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기행

#경기 양주 #지봉 이수광 #지봉유설 #실학의 선구자 #경기도 기념물 제49호

포리시스 2023. 11. 25. 00:10

경기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에 있는 <이수광>의 묘역 탐방기이다. 조선중기 학자로 저서 <지봉유설>이 있으며, <실학의 선구자>로 많이들 알고 있을 것 같다.

 

이수광 묘역 입구 비각

 

묘역의 입구에 이수광 선생, 부친, 아들의 신도비를 한 곳에 모셔놓은 비각이 있다. 공적 만큼이나 3기 비의 규모가 크다 여긴다.

 

안내문과 문화재 표지석

 

경기도 기념물 제49호 문화재 표지석과 안내문이 세워져 있고, 비각의 좌측으로 구릉에 4기의 묘가 안장되어 있는 묘역이다.

 

이수광 선생 부친 이희검 신도비

 

흙이 마르지 않은 것을 보니 멧돼지가 금방이라도 다녀간 듯 싶다. 묘역의 여러 곳에 주둥이로 파헤쳐진 곳이 어수선하다. 혹여 달려들지는 않겠지?,....

 

#이수광 선생 신도비

 

이수광의 묘비는 수 많은 총탄의 자국으로 비문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아마도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해피밸리> 전투의 영향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의 아들 이성구 신도비

 

현장 안내문의 내용과 문화재청의 기록을 옮겨 보기로 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며 실학의 선구자가 된 지봉 이수광의 묘이다.

 

이수광 선생의 3대 묘역 - 제일 윗쪽이 이수광선생 묘

 

이수광은 1563년(명종 18년) 2월 조선 태종의 서장자 경녕군의 5대손으로 태어났으며, 3차에 걸쳐 북경에 사신으로 왕래하는 동안 서양학술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3대의 묘 - 윗쪽 이수광 선생 묘, 가운데 부친 이희검 묘, 아래 아들 이성구 묘

 

젊었을 때부터 시문에 능통하였으며 북경에서 얻어 온 책들을 탐독하여 그 개요를 적었는데, 이렇게 해서 60평생 동안 저술한 책이 <지봉유설>을 비롯하여 모두 78권에 이른다.

 

이수광 선생 묘와 묘비

 

특히, <지봉유설>은 서양의 종교를 소개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인생관을 새롭게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그가 소개한 마테오리치의 저서 <천주실의>와 <교우론> 등 천주교 서적들은 한국 천주교가 성립하는데 바탕이 되었다.

 

묘비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아마도 6.25 전쟁 당시 해피밸리 전투의 영향인 듯 싶다.

 

묘역에는 가장 상단부터 지봉 이수광, 아버지 이희검, 아들 이성구와 부인 윤씨의 묘가 각각 순서대로 위치하고 있으며, 비각 안에는 오른쪽부터 이희검. 이수광. 이성구의 신도비가 차례대로 세워져 있다.<안내문>

 

묘비와 상석 등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학자였던 지봉 이수광(1563~1628) 선생의 묘이다. 1614년(광해군 6)에는 <지봉유설>을 간행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 발전의 선구자가 되았다.

 

이수광 선생 묘역 - 양옆의 동자석

 

묘역은 부인 안동김씨와 합장된 단분(하나의 봉분)의 형태이다. 동자석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서 있는 모습으로 미소를 띠고 있다.

 

이수광 선생 묘에서 내려다 본 묘역 - 멧돼지가 많이 파헤쳐 놓았다.

 

머리는 쌍계형(두 개의 상투머리가 위로 솟은 형태)으로 묶고 어깨장식을 둘렀으며, 허리띠를 묶어 내린 17세기의 전형적인 동자석인이다.

 

#동자석 - 팔도 훼손된 듯 싶다.

 

망주석은 소형이지만 균형이 잘 잡혔고, 귀(몸돌에 조각된 손잡이 형태의 조형) 장식이 있어 시대성이 명확하다.

 

이수광 선생 부친 이희검 묘와 묘비

 

묘표(무덤 주인공의 이름 등을 새긴 비석)는 원수방부형(둥근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시석 형태)으로 정확한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지 않다.

 

#이희검 묘비

 

묘역 입구에는 3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석)를 세웠는데, 아버지 이희검과 아들 이성구의 신도비가 함께 있다.

 

이희검 묘역의 동자석인

 

이수광 신도비는 가운데에 있는 비로 묘표는 보편적인 원수방부형이지만, 대리석 재질이 돋보이는 단아한 비석이다.

 

아들 이성구 묘역

 

이 묘역은 조선 후기 묘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장대한 신도비와 앙증맞은 동자석인 등 예술성 높은 석물을 보유하고 있어 가치 높은 문화재이다. <문화재청>

 

이성구 묘역

 

[이수광]

본관 전주, 자는 윤경, 호는 지봉,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이며, 어머니는 문화유씨이다. 조선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변화하는 사회적 변동기에 새로운 사상적 전개 방향을 탐색하고 개척한 학자이자, 사회변화와 더불어 발생하게 된 실학파의 선구적 인물로, 사상사.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다.

 

이성구 묘비

 

1587년(선조 11) 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진사가 되었다. 1585년(선조 18)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9년 성균관 전적을 거쳐 이듬해 호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고,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부인 윤씨묘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방어사 조경의 종사관이 되어 종군하였으나, 아군의 패배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가 북도선유어사가 되어 함경도 지방의 선무 활동에 공을 세웠다.

 

부인 파평윤씨 묘비

 

1597년 성균관대사성이 되었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명나라 서울에서 중극전과 건극전 등 궁전이 불타게 되자 진위사로서 명나라를 다녀왔다.

 

부인 윤씨묘역의 동자석인과 신도비각

 

이때 명나라 서울에서 안남(베트남)의 사신을 만나 화답하면서 교유했다. 1601년 부제학이 되어 <고경주역>을 교정했고, 이듬 해 <주역언해>를 교정했으며, 1603년 <사기>를 교정하였다. <네이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