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행
#경기 양주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 #괘불대 #당간지주 #맷돌
포리시스
2023. 8. 19. 00:15
이곳 <양주 회암사지>를 처음 다녀온지 20여 년이 훨 넘은 듯 싶다. 아이들 자랄때 역사공부한다며 방문했었는데,...
그 때만 해도 절터가 지금처럼 복원되지도 않았고, 유물들도 한 켠의 컨테이너 공간에 담겨져 있었던 것 같다.
넓디 넓은 이 곳의 계단을 오르내리다보니 규모도 클 뿐만 아니라 많은 전각이라도 들어서 있었다면 빼곡한 문을 찾기도 무척 힘이 들었을 것 같다.
남아있는 유물로는 괘불대, 당간지주, 커다란 맷돌과 기록했던 부도탑이 있지만, 사실 모두가 유물이다.
건물의 가장 뒷쪽에 위치했던 행궁터의 흔적과 여러 전각들의 초석들이 남아 있어 옛모습을 회상하며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쪽으로 커다란 화장실터가 다소 생소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머물렀을 것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유적이라 생각해 본다.
아마도 내가 다녀본 곳중 가장 규모가 큰 절터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래의 이야기는 현장의 안내문과 문화재청, 양주시에서 옮겨 와 기록하였다.
말 그대로 터라 보잘것 없다여길지 모르지만, 역사의 이야기를 상상해 보며 감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회암사지]
고려 충숙왕 15년(1328) 원나라를 통해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이 처음 지었다는 회암사가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회암사가 지어지기 이전에도 이 곳에는 이미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전기 이색이 지은 <천보산회암사수조기>에 의하면, 고려 우왕 2년(1376) 지공의 제자 나옹이 "이곳에 절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번성한다"는 말을 믿고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조선 전기까지도 전국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고 하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면서 자신의 스승인 무학대사를 이 절에 머무르게 하였고,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성종 때는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 절을 크게 넓히는데 13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그 후 명종 때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전국 제일의 사찰이 되었다가, 문정황후가 죽은 뒤에 억불정책으로 인하여 절이 불태워졌다.
이 절이 있던 자리에서 500m 정도 올라가며 지금의 회암사가 있는데, 그 부근에는 중요 문화재들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세운 나옹의 행적을 새긴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를 비롯하여, 지공이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 회암사지부도(보물). 나옹의 부도 및 석등(경기도유형문화재)과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쌍사자석등(보물). 무학대사비(경기도유형문화재).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유형문화재). 어사대비(경기도유형문화재). 맷돌(경기도민속자료)과 당간지주. 건물의 초석들이 남아있다.
이 사찰은 평지가 아닌 산간지방에 위치하면서도 평지에 있는 절에서 볼수있는 남회랑을 만든 점에서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사찰 배치형식을 보이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회암사 대가람]
회암사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후원속에서 융성했던 당대 최고의 사찰이다.
발굴 조사를 통해 가람의 구조와 배치, 그리고 건축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기의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회암사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나려가면서 계단식으로 평지를 조성하고 석축을 쌓아 각 공간을 구획하였다.
모두 9개의 단지로 구성되지만, 그 중 북쪽의 7개 단지 외곽에만 담장을 두르고 그 내부에 건물을 배치하였다.
[회암사 건물 배치와 공간 구성]
회암사의 건물 배치는 일반적인 사찰의 가람 배치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인 공간이 결합된 특징을 보인다.
즉 남쪽의 4개의 문지와 연결되는 남북축 선상에는 보광전이나 설법전과 같은 주요 불전을 배치하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 위계가 낮은 건물을 배치하여 종교적인 공간을 형성하였다.
이와 달리 남북축 선상에서 가장 북쪽에 배치한 정청과 동. 서 방장은 정치적 공간으로서 궁궐의 편전과 침전의 배치 형식을 고려하되 객사의 건축적 조형 양식을 적용하여 독특한 건물 배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건물 배치와 공간구성이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왕실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된 회암사의 건축적인 특징인 것이다.
[회암사지 괘불대]
괘불대(掛佛臺)는 기우제나 수륙제, 영산재 등 불교도들이 야외에서 지내는 대규모 법회나 의식에서 예배 대상물이 되는 괘불을 걸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하는 시설물이다.
따라서 괘불대는 당간이나 당간지주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하지만 꼭대기에 용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당이 중심에 있고 당에 깃발과 같은 불교 장엄물이 걸리는 당간 지주와는 달리, 괘불대에는 불화를 건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당간 지주는 사찰의 초입부에 위치하지만, 괘불대는사찰의 주요 불전 앞에 자리한다.
