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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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리시스
2022. 10. 10. 22:25
화성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된 갈양사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 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게되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넉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경기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하여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습니다.
전국 5규정소(규정소: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의 하나가 되어 승풍을 규정했으며, 팔도도승원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했습니다.<용주사 홈페이지>
<용주사 홍살문>
홍살문은 왕실의 능. 원. 묘. 궁전 관아 등의 정면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붉은 칠은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쪽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헌경왕후,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 강점기 때 이후로 중단 되어 왔다.
2008년(무자년) 6월 24일 오늘,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하는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다한 혼정신성의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용주사 천보루>
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 36호. 용주사 천보루는 대웅보전의 앞 마당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문루인데, 일반적으로 사찰의 건축양식보다는 궁궐이나 대갓집의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용주사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세워졌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건물 밖의 현판에는 '천보루' 안의 현판에는 '홍제루' 라고 적혀 있는데, 이는 '밖으로는 하늘이 보호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구제하여 백성들이 불성을 깨닫게 하는 곳이다.'라는 의미이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이며, 앞쪽으로 1칸 만큼 돌출되어 있다.
<용주사 동종>
국보 제 120호. 용주사 동종은 신라의 종 형식을 갖춘 고려 시대의 거대한 범종이다.
종 맨 위에는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이 있고, 고리 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두 발로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종의 네 곳에 있는 ㄷ 자 모양의 유곽 안에는 9개의 돌출된 연꽃 봉오리 형태의 유두가 있다.
종의 몸체 앞뒤에는 비천상을, 좌우에는 삼존상을 새겨 넣었고, 그 사이사이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가 있다.
종의 어깨와 입구 부분의 넓은 띠는 서로 다른 문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 몸체에 통일신라 문성왕 16년인 854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후대에 새긴 글이 있으나, 종의 형태와 문양이 그 시대의 다른 종과 일치하지 않아 학계에서는 고려 초기의 종으로 추정한다.
<용주사 대웅보전>
보물 제1942호. 용주사 대웅보전은 사찰 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있으며, 석가여래와 함께 동방 약사여래, 서방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보신 곳이다.
내부와 외부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고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여덟팔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또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방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형식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 안에는 목조 삼세불 좌상과 후불탱화, 삼장 보살도와 같은 귀중한 문화재가 모셔져 있는데, 당대 최고 수준의 걸작품이다.
정조는 이 절을 자신의 꿈 내용대로 용주사라 이름 짓고 중심 전각인 대웅보전의 현판을 직접 썼다. <안내문>
여러 곳의 사찰과 비교하여 일주문을 대신하는 사천왕문, 그리고 사찰 내부에 세워진 홍살문과 행랑채를 연상케 하는 건물 구조가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