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행
#경기 연천 #숭의전 #왕건 #마전 #사적 제 223호
포리시스
2023. 1. 29. 23:33
경기 연천의 <숭의전>은 사적 제 223호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대 3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곳으로 고려조 종묘이겠다. 수도였던 개성과 철원도 아닌 이곳에 세워지게 된 이야기와 작은 역사 이야기를 적어본다.
<왜 연천의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1469~1502)이 마전의 한 객관에 머물며 남긴 시를 보면 당시까지만 하여도 마전은 매우 궁벽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다.
왜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임진강변의 외딴 시골마을에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을 세웠을까?
적막한 마전군
어느 때 관아를 지었나
무너진 담에 푸른 풀이 더북하고
부서진 벽에 파란 이끼 끼었네
(중략)
태수는 공무가 없어서
거문고 타는 동헌이 대낮에도 한가하다
이는 마전의 앙암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주 들러 기도를 드리던 기도처(원찰)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으로 가는 길은 180리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 이르면 날이 저물어 하루를 쉬어가야 했다.
임진강변의 잠두봉 중턱에 자리 잡은 앙암사는 개경에서 딱 90리 지경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하여 기도처로서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은 하루를 쉬어가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마전군의 앙암사에 두게함으로써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과 개경 밖으로 전조의 흔적을 지워 유폐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예방하는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고려 왕족의 수난사>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 왕족의 수난은 개경에서 쫓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392년 10월 13일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를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건립하였으며 왕우의 아들 조와 관은 왕씨 성을 뺏기고 어머니의 성인 노씨를 따르게 하였다.
1394년 1월 고려 왕족을 피바람으로 몰아넣는 사건이 발생한다. "맹인 이흥무의 점괘사건"으로 불리는 이 희대의 참극은 밀양의 한 궁벽한 점쟁이 집에서 시작되었다.
밀양의 유명한 점쟁이인 맹인 이흥무에게 조선의 개국공신인 박위의 명을 받은 김가행과 박중질이 찾아와 "고려 왕조 공양왕의 명운이 우리 주상전하 보다 누가 낫겠는가?"라며 점을 치게 하니
이흥무는 "남평군 왕화의 명운이 귀하다 하고 그 아우 영평군 왕거가 그 다음이 된다"고 점을 쳐 주었다.
이 사건이 발각되어 1394년 4월 주모자인 김가행, 박중질, 이흥무 등은 참수되고 연류된 왕화, 왕거 역시 참수형을 면티 못하였다.
이 참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삼척, 강화, 거제에 살던 다른 고려 왕족들에게까지 미쳐 강화, 거제도의 앞바다에서 고려의 왕족들을 모아 모두 수장하여 죽이고 전국 곳곳을 수색하여 왕씨들을 참수하였다.
<숭의전의 연혁>
역성혁명을 통해 왕조를 찬탈하였지만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후대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대사헌 민개의 주청으로 개경 내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의 왕족들은 개경에서 쫓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 번째 항목에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공양왕의 아우 왕두와 두 아들 조와 관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개경에서 고려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마전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함으로써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중시했던 태조 이성계가 죽자 전조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는 점점 더 소홀해져 갔다.
심지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에는 팔위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않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 대에 이르러 허물어 가는 사당을 고쳐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 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소 역대시조제의 하나인 숭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숭의전>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고려의 왕을 봉사하던 종묘로 고려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과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묘전이다.
<숭의전 건물의 배치>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년(순종 2) 등 5차례에 걸쳐 개수와 중수를 반복하다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여 1971년 그 터를 사적 제 223호로 지정하고 그 다음해부터 복원 건립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숭의전 : 4왕의 위패를 모신 정전.
이안청 : 숭의전 보수공사 시 잠시 위폐를 옮겨 모시는 곳.
배신청 : 고려조 16공신의 위패를 모신 곳.
전사청 :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 숭의전 제사는 생식제례 임으로 전사청에는 굴뚝이 없음.
앙암재 : 제례 때 사용하는 향, 축문, 폐백, 제복, 륜관, 홀, 목화, 관대, 폐옥, 후수, 사모 등을 보관하고 제례시에 헌관, 집사를 분정하는 업무를 수행하며 제례전반에 대한 습의를 행하는 곳.
<태조 왕건의 동상>
왕건의 동상은 본래 고려의 도읍인 개경의 고려 종묘를 헐고 연천의 마전 앙암사에서 전조의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르러 주자가례에 입각한 제례법의 개혁으로 동상과 진영(초상화)을 목주(위패)로 대신하게 되자 잠시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세종 11년 현능 곁에 매장하였다.
최근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능 정비 공사 때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북한 학자들이 금동불상으로 잘못 판단하여 개성박물관에 보관해 오다
1997년 개성박물관을 방문한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왕건의 동상임을 알아내어 현재는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숭의전의 대제는 지금까지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거치며 그 형식과 규격이 폄하되었으나 관계문중의 노력으로 지금까지 그 명맥이 이어져 매년 음력 3월 3일과 음력 9월 9일 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숭의전 잠두봉 암각문>
강 건너 삼화리에서 이곳을 보았을 때 산세가 마치 누워있는 누에의 머리처럼 생겼다하여 잠두봉이라 불리게 되었다.
임진강의 침식작용으로 잠도봉이 임진강에 면한 곳은 수직 절벽이 생겨났는데, 어떻게 새겼는지 이곳에는 한수의 칠언절구가 남아있다.
숭의전을 중수하고
숭의전을 지은 지가 사백년이 되었는데
누구로 하여금 목석으로 새로 수리하게 하는고
강산이 어찌 흥망의 한을 알리요
의구한 잠두봉은 푸른 강물 위에 떠있구나
지난 세월 만월추에 마음 슬퍼하였거늘
지금은 이 고을 군수가 되어 묘궁을 수리하였네
조선은 생석을 갖추어 고려왕들을 제사토록 하였으니
아마도 숭의전은 징파강(임진강의 별호)과 더불어 길이 이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