정확한 제작 시기를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치석 수법이 회암사지 당간지주 등의 석조물과 같이 매우 정교한 편이므로 고려 말이나 조선 전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디지털양주문화대전)
[회암사지 당간지주]
당간 지주는 당(幢)을 지지하기 위한 2개의 기둥을 말하는데, 깃발과 같은 형태의 불교 장엄물인 당을 걸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당과 유사한 불교 장엄물로서 번(幡)이 있는데, 불교 경전에 서술된 그 쓰임과 용도를 보면 사찰에서 부처의 세계를 장엄하는 불구(佛具),
혹은 부처에게 공양하거나 공덕을 쌓는 주요 도구로 당과 번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회암사가 번영하였던 고려 말기에서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현 위치에서 좌측으로 15m 거리에 있는 담장 지대석 밑에 쓰러져 매몰되어 있던 것을 1981년에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총 3주가 발견되었는데, 지주 외외에 그 기단부나 간대석은 남아 있지 않아 복원시 하단부를 시멘트로 고정하였다. 3주 모두 유사한 치석 수법을 보인다.
지주부는 전체적으로 사각을 띠며 각 면을 고르게 다듬었는데,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약간씩 좁아지는 형태이다.
외면의 외곽 모서리만을 6~7cm의 일정한 너비로 깎아서 다듬고 지주 정상부는 편평하게 다듬었다. 특이한 점은, 당간을 세울 때 간을 끼우는 간구나 간공이 없다는 것이다.
회암사지 당간지주는 정연한 치석 수법을 보인다.
특히 각 면을 매우 고르게 다듬었는데, 이는 양주 회암사지 발굴 조사 결과 노출된 각종의 석조물들에서 보이는 치밀하고 정교한 조각 수법과 일백상통한다.
회암사가 고려 말에서 조선 전기에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기반으로 많은 불사를 진행하였다는 사실을 볼 때, 회암사지 당간지주 역시 왕실에서 파견된 석공들이 제작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디지털양주문화대전)
[회암사지 맷돌]
맷돌은 곡물을 가루로 만드는 데 사용되는 도구로, 한 사람이 손잡이를 돌리고 다른 한 사람은 아가리에 곡물을 흘려 넣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회암사지맷돌과 같이 맷돌이 크거나, 갈아야 할 곡물이 많을 때에는 손잡이에 가위다리 모양으로 벌어진 맷손을 걸고 2~3명이 사람이 노를 젓듯이 앞뒤로 밀어 가며 곡물을 갈기도 한다.
회암사지맷돌 2기는 양주 회암사지의 동쪽에 나란히 남북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중 1기는 암맷돌 하나가 없어진 상태이다.
맷돌이 놓인 옆으로는 석조(石槽)가 함께 놓여 있어서 사찰의 취사 시설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1978년 10월 10일 경기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기도 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숫맷돌은 긴지름 173cm, 짧은 지름 151cm이고, 암맷돌은 반지름 31.5cm, 두께 24cm로 대형 맷돌이다.
주둥이가 길게 나와 있어 타원형에 가까운데, 이러한 특징은 그보다 주둥이가 짧은 조선시대 맷돌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하나의 석재로 아래쪽을 고정시키기 위한 매함지와 맷돌을 함께 만들었고, 안쪽에 놓인 둥근 마판의 가운데에는 암맷돌과 연결되는 중쇠를 박았던 구멍이 나 있으며,
맷돌을 돌리는 맷손을 중심부에 박을 수 있 있도록 만든 것이 특이하다.
회암사지맷돌의 크기나 사용 방식 등을 고려해 보면, 고려 말 ~ 조선 초 전국 최대의 사찰로서 왕실의 막대한 경제적 후원을 바탕으로 많은 승려들이 머물렀고,
왕실 인물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도들이 왕래하였던 회암사의 규모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
[양주 회암사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선정]
<양주 회암사지>는 1964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유산구역에는 <양주 회암사지 사리탑> 등 보물 4건을 포함한 총 9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양주 회암사지>는 지난 2018년과 2020년 잠정목록 선정 심의에서 부결된 바 있으나, 이번 심의에서 문화재위원회는 유산의 성격, 명칭, 부도군과 사찰(유적) 구역 간의 연결성과 비교 연구 등에 대해 지속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를 권고하면서 <잠정목록> 선정을 의결하였다.
둘러보니 규모가 굉장하다. 경복궁의 영역과 비교할만하다 여긴다. 이 건축물이 현재까지 보존되었다면 많은 관람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룰텐데 정말 안타깝다. 억불정책의 일환으로 이 커다란 사찰이 불타버렸다고 하는데,....
입구에 쓰여졌던 문구처럼 건축물을 구경할 수 는 없지만, 역사를 느낌하고, 마음을 비워 치유도 하고, 건물의 축대에 걸터 앉아 쉼어가며 여행을 해 봄직한 곳이다. 무더운 여름철엔 그늘이 없으므로 수분섭취와 그늘지울 수 있는 양산도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