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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서울 강서구 #서울 양천고성지 #사적 제372호 #소악루 #토석혼축성 #궁산

by 포리시스 2023. 5. 18.

<서울 양천고성지>

사적 제372호이다. 양천고성지는 조선시대 양천현의 주산인 궁산에 있는 테뫼식 산성터이다. 궁산은 한강변에 있는 해발 74m의 나지막한 봉우리이다.

 

서울 양천고성지 안내문

 

궁산의 남쪽에 안양천이 흘러 한강과 만나고, 한강 건너편 북쪽에는 행주산성이 있다. 양천 고성은 궁산의 정상부에 있는 둘레 200m 정도의 평지를 둘러 만든 것으로 보인다.

 

궁산 정산으로 향하는 곳에 소악루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성벽의 길이는 218m이다. 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은 토석혼축성으로 추정된다.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소악루

 

몇 차례의 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의 토기조각과 기와 조각이 많이 나왔고 강 건너에 있는 행주산성이 통일신라 때에 지어진 것으로 볼 때 양천 고성도 통일신라 때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소악루 - 우측 절벽 아래로 한강이다.

 

이 성은 행주산성, 파주의 오두산성 등과 함께 한강 어귀를 지키던 중요한 성이었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두기 전에 이 성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현장 안내문>

 

소악루 현판

 

<서울 양천고성지>

서울시 강서구 가양동 궁산의 정상부에서 동~서쪽으로 뻗은 주능선과 남~북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의 상단부를 에워싸서 축조한 테뫼식 산성이다.

 

한강변과 멀리 북한산, 안산, 목멱산 등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궁산은 안양천과 한강이 합류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한강하류로 이어지는 요새지에 해당한다.

 

한강과 멀리 북한산

 

성 북쪽은 한강 쪽으로 경사가 급하고 남쪽은 급하지 않은 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꼭대기 부분을 둘러쌓은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길이가 약 220m이며 면적은 29.370m2라 한다.

 

안현석봉(안현의 저녁 봉화불) - 해질녘 양천현아가 있는 궁산에서 강 건너편 안현의 봉화불을 바라본 정경을 그린 것이다. 안현은 길마재, 안산, 모악산이라고도 불리는 산으로,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뒷산이다. 원경에 정상부에 붉은 점으로 봉화를 표현한 안현이 와우산, 정토산과 이어져 펼쳐지고 있고, 근경의 좌우에는 궁산 자락의 울창한 수목사이에 자리잡은 소악루와 탑산, 공암이 있다. 왼편에 합벽된 이병연의 시는 다음과 같다. 계절의 맛이 무르익은 때, 발을 걷어 올리니 산 빛이 저물었구나. 웃음을 지으며 한 점 별같은 불꽃을 보고, 양천 밥을 배불리 먹는다.

 

성에 관한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옛 문헌에 남아 있다. 성벽의 흔적으로 벽을 쌓을 때 안쪽에 심을 박아 쌓은 돌인 적심석과 성돌을 볼 수 있다.

 

소악후월(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다) - 소악루는 이유(1675~1753)가 1737년경 창건한 누각으로, 현재 가양동 궁산 동쪽 기슭에 있었다. 왼쪽 하단에 소악루가 있고, 그 너머로 이유의 본채로 보이는 기와지붕들이 있다. 화면 우측변에는 탑산, 두미암, 선유봉을 차례로 배치시켰고, 원경에는 목멱산을 위시한 금성산, 와우산이 보름달을 맞이하고 있으며 그 아래 육중한 바위절벽인 잠두봉(절두산)이 있다. 이 그림을 본 이병연은 다음과 같은 제화시를 적었다. - 파릉에 밝은 달 뜨면, 이 난간 머리 먼저 비친다. 두보 시에 제구 없는 것, 끝내 소악루 뿐이라 해야 하겠지.

 

임진왜란 때 권율장군이 이 성에 머물다가 한강을 건너가 행주산성에서 크게 이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소악루

 

행주산성(사적), 파주 오두산성(사적)과 더불어 옛날부터 한강 강어귀를 지키던 중요한 시설이었던 곳으로 의의가 크다.<문화재청>

 

목멱조돈 이야기

 

<소악루>

소악루는 조선 영조(1724~1776, 재위) 때 동복 현감을 지낸 이유가 양천 현아 뒷산 기슭 강변 악양루터에 재건한 것이었다.

 

성황사 - 이 사당은 성황사 신의 위패를 모신 묘당이다. 성황사의 신은 여신으로 우리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도당할머니로 모시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 중종25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기를 성황사 재성산이라 하였다. 지금부터 실로 400여년 전의 기록이다. 성황사 신께서는 산아래에 거주하는 민초들의 번영과 행복을 이루도록 도와주시고 여러 악귀를 몰아내시고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주시니 산아래 사는 민초들은 이에 보답하고자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날 제물을 차려 산신제를 올리고 굿을 한다.

 

당시 이 누각에 오르면 안산, 인왕산, 남산, 관악산 등이 한눈에 보이고 탑산, 선유봉 및 드넓은 한강줄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등 진경이 펼쳐져 조관빈, 윤봉구, 이병연 등 당대 명사들이 이곳을 찾았다 하며,

 

궁산의 정상가는 길

 

진경산수화의 대가인 겸제 정선이 이곳 현령으로 있을적에 그린 산수화 <경교명승첩>에서 당시의 경관을 볼 수 있다.

 

성황사 안내문과 황진의 시

 

소악루의 원위치는 <여지도서>, <양천군읍지>와 정선이 그린 소악루, 소악후월 등의 그림으로 짐작해 볼때 강서구 가양동 산 6-4(일명 세숫대바위) 근처로 추정되나 주변의 변화가 극심하여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위치에 1994년 신축하였다.

 

궁산의 정상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화강석 8각 주초에 민흘림의 원주를 세우고 5량집 겹처마구조로 단층 팔작기와지붕으로 하고 주위에 난간을 둘러 한강경관을 조망토록 배치했다. 

 

궁산 정상의 발굴 안내문

 

<황진 시>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도 다 없어졌는데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사람을 본 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하더라.

 

궁산의 정상

 

<서울 양천고성지 문화재 발굴(4차) 유적지 안내문>

4차 조사는 2015년 5월 ~ 2015년 8월까지 이루어졌으며, 궁산 정상부의 성 내부시설 확인을 위한 시굴조사와 북서쪽 회절부 구간의 성벽 확인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궁산의 정상

 

시굴조사 결과 횡렬 A구간에서 성벽 뒤채움과 성 내부 시설로 추정되는 적심 1기, 주혈로 추정되는 원형수혈 3기, 횡렬 B구간에서는 성내부시설로 추정되는 적심2기, 주혈로 추정되는 원형수혈 8기가 확인되었다.

 

한강 건너 멀리 노을, 하늘공원

 

성벽 확인 구간 조사결과 성벽은 최고 5단까지 확인되었으며, 기 조사구간의 면석과 비교한 결과 1단까지는 초축 성벽의 면석과 유사하였다.

 

한강 풍경

 

발굴조사 결과 성벽은 조사지역의 중심에 설치한 토층을 기준으로 우측 약 12m, 좌측 약 1m정도 확인되었으며, 최저 3단부터 최고 7단까지 확인되었다.

 

1단까지는 초축 성벽의 면석과 유사하였으며, 2단부터는 수.개축성벽의 면석과 유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