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나 만의 택리지를 꿈꾸며,...
서울 기행

#서울 종로 #경교장 #김구 #안두희 #최창학

by 포리시스 2023. 6. 6.

6월은 호국보훈의 달,.....  많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지금 우리의 대한민국을 지켜 왔다. 오늘 하루 만큼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음에 감사하며 그 희생의 마음을 되새김해 볼 수 있는 하루였으면 좋겠다.

 

오늘은 <경교장>의 이야기를 적어본다. 방문하던 날 비가 촉촉히 내려 경교장의 외부 풍경을 담지 못했다. 오히려 내부에 전시되었던 1/50 축적 건물과 층별 내부 구조의 모형을 보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래 글은 안내문과 전시실의 글을 옮겨온 것이다.

 

경교장 모형

 

[대한민국의 혼이 살아숨쉬는 곳]

사적 제465호 <경교장>은 해방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적 현장입니다.

 

경교장 1층 모형도

 

서울시는 경교장을 복원하고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조성하여, 서울 시민에게 우리 근.현대사를 알리는 소중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경교장 2층 모형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의 분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경교장에서, 지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유물과 영상, 정보검색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경교장 지하 모형 - 전시공간

 

[최창학의 저택으로 사용]

1938. 금광업자 최창학의 저택으로 건립(명칭:죽첨장)

 

1층 홀에 있는 김구 선생님 흉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및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숙소로 사용]

1945. 11. 23.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과 수행원 1진 귀국, 경교장으로 개칭 후 입주

1945. 12. 01. 홍진 의정원 의장 등 임시정부 요인 2진 귀국

 

1층 선전부 활동공간

 

1945. 12. 03. 대한민국 임시정부 첫 국무위원회를 경교장에서 개최

1945~1948 신탁통치 반대 운동 및 남북협상 추진 무대

1949. 06. 26. 김구 서거

 

선전부 활동공간

 

[대사관(관저) 및 병원으로 사용되면서 변형]

1949. 11. ~ 1950. 05. 중화민국 대사관 사택으로 사용

1950. 06. ~ 1950. 08. 한국전쟁 중 미군특수부대 및 임시 의료진 주둔

 

선전부 활동공간

 

1956. 10. ~ 1967. 10. 월남 대사관으로 사용

1967. 09. 경교장 후면 고려병원으로 신축

 

1층 귀빈식당

 

1968. 11. 고려병원 개원

1995. 06. 고려병원 강북삼성병원으로 명칭 변경

 

식당 벽면의 액자

 

2001. 04. 06.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9호 지정

2005. 06. 13. 국가사적 제465호로 승격, 2층 김구 집무실 부분 복원

 

출구를 바라보며 귀빈식당

 

2010. 06. 30. 강북삼성병원, 경교장 복원을 위해 병원시설 이전

2010. 07. ~ 2013. 02. 건물 복원 및 내부 전시공사 

 

1층 응접실

 

[경교장의 역사] - <제1전시실>

경교장은 1938년 일제강점기 광산업으로 큰 부를 축적한 최창학에 의해 건립되었습니다.

 

1층 응접실

 

원래 일본식 이름인 '죽첨장'으로 불리었으나, 김구 선생은 근처에 있는 '경교 : 경구교의 약칭'라는 이름을 따서 한국식으로 개명하였습니다.

 

1층 응접실

 

194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경교장은 임시정부의 활동 공간이면서, 또 김구 선생과 임정요인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2층 김구 선생 집무실

 

1949년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서거한 후에는 중화민국대사관 사택, 월남대사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1967년부터 병원시설로 이용되었습니다.

 

김구 선생 집무실과 침실

 

이 시기에 경교장은 병원으로 내.외부가 개조되어 원형이 변형되었습니다.

 

2층 복도에서 본 김구선생 침실과 집무실

 

1960년대부터 경교장을 보존하고 복원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1990년대가 되서야 본격적으로 문화재 지정을 위한 검토가 시작되었습니다.

 

건축 원형 전시실 - 경교장의 기본 구조물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마침내 2001년 서울시 유혀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05년 국가 사적으로 승격된 후, 2010년 실제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원형 전시실 안내문

 

당시 사진자료를 바탕으로 가구 배치 등 세밀한 부분까지 고려되어 재현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경교장에 울린 총성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 - <제2전시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자주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조가, 조문행렬

 

이러한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해방을 맞아 환국 할 때까지 민족의 대표 긱로서 독립운동을 총괄 지휘하였습니다.

 

김구 서거 당시 경교장 내.외부 모습

 

1945년 11월 23일과 12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에서 귀국하여 경교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경교장 앞 조문행렬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남과 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추모사

 

1948년 8월 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습니다.

 

2층 임정요인 숙소

 

제헌헌법 전문에는 "1919년 수립된 임시정부를 계승하였다."는 사실이 명시되었고, 국호(대한민국). 연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 애국가도 그대로 계승되었습니다.

 

임정요인 숙소

 

너무나 당연시 되고 있지만, 고난의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지켜낸 대한민국의 뿌리를 이 공간을 통해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임정요인 숙소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 <제3전시실>

1945년 11월, 조국에 돌아온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자주 통일의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무위원회를 개최하고, 신탁통지 반대 운동을 추진하였다.

