력이다.
1536년 : 12월 26일 강원도 강릉의 외가에서 이원수의 아들로 태어남
1538년 : 말과 글을 배운 (3세)
1540년 : 어머니 사임당이 병이 들자 사당에 들어가 쾌유를 기도함 (5세)
1541년 : 한양의 본가로 돌아옴. 이듬해, 어머니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함 (6세)
[구도장원공 - 아홉번 장원 급제함]
1543년 : 본가인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음 (8세)
1545년 : 강릉 외가에서 경포대부를 지음 (10세)
1548년 :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 (13세)
1551년 : 어머니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시묘살이를 하며 불교사상에 몰두 (16세)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함]
1553년 : 가을에 시묘살이를 마치고 관례(성인식)를 행함 (18세)
1554년 :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철학 연구, 이듬해 강릉 외가에서 유학 연구 (19세)
1555년 : 금강산에서 나와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을 지음 (20세)
1556년 : 한양으로 돌아옴. 한성시에 장원으로 급제 (21세)
1557년 :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 곡산 노씨와 혼인함 (22세)
[금강산에 들어감]
1558년 : 경상도 예안에서 이황을 만남. 그후부터 이황과 편지로 학문 토론 (23세)
1561년 : 아버지가 세상을 떠남 (26세)
1564년 : 생원시 장원 급제. 여러 관직을 역임 (29세)
1566년 : 시무삼사를 상소함 (31세)
1568년 : 천추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옴 (33세)
1569년 : 관직에서 물러남. 선조의 부름으로 호당에 들어가 동호문답을 지어 임금께 올림 (34세)
[화석정]
1570년 : 관직에서 물러남. 해주에서 이황의 죽음을 전해 들음 (35세)
1571년 : 청주 목사로 부임하여 서원향약을 실시 (36세)
1572년 : 벼슬을 버리고 파주의 율곡촌으로 감 (37세)
1574년 : 우부승지로 임명되어 만언봉사를 지어 올림 (39세)
1575년 :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어 성학집요를 지어 올림 (40세)
1576년 : 관직에서 물러나 율곡리로 돌아감 (41세)
1578년 : 해주에서 은병정사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를 양성 (43세)
1581년 : 대사헌.홍문관.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고 경연일기를 완성함 (46세)
[상소를 하다]
1583년 : 병조판서를 지내며 시무육조를 올리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10만양병론'을 건의했으나 묵살당함 (48세)
1584년 : 육조방략을 짓고 숨을 거둠 (49세)
1623년 : 영의정에 추증.
1624년 : <문성>이라는 시호를 받음.
[보물 제602호 - 격몽요결]
입지(立志) - 뜻을 세우고 뜻을 갖는다. 율곡 이이 선생이 가장 중요시 하던 배움의 덕목이라고 한다.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입문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보물 제602호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지신장(持身章) 구용(九容) 구사(九思)의 문구가 눈에 와 닿아 담아 보았다.
구용(九容)
족용중(足容重) :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
수용공(手容恭) : 손가짐은 공손히 하라.
목용단(目容端) : 눈가짐은 단정히 하라.
구용지(口容止) : 입은 조용히 가지라.
성용정(聲容靜) :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
두용직(頭容直) : 머리가짐은 항상 곧게 하라.
기용숙(氣容肅) :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
입용덕(立容德) :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
색용장(色容莊) : 얼굴 모습은 장엄하게 하라.
[율곡 선생이 썼던 벼루(위와 아래)]
구사(九思)
시사명(視思明) : 보는데는 밝게 할 것.
청사총(聽思聰) : 듣는데는 총명스럽게 할 것.
색사온(色思溫) : 안색은 온화하게 할 것.
모사공(貌思恭) : 모습은 공손히 할 것.
언사충(言思忠) : 말하는 데는 충을 생각할 것.
사사경(事思敬) : 일하는 데는 경건을 생각할 것.
의사문(疑思問) : 의문이 있을 때는 물을 것.
분사난(忿思難) : 성나는 것은 참을 것.
견득사의(見得思義) : 의에 합당한 연후에 얻을 것.
[율곡전서]
學校模範(학교모범) 16條 : 선조의 왕명을 받들어 교육을 쇄신키 위하여 지어 올린 글
1. 입지(立志) : 배우는 자는 먼저 뜻을 세워서 도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는다.
2. 검신(검身) : 한가지 생각으로 학문을 지향하여 몸 가짐과 행동을 거두어 묶어야 한다.
3. 독서(讀書) : 책 읽기와 강학으로 의리를 밝힌다.
4. 신언(愼言) : 배우는 자가 선비의 행동을 닦으려면 말을 충성스럽고 믿음직스럽게 하여 대 맞추어 하여 모름지기 삼가야 한다.
