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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기행

일본 대마도 여행기(2)

by 포리시스 2013. 11. 26.

   일본 대마도 여행기(2)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언젠가 들어왔던 문구다. 지금껏 내 마음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이 짧은 문장이 내 인생의 역사를 크게 담금질 해 줄지는 모르지만, 삶에 새로움을 늘 추구해 줄거라는 마음 만큼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마음 한 편에서 든든하게 자리해 정화조 마냥 맑게 걸러 주었으면 좋겠다.

 

[이즈하라시 안내도]

 

   지나온 역사가 미래 일 수는 없다. 하지만 낡은 문화와 문명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면 추구하려는 미래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참 클거라는 생각이고, 그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지혜를 느낌으로써 곧 내 인생의 창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우체국 앞 사거리에서 교통 통제중인 경찰]

 

   학창시절에 문명과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기 참 어려운 때가 있었다. 선생님 왈 "물질=문명, 정신=문화" 이러니 금새 이해가 되었다. 에고~  어쩌다 삼천포로 빠졌다. 우리나라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섬이지만, 문화의 느낌이 참 각별하다는 생각에 적어 보았다. 사실 우리의 각 지방마다 문화도 천차만별이건만,...

 

[훈련중인지 자위대의 짚차도 보인다]

 

   동안 참 바빴다. 목디스크가 재발해 허송세월했던 한 달여 시간도 무척이나 아깝게 생각 된다. 1박 2일에 지나지 않았던 대마도 여행기,... 페이지를 늘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보고 들은 이야기 속에 느낌이 크고, 담아 온 사진이 참 많다. 한 번에 기록하려니 보는 사람도 그러하겠거니와 나 또한 지루한 듯 롤링되는 느낌이 싫어 나누었다.

 

[역사민속자료관 입구에서 본 시청사]

 

   가깝고도 먼 나라,...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이렇게 표현한다. 거리는 가깝고 침략의 역사로 얼룩진 두 나라 사이에서 느꼈왔던 우리들 마음의 표현일 거다. 50여 km,... 정말 가까운 곳이다. 그러하기에 더욱 더  이 섬에서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는지도 모르겠다.

 

[고려문, 멀리 통신사비 그리고 사이로 흰색 건물이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다]

 

   지난 날 이 작은 섬에 묵묵히 쌓여왔던 우리의 이야기들,...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 초라한 건축물과 비만 쓸쓸하게 남겨져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어 참으로 의미 있었다는 생각이다. 조선통신사비와 고려문, 덕혜옹주에 관한 이왕가결혼봉축기념비, 그리고 금석성과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을 둘러본 이야기이다.

 

[조선국통신사지비]

 

   <조선통신사비,...>

   이 비는 원래 이즈하라시의 우체국 앞에 있었던 것을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앞으로 옮겼다고 한다. 그 옆에 <고려문>이 서 있다. <조선통신사>,... 기록을 보니 1404(태종 4)에 교린관계가 성립하면서 처음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고 한다.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일본국왕사>라 하였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

 

   통신은 두 나라가 서로 신의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의미이다. 일본의 사절단이 얼마나 왔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회례사.회례관.통신관.경차관 등 다양하게 쓰이다가 1413년(태종 13)에 박분을 정사로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료관 내 통신사행렬도]

 

   하지만, 정사가 병이 나서 중지되었고, 1429년(세종 11) 교토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의 사절단이 최초의 통신사 였다고 한다. 통신사의 파견목적은 임진왜란 전에는 주로 왜구 금지요청이 주가 되었으나, 그 후에는 강화와 포로들의 쇄환, 일본국정의 탐색이었고, 1636년(인조 14) 이후는 막부장군의 습직 축하가 주임무였다고 한다.

 

[통신사행렬도]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년 간 조선통신사는 일본을 12회에 걸쳐 방문하였단다. 이 기간은 일본의 에도시대로 앞서 이즈하라항의 부두를 나오면서 보았던 석조물의 등대가 떠올랐다.

 

   통신사의 파견은 많은 인원과 긴 시간의 여정을 필요로 했다. 통신사행렬도에서 보는 것처럼 많은 일본인들이 행렬의 호위에 참여했고, 사용된 비용도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후에는 간소화 되었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통신사 일행이 지나는 곳마다 우리의 시.문이 널리 전해졌다고 하는데,...

