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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혜음원지 #혜음원 #행궁 #고려 국립숙박시설

by 포리시스 2022. 8. 15.

아!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고

무섭던 길이 평탄한 대로가 되었다.

미곡(米穀)을 갖추어 놓고 그 이익을 얻어서

죽을 쑤어서 여행자에게 공급하였다.

<혜음사신창기>

 

혜음원지 전경 - 가장 앞쪽이 행궁터, 우측 아래로 절터 그리고 멀리 아래쪽이 혜음원지이다.

 

<혜음원지>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241에 있는 건물의 터로 사적 제 464호이다. 건물 하나 없는 넓은 공간에서 층층을 오르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수 십 명의 청소년들 모습이 참 보기 좋다.

 

혜음원지 행궁, 절터, 원터 위치도

 

안내문의 내용이다. <혜음원>은 남경과 개성 간을 통행하는 관료 및 백성을 위하여 고려 예종 17년(1122)에 건립된 국립숙박시설이다.

 

혜음원지 방문자센터와 둘레길 이정표

 

고려 중기에 남경이 개발되면서 개경과 남경을 오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으나 안전한 통행과 숙박을 위한 시설은 부족하였다.

 

연못지

 

특히 혜음령 일대는 인적이 드물고 도적떼가 많아 통행할 때 가장 위험한 구간이었으므로 이곳에 여행객의 안전을 보장하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국왕의 명으로 여행자를 위한 무료 숙박시설인 '혜음원'을 세웠다.

 

아직은 정비가 덜 된 혜음원지,... 탐방중인 청소년들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다

 

그 동안 혜음원은 기록에만 전하여 올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었는데, 1999년 '혜음원'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지금의 혜음원터에서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원터 공간

 

혜음원의 전체 면적은 약 23,930㎡이다. 전체 경역은 원지, 행궁지, 사지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둘레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을 설치하여 외부와 구분하였다.

 

원터 공간

 

출토된 건물터는 중심이 되는 건물터 몇 곳을 제외 하고는 현재까지 그 성격이나 용도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연못지, 배수로 등의 유구와 금동여래상, 기와류, 자기류, 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따가운 햇살에도 불구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복구에 정말 수고들 많으셨겠다.

 

"혜음원"은 혜음사라는 사찰,

숙박시설의 역할을 했던 원,

고려왕의 남경 행차시 머물렀던 행궁으로

이루어진 복합공간이었다.

 

절터 공간

 

<행궁>

행궁은 혜음원지 북동쪽 일대에 있었다. 《혜음사신창기》에 따르면 행궁은 혜음원이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없었는데, 혜음원을 지은 직후 행궁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혜음원 동쪽에 새로 지었다.

 

발굴중에 모아놓은 기왓장

 

행궁 건물 중에서 국왕의 거처가 되는 '정전'이 가장 뒤에 있었으며 아래쪽 맨 끝에는 대형 누각 건물이 있었는데, 연회나 모임을 위해 지은 것으로 파악된다.

 

바닥이 잘 정비된 것으로 보아 중요한 건물이 있었을 것 같다.

 

계단식 화단인 화계가 있으며 담장이 외부를 감싸고 있다.

 

배수 시설 같지만 건물이 없어 유추하기가 쉽지 않다.

 

<절터>

절은 원을 관리하는 승려들이 예불을 드리고 생활하였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또한 원에 머무는 일반인들에게 음식도 제공하였다.

 

난방시설

 

고려 시대의 원은 대체로 절에 소속되어 운영하였으므로 절에 비하여 규모가 작은 것이 일반적이다.

 

난방시설

 

하지만 혜음원은 본래 목적이 원을 운영하는 것이었고 절은 원을 운영하는 승려들의 편의를 위한 부속 공간이었기에 원보다 규모가 작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터

 

절과 원은 크게 보면 하나의 건물군으로 앞쪽에 원터가 뒤쪽에 절터가 있다. 이 일대 건물의 기단과 마당에는 장식성을 강조한 기단 석재, 청석, 방전(정사각형 벽돌) 등이 사용되었다.

 

난방시설이 발견된 곳

 

<원터>

고려시대의 원은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여행자들에게 휴식과 숙박의 장소를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하던 시설이었다.

 

행궁터

 

원터는 절터의 앞 쪽 5단에서 9단에 이르는 공간으로, 건물군의 중심선을 따라서 마당과 문터가 이어져 있다.

 

식수를 담아두었던 곳 같다.

 

원에 속한 건물은 가로 두 칸, 세로 한 칸이 하나의 방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가로 두 칸, 세로 한 칸을 한 단위로 하여 난방 시설이 한기씩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배수시설

 

난방 시설은 바닥 부분만 남아 있어 구체적인 형태는 알 수 없으나 온돌이 아닌 시각형 형태의 벽난로와 유사한 시설을 방 뒤쪽 벽면에 붙이고, 외부에 나무를 때서 난방하던 시설이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다듬지 않은 자연스러움의 미가 느껴진다.

 

다른 유적에서 비슷한 사례가 아직 발견 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에 온돌이 보편화되기 이전 상류층이 사용하던 난방 장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주추돌의 기둥이였을까??

 

한 시간여 혜음원지를 둘러보고 유물 관람을 위해 앞에 위치한 혜음원지 방문자센터에 들렀다.

 

주춧돌이였을것 같다

 

아직 준비중이라 전시 유물은 없고, 9월에 개관한다고 한다. 그 때쯤이면 발굴 유물 등을 관람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