5. 존심(存心) : 배우는 자는 몸을 닥으려 함에 반드시 안으로 마음을 바로 가져서 외물의 유혹을 받지 않아야 한다.
6. 사친(事親) : 선비의 온갖 행실중에 어버이를 섬기는 일 효도와 우애가 근본이다.
7. 사사(事師) : 배우는 자가 성심으로 도에 지향한다면 모름지기 먼저 스승 섬기는 도리를 넓혀야 한다.
8. 택우(擇友) : 서로 은택을 주고 인을 돕는 것은 진실로 벗에 의지하는 것이다.
9. 거가(居家) : 한 집안의 일의 처리는 극진한 도리를 다 해야 한다.
10. 접인(接人) : 사람을 접하는데 한결같이 예의를 준수한다.
11. 응거(應擧) : 과거에 응하여 보국 할 생각을 갖는다.
12. 수의(守義) : 옳은 것을 지키는 일로 이로움을 경계해야 한다.
13. 상충(尙忠) : 충을 숭상함이니 웃사람을 높이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다할 때 충후와 기절을 모두 얻을 수 있다.
14. 독경(篤敬) : 배우는 자가 덕에 나아가 업을 닦는 것은 오직 공경을 돈독히 하는데 있다.
15. 거학(居學) : 배우는 자가 학교에 있을 때는 교칙을 지켜야 한다.
16. 독법(讀法) : 글 읽는 방법으로 서로 토론하여 실질적인 공부로 면려한다.
[기념관 2층]
先須大其志 以聖人爲準則 一상不及聖人 則吾事未了
(선수대기지 이성인위준칙 일 불급성인 칙오사미료)
먼저 그 뜻을 크게 가져야 한다. 성인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자경문> 中
時務六條(시무육조)
1. 任賢能(임현능) : 어진 자와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할 것.
2. 養軍民(양군민) : 군민을 양성할 것.
3. 足財用(족재용) : 재용을 넉넉히 할 것.
4. 固蕃屛(고번명) : 변방 경비를 굳게 할 것.
5. 備戰馬(비전마) : 전마를 준비할 것.
6. 明敎化(명교화) : 교화를 밝힐 것.
[율곡 이이함]
율곡과 10만양병론
율곡은 '6조계'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해 4월 양병십만론을 주장하였다. 이 글에서 율곡은 십만의 병사를 길러야 하는 이유와 병사를 양성하는 방법, 병사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등 대비책을 실제적으로 제시하면서,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에는 전쟁에 지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붕당의 파벌싸움에 빠진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율곡의 사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에야 그의 선견지명을 깨닫고 많은 이들이 율곡선생을 존경하였다.
養兵十萬論(양병십만론)
國勢之不振極矣(국세지불진극의)
나라의 기운이 부진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不出十年當有土崩之禍(불출십년당유토붕지화)
10년이 못 가서 땅이 무너지는 화가 있을 것입니다.
願豫養十萬兵(원예양십만병)
원하옵건대 미리 10만의 군사를 길러서
都城二萬各道一萬(도성이만각도일만)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을 두되,
復戶鍊才(복호련재)
그들의 세금을 덜어주고 무예를 훈련시키며
使之分六朔遞守都城(사지분육삭체수도성)
6개월로 나누어 교대로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가,
而聞變則合十萬把守(이문변칙합십만파수)
변란이 있을 경우에는 10만 명을 합쳐 지킴으로써
以爲緩急之備(이위완급지비)
위급한 때의 방비를 삼으소서,
否則一朝變起(부칙일조변기)
이와 같이 하지 아니하고 갑자기 변이 일어날 경우
不免驅市民而戰(불면구시민이전)
백성들을 내몰아 싸우게 하는 일은 면치 못하여
大事去矣(대사거의)
전쟁에 지고 말 것입니다.
[동호문답]
율곡, 퇴계를 만나다
율곡과 퇴계는 조선 유학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 이들은 35년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존중하며 생각을 나누었다.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 퇴계는 58세의 원숙한 대학자였고 율곡은 23세의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퇴계는 율곡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퇴계 이황의 주리론
퇴계 이황은 평생 관직에 나아가기보다는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바친 학자요, 교육자였다. 그는 기(氣)보다 이(理)가 더 중요하다는 주리론(主理論)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경제보다 윤리, 현실보다 이상, 물질보다 정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인간을 보는데 있어서도 도덕적 이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매화도]
율곡 이이의 이기론
율곡 이이는 관직에 나아가 활동하면서 학문연구에도 열중했던 유학자였다. 그는 이(理)와 기(氣)의 가치는 함께 중요하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이와 기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즉 윤리와 경제,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은 조화되어야 하고 두 가치 모두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나라와 백성에 대한 근심걱정을 많이 하였고, 백성이 잘 살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개혁을 강조하고 훌륭한 대책들을 임금에게 제시하였다.
