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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기행

일본 대마도 여행기(1)

by 포리시스 2013. 11. 2.

   일본 대마도 여행기(1)

 

   <대마도> 정벌,.... 내 카스에는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ㅎㅎ

예전 어르신들 말씀에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모르면 자신의 입지를 찾기 힘들다는 말이겠다. 연일 <독도>에 관한 말들이 많다. 언론을 통하여 보면 즐곳 일본넘들 역사를 왜곡하고 최근 몇 년간 우리의 영토인 <독도> 주변을 어슬렁거렸다는 이야기다.

 

[구 서울역 - 심야 출발]

 

   울 집 아그들 <독도>를 참 사랑하는 지킴이다. 그래서 작년에는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독도>에 다녀왔다. 접안을 하던 시각에 대한민국 대통령도 이곳에 도착해 의미를 더 하게 되었는데, 내심 여행객을 위한 반짝 이벤트가 있었으면 했지만 아쉬웠다. 그 후로 아이들과 대마도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 이 참에 <대마도>를 정벌하러 가자고 했다. 알아야 면장을 하니까,.... ㅎ

 

[부산 국제여객터미널에서의 일출]

 

   집에서 2박 3일,... 실제 여행기간은 1박 2일이다.

아주 짧은 시간 새벽잠을 몰아가며 빡센 여정길에 올라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던 것은 맑고 평온한 날씨가 가장 우위에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가족 모두 자기의 것을 다하고 서로 도우며 챙겨 주었기 때문일거라  생각하니 참 고마웠다.

 

[대마도 이즈하라항 입항중]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아침 8시에 출발했다. 대마도의 <이즈하라항>까지는 약 두시간,... 여객선의 속도는 시속 80km가 넘는다. 오전 10쯤 드디어 하대마도의 이즈하라항에 도착했다.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입국심사가 이어진다. 그래도 심한 편은 아니어서 담아 간 김치는 물론 우리 가족 가볍게 통과 했다.

 

[타고 온 여객선과 일본 출입국관리소]

 

   출입국관리소를 나오는 길의 부두에 약 6미터 가량 원형의 작은 석조물이 서 있다. 언듯 보아도 아주 오래되었을 것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이에 대한 궁금증 유발이다. 많은 사람들 누구 하나 관심을 갖지 않았음에도 난 굳이 무슨 용도의 석조물이었는지 물어 보았다.

 

[이즈하라항 부두의 석조물 - 등대]

 

   에도시대(1603~1867) 사용되었던 등대란다. 등대의 하부 뒷쪽에서 불을 피우면 위로 불꽃이 보이도록 3개 면이 개방되어 있는데 당시 중요한 통신수단이었을 거다. 상부 뒷쪽에 명치9년,... 글이 새겨져 있는데, 확인해 보지 않았다.

 

[일본 에도시대 등대, 조선 16대 인조~26대 고종 쯤 되겠다.]

 

   <대마도(對馬島)>,..

   우리나라에서 보면 말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고, 일본에서 부르는 쓰시마에 관한 설이 두서넛 등장하는데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섬은 상대마도와 하대마도로 나뉜다. 원래 하나의 섬이였지만, 일제가 러.일전쟁을 위해 아소만 부근에 상.하대마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만들어 섬이 나뉘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운하의 위로 붉은색 아치형 교량인 <만관교>가 시설되어 있다.

 

[항구에서 시내로 들어서며,..]

 

   일제는 10여년간에 걸쳐 계획적으로 이 운하를 건설하였는데, 대마도 인근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격파하는 승전의 장소가 되었고, 이는 다시 일제가 한반도에 진출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참 슬픔의 역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다리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이즈하라항의 다리]

 

   섬의 면적은 우리 제주도의 2/5 정도이고, 인구는 약 3만6천 여명, 섬의 80%가 산림이란다. 척박한 땅이라 버섯의 재배와 어업을 제외하면 식량난이 심각한 섬이다. 사실 이동중에 여러 마을의 평지에 개간되어 있는 논은 손으로 셀 정도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오래전부터 잦은 노략질이 시작되었고, 고려시대 부터 넘들에 대한 정벌이 시작되었을거다.

 

[항구 주변 풍경]

 

   상대마도의 끝에서 우리나라까지는 약 50km 정도 이고 배로 1시간 남짓 소요된다. 하대마도에서 일본 본토까지는 약 134km로 우리나라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 이즈하라는 항구를 가진 도시로 규모가 우리의 행정구역인 군 단위 정도로 여겨지고, 70~80년대 우리의 풍경을 보는 듯 전반적인 건물들의 모습이 세련되지는 않아 보인다.

 

[평온하고 안정감이 있어 보이는 항구 풍경]

 

   도시는 비교적으로 조용하고 깨끗하며 차분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무슨 연유인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지 않았고 주 도로를 제외하면 예쁜 블럭으로 깔아 놓은 도로에 즐빗하게 그어져야 할 차선이 없어 보도인지 차도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일방통행이 아닌가 싶었지만 우리의 골목길처럼 차량의 왕복 운행이 가능하다.

 

[시내를 관통하여 항구로 이어지는 강]

 

   주차장이 협소해서인지 우리의 <티코.타우너>와 같은 경차가 눈에 많이 띈다. 화려하게 꾸민 중.대형 차량을 상상한다면 아마 골목마다 통행불편으로 인한 경적 소리가 요란을 떨 만한 곳이 참 많을 거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아주 좁은 골목에 주차가 가능한 것도 이러한 환경에 적응해가는 이들만의 노하우겠다.

