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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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리시스
2023. 8. 30. 00:40
이어지는 글,.... 이곳 회암사지박물관에 전시중인 유물중에 <청동금탁>이야기로 글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사찰을 관람하다보면 전각 추녀 끝에 매달려 바람을 타고 청아하게 울려주는 작은 풍경을 많이 보아왔을 것 같다. 이곳에서 보게 된 금탁,... 규모가 제법 커서 투구인가 싶은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안내문을 보고 이러한 풍경의 역할을 했던거란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청동금탁]
금탁(琴鐸)은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작은 종 모양의 금속 장식으로 풍탁, 풍령이라고도 한다.
몸체 아래에 걸린 구름 모양의 풍판이 바람에 흔들리면 몸체 안쪽의 부속구를 움직여 맑은 소리를 낸다.
금탁을 만들 때 제작을 후원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겉면에 새겼는데, 명문을 통해서 1394년(태조 3년)에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 신덕왕후 강씨, 의안대군 이방석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청동금탁의 표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이다.
왕사묘엄존자 조선국왕 왕현비 세자
천보산에 있는 회암사 보광전 네 모퉁이는 금으로 단장하여 천궁보다 훌륭하여, 금탁을 매달아 모든 부처님께 바칩니다.
또한 작은 티끌 같은 중생들이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의 본심을 깨닫게 하소서, 원컨대 우리가 이 신묘하면서도 아름다운 연기를 이어 조선이라는 이름이 만세토록 전해지고
전쟁이 영원토록 그쳐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결국 함게하는 인연으로 돌아감을 깨닫게 하소서, 홍무 27년(1394) 갑술 6월
공덕주 가정대부판내시부사 이득분, 시주 정신택주 허묘정, 함양군부인 박묘담,
영순택주 박씨, 협□성옹주 윤씨, 검교문하시중 이승
[범자무늬 기와 : 梵字文瓦(Tiles with Sanskrit Inscription)]
범자는 고대 인도의 글자인 산스크리트어를 말한다. 기와에 범자로 쓰인 글자는 '옴.마.니.반.메.훔'으로 불교 경전인 《천수경-千手經》에서 관음보살을 부르기 위해 외우는 여섯 자로 된 주문이다.
그 의미는 "옴,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며, 훔"으로 이 주문을 외우면 여러 가지 재앙이나 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관음보살이 지켜주고 큰 자비를 얻는다고 믿었다.
범자무늬는 불교가 매우 성행하였던 고려 후기에 중국 원나라의 영향으로 유행했는데, 주로 범종이나 향로 등 불교 미술품의 장식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용무늬 기와 : 龍文瓦]
용은 실제로 존재하는 여러 동물의 특징을 결합해서 만든 상상의 동물이다.
「본초강목」에서는 용의 모습에 대해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은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발바닥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표현했다.
용은 수호의 능력과 귀신을 물리치는 역할을 갖추고 있어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한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왕권을 물리치는 역할을 갖추고 있어 왕실을 제외한 곳에서 용무늬의 사용을 금지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암사지에서 여러 종류의 용무늬 기와가 출토된 점으로 볼 때 당시 회암사의 위상이 높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봉황무늬 기와 : 鳳凰文瓦]
봉황은 상상 속의 신비한 새로서 봉은 수컷, 황은 암컷을 가리킨다.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 여겨졌으며 한 번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하여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봉황무늬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봉황의 고상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 왕비에 비유되었다.
회암사에서는 용무늬 기와와 함께 봉황무늬 기와가 왕실의 상징물로서 일부 건물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는데 당시 회암사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연꽃무늬 기와 : 蓮花文]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꽃을 피우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항상 맑은 본성을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따라서 깨끗함과 고귀함을 상징하여 부처님이 앉아계시는 자리에 연꽃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상징하기도 해서 건축물의 장식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연꽃무늬 기와는 종류가 다양하며 아름다운 문양을 살펴볼 수 있다.
