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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파주 #용주서원 #백인걸

by 포리시스 2023. 8. 10.

<용주서원>은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에 있는 조선 후기 백인걸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조금 오래 전의 답방기이지만, 지금도 서원의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음이라 생각하고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그리고 이 서원에 배향된 학자에 대해 알아보는 의미를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용주서원 전경

 

[용주서원]

1598년(선조 3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백인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용주서원 앞 홍살문

 

그 뒤 유생 정재심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철폐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용주서원 전경

 

1924년에 유생 50여 명이 뜻을 모아 서원을 복원하고, 김행. 조감. 신제현. 백유함을 추가 배향하였다.

 

용주서원 외삼문(외신문)

 

경내건물로는 6칸 사우, 내신문, 동서 협문, 3칸의 정륜당, 외신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백인걸을 주벽으로 김행. 백유함. 조감. 신제현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용주서원 현판

 

강당인 정륜당은 2칸의 마루와 1칸의 온돌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좌)와 내삼문(내신문)

 

이 서원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 4두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4,400평, 대지 700평, 임야 1정보 등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내신문 뒤로 사우

 

[백인걸 - 1497 ~ 1579]

본관은 수원, 자는 사위, 호는 휴암. 서울에 거주하였다. 사헌부지평 백효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 백사수이고, 아버지는 왕자사부 백익견이다. 어머니는 사직 우종은의 딸이다. 조광조의 문인으로 김안국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내신문과 사우

 

송인수. 유희춘. 이이. 성혼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우하였다. 김식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품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강당 - 정륜당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비분강개해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153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외삼문과 정륜당

 

1541년에는 홍문록에 올랐다. 1545년(인종 1) 지평을 거쳐 호조정랑이 되었으며,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였다.

 

양주목관아지에 있는 백인걸의 선정비

 

같은 해 명종 즉위 뒤 윤원형 등이 대비인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유관 등을 제거할 때, 사간원헌납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 최보한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났다.

 

정륜당

 

선조가 즉위한 뒤 1568년(선조 1) 기대승의 건의로 특별히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공조참의 . 대사헌을 역임하고 뒤에 병조참판이 되었다. 이 밖에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그리고 1568년에는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에 반대하는 소를 올려 오래지 않아 철렴하도록 하였다. 

 

정륜당

 

또한 사망할 때까지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여러 번 요청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덕흥군을 추존하는 작업을 추진할 때 일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와는 달리 임금의 처지를 두둔해 사림의 탄핵을 받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조정에 분당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준경의 의견을 쫓아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륜당과 외삼문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선조 때 기로소에 들었갔으며 청백리에 뽑혔다. 파주의 파산서원과 남평의 봉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용주서원 전경

 

저서로 《휴암집》이 전한다. 인조 때 충숙의 시호를 받았으나, 뒤에 문경으로 고쳐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