 

[2층에 보관중인 소씨일기]

 

   이즈하라우체국의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뻗은 도로의 좌측에 '시청'의 건물이 있다. 그 맞은편으로 금석성의 성곽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는 높은 담장 안으로 넓은 주차장을 내다보며 아담한 건물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고, 그 앞쪽 성곽에 맞물려 세워진 맞배지붕의 간결한 건물이 <고려문>이다. 그 옆으로 조선통신사비가 서 있다.

 

[정말 단촐한 고려문]

 

   <대마역사민속자료관>,...

   2층의 구조이나 둘러볼 수 있는 곳은 좁은 1층의 공간 뿐이다. 이 곳의 2층에는 대마도주 소씨가의 기록물인 방대한 분량의 "소씨일기"가 보관되어 있다는데 일반인의 통제구역이란다. 아마도 우리의 조선왕조실록 내지 승정원일기 처럼 당시의 기록물로 보여지는데, 우리와 관련된 이야기가 참 많이 담겨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고려문 옆 성신지교린비 - 유명하신 분이 썼다고 하는데 생각나지 않는다]

 

   촬영 금지구역이라고 하였지만 조심스레 1층 관람실에 두어권 전시해 놓은 "소씨일기"를 담아 보았다. 우리의 대동여지도 처럼 대마도의 모습이 그려진 지도가 벽면에 걸려 있다. 그 옆으로 지금의 위성사진과 비교 할 수 있도록 해 놓았는데, 정말 기가막히게 잘 그렸다. 어느 시대에 그렸다라는 이야기는 생각이 잘 나질 않는다.

 

[통신사비에서 본 금석문]

 

   <고려문>은 조선통신사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대마도주가 거쳐하던 금석성의 성곽 한쪽에 세워졌던 문이란다. 언젠가 태풍으로 헐려진 것을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문은 굳게 닫혀 있고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의 목조 건물이 우리의 한옥에서 느낄 수 있는 우아한 곡선이 없어 뻗뻗해 보이기 그지 없다. 형식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이 단촐한 문을 보며 이곳에 올 많은 사람들에게 통신사란 어떻게 비추어질지,... 

 

[금석문 - 열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금석성,...>

   고려문의 사선을 따라 조선통신사비를 이어주는 언덕의 아래쪽에 금석성의 성문이 있다. 성곽의 전체를 거닐어 보지 않아 규모가 어떠한지는 알 수 없다.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듯한 성곽은 높이가 4~5가량 되겠고, 우리 성곽의 여장과 같은 보호시설이 없어 담장 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일본 성곽의 축성에는 당시 백제의 기술자들이 건너와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금석성의 성문]

 

   금석문은 양쪽으로 목조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2층의 문루를 만들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1층의 방향과 달리 2층의 지붕이 교차한다. 창문에 창살을 시설한듯 갑갑해 보이고, 지휘소의 역활을 했던 우리 성곽의 문루와 달리 경계를 주로 하였던 망루의 역활에 가깝게 느껴진다. 추녀마루가 짧아 간결하다는 보여지는 참 특이한 건축술이다.

 

[금석문 성내에서]

 

   <이왕가결혼봉축기념비>
   금석문을 들어서며 다듬어진 녹지를 지나니 쓸쓸할 정도로 한 켠에 비가 보인다. 암울했던 구한말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이 곳 대마도주의 후손 다케유키와 결혼하였다는 내용의 결혼축하기념비다. 덕혜옹주는 환갑을 맞은 고종 황제와 궁녀인 복녕당 양귀인 사이에서 태어 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에 공주가 못되고 옹주라고 호칭되었단다.

 

[봉축기념비]

 

   시대만큼이나 참 불행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후 몽유증, 정신분열증 등을 겪었고, 순종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하였지만 일제는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당시 덕혜옹주에 대한 국민들의 결집과 감정 폭발이 우려되었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1931년 쓰시마섬 도주의 후예인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을 하였고, 이듬해에 딸 정혜(마사에)를 낳았다.

 

[성을 나오면서,..]

 

   1946년 덕혜옹주의 병세가 낳아지지 않아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고, 1955년 다케유키와의 이혼, 뒤이어 딸 정혜의 자살 등 순탄하지 못한 옹주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를 바라보는 마음이 참 무거워졌다. 이 비는 한.일 공동으로 건립되었다 하고, 1962년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 내 수강재에서 지내다가 1989년에 사망하였다.

 

[기분이 착찹하다,... 에이!!! 이런 은행도 있네,... ]

 

   이 작은 섬에 우리의 역사가 참 많이도 얽혀 있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소씨일기>에는 얼마나 많은 일련의 일들이 숨어 있을까?.... 참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