 

오토마타 체험실

 

이 모든 활동은 경교장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하여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던 중,

 

비서 선우진의 방이였다

 

1949년 6월 26일 경교장 2층 응접실에서 대한민국 육군 소위이자 주한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 것입니다.

 

2층 응접실.서재

 

김구 선생의 통일에 대한 원대한 꿈은 비록 비극으로 끝나버렸지만, 그 열망과 간절함은 여전히 살아남아, 이 곳 전시실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2층 응접실.서재

 

[추모사]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다시 울고, 눈물밖에 아무 할 말도 없습니다.

 

응접실.서재 책상 위의 김구 선생 사진

 

하늘이 선생님을 이 땅에 보내실 적에 이 민족을 구원하라 하심이니, 74년의 일생을 통하여 다만 고난과 핍박밖에 없습니다.

 

응접실.서재

 

청춘도 명예도 영화. 안락도 다 버리고 만리 해외로 떠다니시며, 오직 일편단심 조국 광복만을 위하여 살으셨습니다.

 

지하 전시실

 

선생님의 일생 행적을 헤아려 보면 오늘의 민족 해방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오, 역대의 충의의 피를 흘린 모든 의인.열사와 함께 거기 선생님의 지대한 공로가 들어 있음을 부인할 자 아무도 없습니다.

 

사용되었던 태극기

 

검은 머리로 고국을 떠나셨다가 머리에 백발을 이고 옛 땅을 찾아오시던 그 날, 기쁨이 얼굴에 가득 차고 춤을 추시는 듯 좋아하시던 그 모양을 우리는 잊어버리지 못합니다.

 

국가의 형태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리요, 조국의 강토는 남북으로 분단 되고 사상의 조류는 좌우로 분열된 채 동족상잔이 나날이 치열하고,

 

신탁통치 지지.반대 전단

 

전도의 광명이 각각으로 희박해 가되 그럴수록 선생님은 국토 통일과 완전 자주 이것만을 위하여 혀가 닳토록 절규하였고, 나물국 한 그릇에 쓴 김치 한 공기로 국민 최저생활을 몸소 맛보시며 지냈습니다.

 

속옷 밀서

 

선생님의 고난일생 지식일년이 이러했거늘, 마지막에 원수 아닌 동족의 손에 피를 붐고 가시다니요, 그래 이것이 선생님에게 바친 최후의 보답입니까.

 

민족의 통일을 위해,...

 

동포 형제여! 가슴을 치며 통곡하십시오. 선생님에게 드릴 선물이 이것밖에 없습데까.

선생님! 선생님!

 

민족의 통일을 위해,...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말씀을 저녁마다 듣자 왔는데, 오늘 저녁부터는 뉘게 가서 이 말씀을 듣자 오리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 서명

 

선생님! 선생님! 민족을 걱정하시던 선생님의 얼굴을 아침마다 뵈웠는데, 내일 아침부터는 어데 가서 그 얼굴을 뵈오리까. 선생님은 가신대도 우리는 선생님을 붙들고 보내고 싶지 아니합니다.

 

김구 서거 당시 책상 위에 있언 유묵 '신기독' - 혼로 있을 때도 삼가한다.

 

남은 우리들은 목자 잃은 양떼와 같습니다. 이런 민족을 버리시고 차마 가실 수가 있습디까. 천지가 캄캄하고 강산이 적막합니다.

 

임시정부영수 전국 환영회 명부

 

분하고 원통한 생각이 우리 가슴을 채우고도 넘쳐흘러 파도 같이 출렁거립니다. 여기 천언만어가 모두가 부질없습니다.

 

보도기사, 투쟁사

 

선생님은 가셨는데 무슨 말씀하오리까. 우리들은 다만 통곡할 뿐입니다. 울고, 울고, 다시 울고, 울음밖에 아무 말도 없습니다. 여기 잠깐 우리들은 '월인천강'이란 말을 생각합니다.

 

자료사진

 

다시금 헤아려 보면 선생님은 결코 가시지 않았습니다. 삼천만 동포의 가슴마다에 계십니다.

 

자료 사진

 

몸은 무상하여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의 낙원으로 가셨을 것이로되, 그 뜻과 정신은 이 민족과 역사 위에 길이길이 계실 것입니다.

 

백범 김구와 임정요인들

 

그리하여 시대마다에 새싹이 돋고 새 움이 틀 것입니다. 민족을 위하여 고난과중의 일생을 보내신 선생님이 결코 헛되이 그냥 가실 리 있습니까.

 

김구 선생이 서거 당시 입었던 의복

 

선생님의 거룩한 희생으로 민족의 대통일.대화평.자유.민주에 의한 새 역사의 첫 페이지는 열릴 것입니다.

 

백범 김구 서거 및 국민장 사진

 

선생님! 우리들은 선생님의 끼치신 뜻을 받들어 선생님의 발자욱을 따라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을 위하여 삶으로써,

 

도왜실기, 김구 시계

 

선생님의 신도 되었던 아름답고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를 선생님의 위대하신 영전에 삼가 맹서합니다.

 

최창학 저서

 

1949년 7월 5일

한국독립당원 일동 대표 엄항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