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행
#경기 고양 #행주문화제 #진주 오광대 #경남 무형문화재 #탈놀이
포리시스
2023. 5. 30. 01:09
고양 행주문화제 기간 지방문화 교류의 일환으로 공연되었던 <진주오광대> 이야기이다.
다른 공연을 보다가 조금 늦어 처음부터 담지는 못했는데, 시간으로 보아 5과장 모두 공연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다섯 색깔의 의복을 입고 춤을 추었던 것은 아마도 1과장 내지 2과장이었을거고, 이어진 할미의 등장은 5과장이라 여긴다.
5과장의 내용이다. 할멈은 영감을 찾아 나선다. 그 사이 아들도 등장하고,...
얼마 지나 영감과 상봉을 하는데, 영감이 두 명의 첩을 데리고 온 사실을 알게 된다.
영감과 할멈은 그 이유로 다툼을 하게 되는데, 그만 영감이 할멈을 발로 걷어 차 할멈은 기절을 한다.
영감은 급한 마음에 의원들을 불러 할멈을 치료하지만 의원들은 도저히 고칠 수 없다고 돌아간다.
그러다 무당을 불러 성심을 다해 굿을 하자 드디어 할멈이 깨어나게 되고, 서로 얼싸안고 춤을 춘다.
그 사이 모든 공연자들이 무대위로 올라와 춤을 추며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하고 마무리 된다.
직접 진주까지 달려가 관람하는 것보다 덜하겠지만, 이렇듯 우리의 탈놀이 문화를 감상하게 되어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먼 걸음하여 열과 성을 다해 공연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아래 내용은 옮겨 온 글이다.
2003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진주오광대>라고 하면 진주시내에 살면서 노래와 춤을 좋아하는 한량들이 모여 놀던 토착적인 오광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진주지방에는 두 종류의 오광대가 연희되었다.
즉, 현재의 진주시 지역에는 진주에 본거지를 두었던 유랑예인집단인 솟대쟁이패의 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오광대가 있었고,
<진주오광대>는 구전자료에 의하면 100여년 전에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패가 진주에 와서 공연한 것을 보고 시작되었다 하고,
신반의 대광대패가 진주에 와서 공연한 것을 보고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19세기 말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진주오광대>는 진주 고을의 세시적인 대동놀이로 전승되다가 1920년대 말에 쇠퇴했으나,
1930년대 초에 민족주의적인 향토문화부흥운동과 때를 같이하여 다시 재공연되었다.
이 시기의 공연에는 지방의 지식층 청장년들과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1936년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중단되었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재연되었다.
1960년대 초에 재연하기 위하여 신길룡 주관, 김치권 구술, 김준호 필사로 만든 연희본인 <<오광대각본>>(이명길 소장본)이 전한다.
이 놀이는 음력 정월보름날 저녁에 놀이되는데, 연희장소는 봉곡동 타작마당거리, 상봉동 정상진정미소마당, 계동 진주청년회앞마당거리 등이었다.
당시 농사를 짓던 진주시 북부지역의 타작마당 같은 넓은 터에서 주로 공연된 것이다.
말년에는 진주운동장, 삼포극장 등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었다.
연출형태는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춤이 주가 되고 재담과 몸짓과 노래가 곁들여 연희된다.
꽹과리. 북. 장구. 징. 해금. 피리. 젓대 등으로 주로 굿거리장단을 연주하고 이에 맞추어 덧뵈기춤을 춘다.
그런데 다른 지방의 오광대보다 가락이 다양하여 타령. 세마치. 도토리. 염불 등 변화가 많고,
춤도 덧뵈기춤을 바탕으로 등장인물의 성격에 따라 진춤. 문둥춤. 중춤 등 다양한 춤을 춘다.
놀이의 구성은 각기 다른 독립적인 주제를 가진 마당(과장)이 이어져 있는데, 각 마당의 놀이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오방신장무 마당으로 각기 복색을 오방색에 따라서, 호수립을 쓰로 중치막을 입은 동방청제장군. 서방백제장군. 북방흑제장군. 남방적제장군. 중앙황제장군이
염불장단에 맞추어 등장하여 각기 동.서.북.남.중앙의 오방위에 서서 느린 굿거리장단에 따라 무언으로 진춤을 춘다. 이것은 오행설에 따른 벽사진경의 의식무라 할 수 있다.
둘째는 문둥이마당으로 각기 청.백.적.흑.황의 오색을 칠한 바가지탈을 쓴 다섯 문둥이가 등장하여 세마치장단에 맞추어 문둥춤을 한참 춘다.
그러다가 투전하는 자리에 무스러미라는 천연두 걸린 아이를 업은 어딩이가 반신불수같이 절룩거리며 나와서 구경하다가 판돈을 훔쳐 달아나는 것을 잡아 다그치자
아들 병을 고치는 데 썼다고 하여 용서하기도 하고, 포졸이 나와서 잡아가기도 한다.
이것은 문둥이의 비참한 생활상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셋째는 양반마등으로 말뚝이가 등장하여 채찍으로 다섯 문둥이를 쫓아내고 생원을 부르면 생원. 차생원. 옹생원이 등장하고,
말뚝이가 이들 양반을 찾아다닌 경로를 말하면서 양반집안의 도덕적 부패상을 폭로하고 양반계층을 비판한다.
넷째는 중마당으로 소무가 타령장단에 맞추어 손춤을 추고 있는 곳으로 상좌를 앞세운 중이 나와 소무를 유혹하는 춤을 춘다. 이것은 파계승을 풍자한 마당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는 영감. 할미마당으로 처첩관계로 인한 가정비극을 표현한 것이다. 생원과 할미가 서로 찾다가 상봉하였는데,
영감이 첩을 데리고 왔다며 할미가 질투하자 영감이 할미를 발로차서 기절시키고, 의원이 치료하여도 효험이 없어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한다.
생원이 나와 굿을 중단시키고 여색을 좋아하는 중을 잡아다가 매를 때리고, 중은 중노릇도 못하겠다는 자탄가를 부른다.
넷째마당과 다섯째마당은 대본에 따라서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고 , 중이 처벌을 받는 장면이 영감.할미의 갈등장면 다음에 삽입되기도 하고 호화롭게 팔선녀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진주오광대>에 소요되는 탈은 오방신장. 문둥이. 무스러미. 어딩이. 옹생원. 차생원. 할미. 중. 상좌. 소무 등 20개 내외이며, 탈을 쓰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로는 의원. 무당 등이 있고, 생원. 작은마누라 등은 다른 마당에 상용한 탈을 대용한다.
탈의 재료는 바가지가 대부분인데, 그 위에 종이를 여러 겹 붙여서 요철이 드러나게 하여 입체감을 내고 색을 칠한다. 오방신장탈과 포졸탈은 종이로 만든 평면적인 것이다.
<진주오광대>의 이름난 놀이꾼으로는 최선준(옹생원.어딩이 역). 신길룡(할미 역). 문장현(악사) 등이 있었다.
이들보다 10여 년 후배로 김치권(말뚝이 역)이 있었고, 생존한 놀이꾼으로는 이재영(말뚝이 역)이 있다.
<진주오광대>는 오행설에 따른 벽사진경의 의식무인 오방신장무가 있고, 그에 합치되는 5문둥이를 등장시켜서 오광대 상징체계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것이 주목된다.
그리고 극내용이 <가산오광대>와 비슷한 점이 많고 서로 가까이 있는 지역이라 양자간에 밀접한 고나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역마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많이 있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속에 맥을 이어가는 분들이 없다면 문화는 금새 소멸될거다. 한없는 감사함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