 

[소형차가 지배적인 도시?,..]

 

   대부분의 운전자는 신호등 없는 도로를 횡단 할 때마다는 보행자가 있으면 먼저 정차를 해 주었다. 길을 건너라는 손짓과 60~70대 어르신의 미소도 잊지 못하겠다. 사람이 우선임을 알게 해 주는 운전습관이 참 보기 좋았다. 물론 어디를 가더라도 최소의 퍼센트가 작용하지만,...

 

[수선사 입구]

 

   <수선사(修善寺)>,...

   좁은 골목길로 접어 들니 성곽 모양의 높다란 담장이 남달라 보인다. 그 가운데 쯤 일주문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맞배지붕의 솟을 대문이 있다. 이곳이 수선사다. 우리의 전통사찰에는 양쪽에 기둥이 하나인 일주문이 있지만, 이 곳의 문은 양쪽으로 3개의 기둥이 있고 대문을 달았다. 우리의 사찰 분위기라기 보다는 사당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사찰이니 일주문으로 보아야겠다.]

 

   경내에 들어서자 일자로 길게 이어진듯 일본식 전통 건축물이 있다. 아마도 미닫이의 굳게 닫혀진 곳이 법당인 듯 싶고, 좌측으로는 관리인이 거주하는 곳인가 보다. 불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므로 정숙을 요하므로 내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불상을 모셔둔 곳이라는데,.. 내부 확인을 하지 못했다.]

 

   건물의 우측으로 외부 공간에는 많은 비석이 즐빗하게 들어서 있다. 아마도 이들의 풍습인 가족묘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이 사찰이 공동묘지의 관리소가 아닌가 생각된 곳이기도 하다. 그 가장 앞쪽에 <최익현선생순국비>가 있다. 이곳 대마도에 와서 가장 느낌이 컸던 것이 선생의 이름과 덕혜옹주였을 거다. 

 

[사찰의 관리인이 거주하는 곳인가 보다]

 

   이 사찰은 백제 비구니 법묘스님이 창건하였다고 한다. 법당으로 보이는 건물의 처마 밑에 빛바랜 편액이 걸려 있다. 흰색 글씨의 <수선>은 구한말 관료를 지낸 김학진의 친필이라고 한다. 아직도 현판에는 낙관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김학진,... 1905년 을사조약 때에는 최익현 선생을 옹호하기도 했지만,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된 후 일제로 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

 

[최익현선생순국비]

 

   <면암 최익현>,...

   1833년 경기 포천 가범리에서 태어났다. 본관 경주, 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다. 14세때 성리학자인 이항노의 문인이 되고, 23세때 명경과 갑과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하였다. 1871년 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부당함을 상소하여 고종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이 되었다. 부정부패와 폐단을 고치려다 기득권층의 반발로 제주도로 유배. 1876년 일본이 운요호사건(1875)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도끼를 가져가 궁궐 앞에서 "일본과 절대로 강화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만일 맺으신다면 내 목 부터 먼저 치십시오."라며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구한말 관료를 지낸 김학진의 글씨 - 수선 현판]

 

   선생은 74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켰다.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 강토가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사생을 같이 하겠는가." 의병은 남원을 공격하기로 하였지만 군대가 일본군이 아닌 조선군임을 확인하고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하라고 하여 서울로 압송된 선생은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되었고 대마도 감금 3년을 선고 받았다.

 

[사찰의 우측으로 가족묘의 공간이다.]

 

   선생은 신발 밑에 우리 흙을 집어 넣어 일본 땅은 절대로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일본이 주는 음식을 절대로 먹지 않겠다고 다짐 한 후, 결국 1907년 1월 1일 숨을 거두었다.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만일 최익현과 같은 사람이 100명이 있었다면 조선은 충분히 독립하였을 것이다." 어느 일본인이 남긴 말이란다. 순국비 외에는 선생에 관한 뚜렷한 자취를 발견할 수 없었지만, 이곳을 찾는 많은 한국인들이 국내에서 같지 못했던 그의 정신을 충분히 되새김 하고 돌아가리라 여겨 진다.

 

[수선사의 전경을 담고 싶었지만, 지붕만 간신히 담았다.]

 

   이곳 수선사에서 느낀 것이 있다. 아마도 일본 전역을 여행하면서 보게 될 거라 여겨지지만,.... 불상의 가슴에 둘러진 붉은색의 가리개가 그것이다. 정확하게는 <턱받이>란다. 왜 불상에 천으로 된 가리개를 해 놓았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턱받이를 한 불상들,..]

 

   모성애의 일환으로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아기의 턱받이를 불상에 걸어 아이를 지켜달라고 기원했다는데서 유래되었는데 그 후 가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다양한 색상의 턱받이가 걸려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백제 비구스님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수선사]

 

   불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의 영혼, 가족의 건강을 돌 보아 달라는 의미로 걸어 두었던 가리개,.... 신사에 관한 이야기를 따로 올려보겠지만 보행을 하면서 마을 어귀에서 쉬이 볼 수 있었던 작은 공간 신들의 영역,....  아마도 우리의 성황당과 사당처럼 여겨지는 이곳에서 개인과 마을사람들 모두의 건강과 안녕을 비는 마음의 신앙 공간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