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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축제와 행사

#제31회 행주문화제 #권율 #행주대첩비 #대첩비문 #조선의 도공 #사기장 #사발과 임진왜란

by 포리시스 2018. 9. 15.

   #제31회 행주문화제 #권율 #행주대첩비 #대첩비문 #조선의 도공 #사기장 #사발과 임진왜란



   2018. 9. 8(토) ~ 9. 9(일) 양 이틀간 고양시에서는 제31회 <행주문화제>를 개최하였다. 행주산성지역과 덕양구청 주변, 그리고 각 지역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이어졌다.




   행사장에서는 행주대첩비의 일부 내용을 목판에 새긴 후 그 것을 탁본하여 나눠주고 있었는데, 안내문의 탁본 내용과 더불어 사기와 임진왜란의 배경 등 내용을 옮겨 보았다.



   [행주대첩비 목판본 내용]

   적군 중에 평양에서 죽음을 면한 자, 황해도에서 탈출한 자, 개성에서 후퇴한 자, 함경도에서 소문을 듣고 온 자들이 모두 다시 서울에 집결되자 서울에 있는 적들의 세력은 다시 강성하게 되었다.



   공은 군대를 이끌고 서울의 아주 가까이에 이었으나 적들은 그 병력이 적은 것을 알고 그다지 문제 삼지 않았으며 필요하면 한 번에 무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같은 달 12일 새벽에 척후병이 적군이 들어오는 기색이 있다.’고 보고하였다.



   공은 전군에 동요하지 말도록 경계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성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적군이 벌써 벌판 가득히 몰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병 백 명이 접근하여 왔으나 조금 있다가 많은 군대가 뒤따라와서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우리 군사들은 결사적으로 응전하여 화살과 돌을 빗발처럼 쏟았다.



   왜적은 군대를 세 패로 나누어 교대로 쉬어가면서 묘시(아침)부터 유시(저녁)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싸웠으나 불리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사람마다 갈대를 묶어들고 바람 부는 방향에 맞추어 성에 불을 질렀다.



   목책에까지 불이 붙었으나 성 안에서는 물을 가지고 이를 껐다.


   서북쪽 자성(본서에 딸려 따로 쌓은 성)에서는 승군이 지키고 있었는데 약간 동요된 틈을 타서 적군은 아우성을 치며 들이닥쳤다.



   이 통에 온 군대가 흔들렸다.



   공이 칼을 뽑아들고 여러 장군을 호령하자 장수들이 적을 맞아 싸우니 적은 크게 패하여 네 군데서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서 태우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들이 그 나머지 적군을 밴 것도 130명에 달하였고 그들이 버린 깃발, 투구, 갑옷, 무기 등을 노획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행주대첩비문 중에서 1593년 음력 212일 행주대첩 당일의 내용을 발췌하여 목판에 새기고 이를 찍어냈다.>


 

   [행주대첩비]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1537~1599) 장군의 공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부하들이 세운 비다. 처음 세워진(구비:옛비)와 새로 세운 중건비, 2기가 전해진다.



   덕양산 정상의 구비는 받침돌이 땅에 묻히고, 균열과 마모가 심해 명문을 거의 알아 볼 수 없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선조 35(160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최립이 짓고 한호가 썻으며, 김상용이 원수권공행주대첩비(원수권공행주대첩비) 9자를 두전하였다.



   비음은 사위인 이항복이 짓고, 김현성이 썼다헌종 11(1845)에 세운 중건비의 비문은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뒷면에는 누락된 장군의 사적과 행주기공사중창기(행주기공사중창기)를 적은 추기가 있는데, 조인영이 짓고 이유원이 썼다.


  

   행주서원 내에 있던 중건비는 1970년대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 앞으로 옮겨졌다가 행주서원지가 복원된 이후, 20113월 행주서원 내 원래의 자리로 이전하였으며 받침돌 위에 비몸과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사발 그리고 임진왜란]

   점토반죽을 빚은 후 가마에 구워 만든 각종 그릇들 중에서 바닥에서 위를 향해 차츰 넓어지는 형태의 그릇을 일컫는다. 그릇의 맨 위 지름이 그릇의 높이에 비해 긴 모양을 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차() 문화를 꾸준히 발전시켜 오늘날 다도(다도)라는 일본 전통문화의 대표적인 자리로 끌어올렸다.



   일본의 다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전용 사발이며 흔히 다완(다완)이라고 한다.



   약 4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찾아낸 최고의 찻사발이 바로 조선의 장인들이 만들어낸 것들이었으며 고려다완(고려다완) 혹은 이도다완(이도다완)이라 불렸다.



  임진왜란을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의 사기장들이 만든 그릇들을 대거 약탈했고, 수많은 장인들을 일본으로 납치했는데 왜란 7년 동안 조선각지에서 끌려간 인원은 1,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에서 끌려간 조선의 장인들은 일본 도자기의 대변혁을 주도했으며, 조선 도공들의 심미안과 예술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찻사발은 일본 다도의 중심이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끌려간 조선의 대표적인 사기장]

    이삼평(이삼평)

   임진왜란 때 조선에 출병한 사가번(사가번)의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끌고 간 도공의 한 사람으로 충남 공주 출신이다.



   사가현 아리타에 살면서 가마를 설치, 아리타도기를 창시하고 이론의 도조로 추앙받고 있다.

 


   아리타도기는 이마리도기라는 별칭과 함께 일본 전역으로 퍼져 명성을 떨쳤으며, 이는 일본 도자기사상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도 일본 아리타시에는 150개의 도요가 있으며, 아리타 시민들은 그가 가마를 연지 300년이 되던 1916년 비를 세우고 거시적인 도조제를 열고 있다.



   심당길(심당길)

   전라북도 남원에서 가마를 열었던 조선의 도공으로 임진왜란 때 가고시마 지역의 다이묘 시마즈 요시히로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사스마도기를 만들어 심수관가를 개창하였고 함께 끌려갔던 박평의와 함께 도자기 원료인 백토(백토)를 발굴하여 사쓰마의 번명을 따라 사쓰마도기라고 명명한 그릇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나에시로가와 미야마에 있는 역대 심가 바물관에는 심당길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히비키리다완이 전시되어 있다.


 

   백파선(백파선)

   일본 도자기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여성 도공 백파선은 경남 김해 출신으로 역시 도공이던 남편 김태도와 함께 일본 아리타 지역으로 끌려간 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960명의 도공과 함께 직접 가마를 운영하여 명품 아리타 도자기를 탄생시켰다.



   조선 사회는 여성의 가마 출입을 금했지만 조선 최초의 여성 사기장이라 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후에 손자가 백파선을 기리는 탑을 세우고 거기에 기록한 바에 의하면 96세까지 살면서 조선 도공들을 이끌며 백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행사를 주관하신 분들과 우리의 맥을 이어가시는 분들 좋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시느라 정말 수고가 많으셨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