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나 만의 택리지를 꿈꾸며,...
서울 기행

#서울 종로구 #성균관(成均館) #태학(太學) #학궁(學宮) #반궁(泮宮)

by 포리시스 2022. 12. 21.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국립의 <향교>와 사립의 <서원>이 있다. 두 교육기관이 각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면 성균관은 서울에 있다는 차이가 있겠다.

 

성균관 명륜당

 

서울에도 향교가 있다. 김포군에 있던 <향천향교>가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편입되어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지방교육기관이기도 하다.

 

동재 - 동.서재는 학생들의 기숙사로서 약방과 학생의 대표인 장의방이 따로 있었다. 성균관대학교가 생긴 이후에도 유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기숙하며 전통의 맥을 잇고 있었으나 2004년부터 문화재보호의 미명하에 강제퇴거 되었다.

 

성균관을 방문하기에 앞서 전각의 배치가 가장 궁금했다. 앞서 말한 두 교육기관의 최상위에 있는 기관으로 단연 전학후묘의 구조를 띄고 있을거라는 추측을 했다.

 

동재의 뒤편 - 동.서재의 방실 출입구가 반대편에 있는데,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문묘의 공간이 앞쪽에 위치하고, 많은 유생들을 교육하였을 명륜당과 숙소의 건물인 동.서재가 그 뒤에 배치되어 있다.

 

서재

 

비록 건물 내부를 볼 수는 없었지만, 많은 유생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식당의 건물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성균관의 역사와 유교의례에 대한 안내문의 내용을 옮겨 본다. 

 

명륜당 - 태조 7년(1398)에 대성전과 함께 건립되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선조 39년(1606)에 중건하였다. 대성전 뒤에 있는 강당으로 총 18칸으로 중앙에 강당을 두고 좌우에 협실이 있다. 성균관의 교육기능을 수행하던 강학 장소로서 생원과 진사 들이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학문을 닦고 인격을 연마하여 지도자 덕목을 익히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유생들의 시독과 과장으로 활용되었다. 내부에 있는 명륜당 현판은 주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며, 정면 외벽에 있는 현판은 명나라 사신 주지번의 글씨이다. 명륜당 앞에 있는 2그루 은행나무는 공부자가 제자들을 가르쳤던 행단을 상징하여 중종 14년(1519) 대사정 윤탁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성균관(成均館)의 역사(歷史)>

성균관은 고려말과 조선시개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의 명칭으로,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정록청 - 태조 7년(1398) 명륜당 동쪽에 남향 8칸으로 지어졌다.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과 학록을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성균관 관원들의 사무실이다.

 

성균(成均)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정록청 뒤편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나타난 공식적인 교육기관은 372년에 세워진 고구려의 <태학>이다.

 

향관청 - 제관들이 재계하고 향과 축문을 보관하던 곳으로 성현의 건의로 성종 4년(1473) 명륜당 북동쪽에 남향 10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곳에서 경전읽기를 비롯하여 활쏘기 등의 교육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볼 때 전통적인 유교 교육이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진사식당 - 진사식당은 성균관 유생들의 전용 식당이다. 총 33칸 규모의 건물로서 칸을 막지 않고 길게 터서 수 백 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만든 독특한 구조이다. 성균관에서는 북을 쳐서 유생들에게 시간을 알렸는데,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의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으며, 세 번 치면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였다. 아침, 저녁 두 끼 식사를 할 때 마다 원점을 하나 씩 찍어주었는데 이는 유생들의 출석을 점검하는 역할을 하였다.

 

백제에서도 오경박사를 두어 학생들에게 유교 경전을 가르쳤으며, 신라에서도 역시 682년에 국학을 세워 <논어>와 <효경>을 필수과녹으로 하는 유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육일각 - 영조 19년(1743) 향관청 서쪽에 건립했으나 지금 명륜당 동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대사례에 사용하는 활과 화살 등을 보관하였다. 선비들의 기본 소양인 예. 악. 사. 어. 서. 수인 육예 중 활쏘는 선비들의 기본 소양으로 익혔다.

 

특히 이 무렵 백제의 유학자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교를 전파하였다. 고려시대에는 992년에 국립대학인 국자감을 설립하여 유교 경전을 단계벌로 교육하였다.

 

#존경각 - 우리나라 대학 도서관의 효시로 성종 6년(1475) 한명회의 건의로 명륜당 북쪽에 건립하여 사서오경과 제자백가 등을 보관했다.

 

국자감에서는 경전교육과 더불어 고려 초기부터 '공자묘'가 세워져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를 추모하고 그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여러 가지 의식이 행해졌다.