[재실]
조선왕조의 통치이념, 성리학
조선은 유교를 중심으로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주자성리학은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 사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이를 우리 것으로 소화하여 조선성리학의 단계까지 끌어 올렸다. 이는 우리의 고유한 사상이며 여러 사람파 학자들의 노력을 거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에 의해 완성 되었다.
[여현문 앞 연못]
이매창(1529~1592)은 4남 3녀의 7남매 중 둘째이고 율곡의 누님으로 후에 조대남의 아내가 되었다. 여류 화가로서 어머니 사임당을 많이 닮았으며 생김새 뿐 아니라 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릴 만큼 높은 학문과 그림솜씨를 인정받았다.
옥산 이우는 1542년(중종 37)에 7남매 가운데 막내 아들로 태어나 1609년(광해군 1)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율곡의 막내동생으로 예술적 자질이 뛰어나 시는 물론 글씨와 그림, 거문고에까지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가족묘역의 정문 - 여현문]
신사임당묘와 이이선생묘
자운산 기슭에 위치한 <신사임당 묘>와 <이이선생 묘>는 각각 경기도기념물 제14호. 제15호 이다. 전체 13기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데 중심묘역에는 맨 위에 율곡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묘, 그 아래로 이이의 맏형 이선과 부인 곽씨의 합장묘가 위치하고 있다. 그 아래로는 이이의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묘가 자리하며 맨 아래쪽에는 이이의 맏아들 경림의 묘가 있다.
[신사임당 합장묘역 - 경기도기념물 제14호]
이이선생묘는 부인 곡산노씨와 위 아래로 인접해 있으며 봉분 정면에 상석과 오른쪽에 묘비가 위치해 있다. 그 좌우로 망주석과 문인석을 각각 세웠다. 신사임당묘는 남편 이원수와의 합장 봉분으로 중앙에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위치하며 좌우로 키작은 문인석이 자리하고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이의 명성에 비해 소박하고 평범한 묘제 형식을 띠고 있다.
[율곡 선생 묘, 뒤에 부인묘 - 경기도기념물 제15호]
이중 이이의 묘소는 부모의 묘소보다 위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와 관련해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자식이 현달하거나 입신양명했을 경우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이의 부인 곡산노씨의 묘는 이이의 묘 보다 조금 위쪽에 전후합장묘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는데, 이이 신도비문에 의하면 '노부인은 임진왜란을 만나 서울에서 신주를 받들고 산소로 돌아와 왜적을 꾸짖다가 살해를 당하였는데 일이 나라에 알려지니 정려를 세웠다'고 전해진다는 안내문이다.
[자운서원 전경]
자운서원
<자운서원>은 율곡선생 유적지 내에 있는 서원으로 경기도기념물 제45호 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에 의해 창건 되었다.
[자운문]
1650년(효종 1)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1713년(숙종 39)에 그의 후학인 사계 김장생(1548~1631)과 현석 박세채(1632~1695) 두 분을 추가로 배향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 하였다.
[내삼문으로 본 문성사]
그러나 조선후기 1868(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 터에 묘정비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들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경내 주변을 정화 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인 문성사와 내삼문 담장 밖에 <자운서원묘정비>가 세워져 있다.
[강인당]
자운서원묘정비는 율곡선생의 덕행을 추모하고 자운서원의 건립 내력을 기록한 화강암 비로 1683년(숙종 9)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곡운 김수증이 예서체로 썼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운서원 묘정비]
문성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높은 대지위에 세워져 있으며 내부에는 율곡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가운데에 모시고 좌우로 김장생과 박세채 두 분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율곡문화제 행사때 제향을 올리고 있다.
[동재 - 입지재]
문성사 아래로는 강당 건물인 강인당과 그 아래로 동재인 입지재, 서재인 수양재가 위치하며 강인당 양쪽으로 420여년이 넘은 노거수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데, 한여름에도 시원스레 더위를 식혀줄 듯 싶다.
[서재 - 수양재]
이이선생 신도비
<이이선생 신도비>는 파주시 향토유적 제6호로 높이 223cm, 폭 109cm, 두께 39cm 규모의 대리석 비석으로 앞뒤면에 율곡 이이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1631년(인조 9) 4월에 건립 되었고 이항복이 비문을 짓고 신익성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이 썼다고 한다.
[비각과 율곡선생 신도비]
비 면에는 총탄의 영향으로 인하여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아마도 6.25동란때 그랬던 것으로 보여진다. 비각은 아담한 팔작지붕으로 정사각형 가깝겠다.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찬찬히 둘러보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름 소중한 시간을 투자했다고 생각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