[글자가 새겨진 기와 : 銘文瓦]
회암사지에서는 기와를 제작한 연도나 후원한 사람의 이름을 새긴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
이 글을 통해 회암사 건물을 고치고 새롭게 지었을 때의 기록과 왕실의 주요 인물들이 회암사의 여러 행사에 관여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청기와]
청기와는 중국 명나라 황실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기와에 유리질의 유약을 발라 초록빛이 드러나도록 구워 낸 것이다.
청기와의 색깔을 낼 때 쓰는 염초(질산칼륨)는 전쟁에서 사용하던 화약의 핵심 원료였기 때문에 재료를 구하기 어렵고 제작에 많은 비용이 들었다.
청기와를 제작하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궁궐이나 황실에서 세운 절(원찰)의 일부 건물에서만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청기와는 모두 수키와이고, 사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건물지에서 1~2점씩만 소량으로 출토된 점으로 볼 때 건물 지붕에 상징적으로 올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 최고 온돌시실이 있는 서승당]
서승당(西僧堂)은 승려들이 참선하는 선방(禪房)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건물 내부에는 특이한 구조의 구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바닥보다 45cm 가량 높게 설치된 'ㅌ'자형의 침상식 두들이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구들은 건물의 남북 양쪽에 있는 4개소의 아궁이에서 불을 땔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구들에 온기를 골고루 보내기 위하여 상당히 복잡한 구조를 보인다.
[석조 불상과 소조 불상]
회암사지의 석조 불상은 모두 파손된 채로 출토되었는데, 높이는 약 20cm 가량으로 모두 앉아 있는 좌상이다.
이들은 모래로 이루어진 암석인 사암으로 제작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한 인상을 준다.
불상의 손 모양(수인)과 손에 지니고 있는 물건(지물), 불상이 앉아있는 자리(대좌)의 양식적인 특징을 볼 때 고려 말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여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조 불상의 크기가 작고 뒷면이 편평한데, 여러 개가 하나로 연결되어 불전의 벽면을 장식했을것으로 추정된다.
신중은 불교의 수호신으로서 제석, 범천, 사천왕, 금강역사, 팔부중과 중국의 도교에서 유래한 칠성, 우리나라 민속신인 산신과 조왕신 등이 이에 속한다.
['회암' 글자를 새긴 청동 사발] 회암
사지에서는 '회암'글자를 새긴 청동 사발이 모두 11점 발견되었다.
각각 크기는 약간씩 다르지만 모두 굽 안쪽 바닥면에 두 줄로 글자를 새겼다.
글의 내용을 통해 청동 사발이 법당에서 공양물을 담기 위해 사용됐던 그릇임을 알 수 있다.
사용처의 구분
檜岩十六聖殿 - 십육성전 : 16나한을 모시는 전각
檜岩五百聖殿 - 오백성전 : 500나한을 모시는 전각
용도와 개수 표시
茶器羕十六 - 차를 담는 그릇 16개
佛殿油果器羕一 - 과자를 담는 그릇 1개
飯器羕五十 - 밥 그릇 50개
實果器羕四十六-열매와 과일을 담은 그릇 46개
[회암사와 양주의 도자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양주도호부에 하품 자기소, 중품 도기소, 하품 도기소 등 도기와 자기를 만드는 곳이 세 곳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424년부터 1454년까지 자기소와 도기소가 운영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이후에도 일정기간 가마가 운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회암사지에서는 왕실이나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했던 경기도 광주의 관요에서 생산된 그릇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밖에 양주에서 직접 제작한 도자기도 다수 납품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의 불화]
1565년(명종 20)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후원하여 조성한 400점의 불화를 회암사에 모시게 되었다.
하단에 금색 글씨로 쓴 화가는 보우 스님이 지었는데 이 글에 따르면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의 건강과 장수를 빌고 세자가 탄생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제작한 것이다.
그림은 나라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했던 관청인 도화원에 소속된 전문 화가가 그렸다.
왕실에서 발원하여 높은 격조를 보여주는 이 불화는 금색 선으로 그린 금화와색을 입힌 채화로 나뉘는데, 석가. 미륵. 아미타. 약사여래를 각 100점씩 총 400점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