 

존경각

 

고려 때까지 개성에 있던 성균관은 조선이 건국된 후 태조가 수도를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139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워졌다.

 

명륜당 뒤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대학으로 유교뿐만 아니라 국가의 장래를 이끌어 갈 인재의 양성, 풍속의 교화 등으로 유교이념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에 굳건한 토대가 되었던 성균관과 향교는 일본의 침략으로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명륜당 현판과 편액들

 

1910년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합병한 일본은 국가이념을 부정하고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하여 합병 직후 성균관을 폐지하고 교육기관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였다.

 

명륜당 앞 두 그루 은행나무

 

성균관을 폐지한 일본은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으로 설치하고 성균관을 사설전문학원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에 따라 유교 역시 크게 침체되었다.

 

전사청 - 석전 때 희생을 준비하던 곳이다. 성종 3년(1472) 대사성 이극기의 요청에 의해 대성전 서쪽에 동향, 6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광복과 더불어 성균관을 재건하고 유교를 부흥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전국 유림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어 1946년 9월 25일 성균관장으로 선출된 김창숙 선생의 주도 하에 전국유림의 뜻을 모아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의 맥을 잇게 하였다.

 

대학당 - 문묘를 관리하던 담당자가 거처하던 곳으로 대성전 서쪽 담장 밖에 남향 4칸으로 건조되었다. 수복청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성균관은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제기고 - 석전과 분향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던 장소로 태조 7년(1398) 대성전과 동시에 건립되었다. 대성전 서쪽에 북향 6칸 규모로 건립되었다.

 

춘추 석전과 삭망 분향 등 유교의례를 봉행하고, 청소년인성 및 예절교육, 유교문화창달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대성전 -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성전은 대성지성문선왕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전각을 말한다. 공자를&nbsp; 주벽으로 모시고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 등 4성인을 좌우에 배향하고, 공자의 제자 10철. 송조 6현의 위패 그리고 우리나라 신라의 설총. 최치원을 비롯하여 모두 18현을 종향하였다. 대성전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다.

 

<유교 의례>

1. 석전(釋奠)

만세종사이신 공자께서 남기신 인의도덕의 이상을 근본삼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효제충신의 실천과 수제치평의 도리를 천명함에 있어 배사모성의 예로서 생폐예제를 헌설하고 엄숙하고 경건하게 전례를 봉행하는 것을 석전이라고 한다.

 

#보물 제141호 성균관 대성전

 

매년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한다. 우리나라의 석전은 중국이나 일본에도 남아 있지 않는 고래의 악기와 제기를 사용하여 문묘제례악을 연주하고 팔일무를 추고 있다.

 

서무 - 동.서무는 태조7년(1398) 대성전과 동시에 창건하여 공문 제자 69분의 위패를 포함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 112분의 위패를 동.서로 봉안하였다가 해방 후 전국 유림대회의 결정으로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는 대성전에 모시고 그 밖의 94현의 위패는 매안(위패를 땅에 묻음)하여 지금은 비어 있다.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커서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무와 묘정비각

 

2. 분향(焚香)

음력 초하루와보름마다 공자를 비롯한 선성선현에게 향을 피우는 의례를 분향이라고 한다.

 

묘정비각 - 문묘의 연혁을 기록한 비각으로 태종 10년(1410)에 변계량에게 작성하여 비를 세웠다. 비각은 중종 6년(1511) 서향 1칸 규모로 건립되었다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인조 4년(1626)에 이정구가 비음을 기록하게 명하고, 이를 이홍주가 쓰고 김상용이 전서하여 비각을 복원하였다.4

 

성균관과 전국 향교 대성전에서 일제히 거행된다. 집례의 창홀에 따라 헌관이 대성전에 들어가 향을 사른 후 네 번 절을 올린다.

 

대성전 - 명필 석봉 한호의 글씨

 

3. 고유(告由)

성균관과 국가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그 내용을 공자에게 아뢰는 의례를 고유라고 한다.

 

대성전 앞 신삼문

 

조선시대에는 성균관의 중요한 관직의 임명 때, 대성전을 수리하기 위해 위패를 이안하거나 공역이 끝나고 다시 환안할 때 의식을 거행했다.

 

동삼문 -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임금이 친히 석전에 참석할 때 출입하던 문이다. 평상시에는 닫아놓고 임금이 오실때만 열기 때문에 어삼문이라고도 한다.

 

현재 성균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신임 임원이나 향교 전교를 임명할 때, 성균관대학교의 입학식과 졸업식 때 올리고 있다. (안내문) 기회가 되면 석전행사 때 참관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