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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서울 종로구 #칠궁 #사적 제149호 #저경궁 #대빈궁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 #경우궁 #덕안궁

by 포리시스 2023. 2. 10.

<칠궁>은 조선시대 왕들을 낳은 친어머니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후궁 7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적 제149호이다. 예전에는 청와대 관람 사전 예약을 하고 인솔자의 안내를 통해서만 관람이 가능했으나 몇 년 전부터 정문을 개방하여 자유.무료관람이 가능하다.

 

칠궁 정문

 

원래 한성 곳곳에 흩어져 있었으나 영조가 자신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주를 모신 사당 <육상궁>을 건립한 이후 융희 2년(1908) 연호궁, 저경궁, 대빈궁, 선희궁, 경우궁이 옮겨왔고, 1929년 덕안궁이 들어오면서 모두 7개의 궁으로 이루어져 칠궁(七宮)이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칠궁 관람을 오신 분들,...

 

궁궐의 규모 만큼 그리 넉넉한 공간은 아니지만, 북악산으로부터 내려오는 자락에 자연 친화적인 작은 정원 속의 전각들이 궁궐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냉천정 아래 작은 연못은 마치 자연을 닮아 지어진 이름 자연(紫淵)인지도 모르겠다. 

 

재실

 

궁궐의 의미인 '궁'자를 붙여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을거다. 서울에 있는 궁궐은 거의 다 둘러본 것 같다. 블에 기록이 되지 않은 곳은 너무 오래되었기에 따로 방문하게 되면 올려보기로 한다. 각각의 궁에 모셔진 신위의 주인공을 네이버에서 옮겨 보았다.

 

 

재실 - 제례를 준비하는 건물이다. 풍월헌과 송죽재라는 두 개의 현판이 동서로 걸려 있으며, 연결채로 이어진 뒤편에는 삼락당이 있다. 삼락당과풍월헌은 1753년(영조 29)에 영조가 육상궁에 예를 올렸다는 기록들이 처음 보이므로 이 무렵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경궁> 경혜인빈 김씨(1555 ~ 1775)

선조의 후궁으로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한우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 보성군 이합의 증손자 이효성의 딸이다. 

 

재실 풍경

 

또한 외사촌 언니는 명종의 후궁인 경빈 이씨였는데 자식이 없어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행동이 유순하고 침착해서 남다른 바가 있었다고 한다.

 

사당공간으로 가는 삼문

 

이런 모습이 당시 왕대비로 있던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선조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1573년(선조 6) 종4품 숙원으로 봉작되었고 이후 정3품 소용, 종2품 숙의, 종1품 귀인을 거쳐 1604년(선조 37) 정1품 인빈이 되었다.

 

재실의 뒤 건물 삼락당

 

슬하에 의안군 이성, 신성군 이후, 정원군 이부, 의창군 이광을 비롯해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희옹주를 낳아 4남 5녀를 두었다. 이 중에서 셋째 아들 정원군의 자식이 인조로 등극하고, 정원군은 사후 대원군에 진봉되었다가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종묘 영녕전에 봉안되었고 왕의 사친이 되었다.

 

냉천정

 

<대빈궁> 옥산부대빈 장씨(1659 ~ 1701)

숙종의 후궁이자 20대 군주였던 경종의 모친이다. 1689년(숙종 15)부터 1694(숙종 20)까지 왕비로 있었지만 폐비였던 전임 왕비 인현왕후가 삼불거로 복위하게 되면서 중혼법에 따라 다시 후궁으로 강등해 돌아갔다.

 

육상궁 앞 삼문

 

정식 명호는 1722(경종 2)에 새로이 창안된 작위인 '부대빈'을 쓴 옥산부대빈 장씨이지만 1725년(영조 즉위년)에 세워진 구호에 따라 다시 '희빈'이란 강칭으로 널리 이용됐기에 현대인에겐 '희빈 장씨', '장희빈', 혹은 그녀의 이름이었던 '장옥정'으로 익숙하다.

 

육상궁(숙빈최씨 신주)와 연호궁(정빈 이씨 신주)

 

<육상궁> 화경숙빈 최씨(1670 ~ 1718)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어머니이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왕의 후궁이 되고, 훗날 왕의 어머니가 되는 일명 조선판 신데렐라. 사후 아들 영조에 의해 '화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추증되어 화경숙빈으로 불리거나 궁호인 '육상궁'으로 불렸다.

 

연호궁 전경

 

아버지는 영의정으로 추증된 최효원이며 어머니는 홍계남의 딸이다. 출신이 불분명하여 여러가지 설이 많은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궁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였다가 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연호궁 전경

 

기록에 남는 여러가지 이야기로 추축하건대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사가에 나가서 살던 시절 인현왕후의 생일에 인현왕후를모셨던 적이 있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위한 기원을 올리고 있던 모습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숙종이 목격하는 바람에 눈에 띄게 되어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연호궁의 현판 하나이지만, 내부에는 감실이 두 개 인것 같다.

 

<연호궁> 온희정빈 이씨(1694 ~ 1721)

영조의 첫 번째 후궁. 영조가 즉위하기 전 왕자인 연잉군 시절에 첩이 되어 자식을 낳고 후궁이 되었으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슬하에 효장세자 이행, 화억옹주, 화순옹주를 낳아 1남 2녀를 두었다.

 

연호궁 삼문 주변 풍경

 

1701년(숙종 27) 8세의 어린 나이로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 영조는 그녀를 양가의 딸이라고 밝혔는데, 양인이지만 궁녀로 입궁할만큼 집안이 한미하고 가세가 쇠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냉천정

 

언제 어떻게 영조의 승은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717년(숙종 43) 4월 22일 화억옹주가 태어난 것으로 보아 적어도 1716년(숙종 42년)에는 승은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냉천정 아래 작은 연못 자연(紫淵)

 

승은을 입은 이후 영조가 왕세제가 되기 전까지 왕자의 첩 신분으로 별궁이었던 창의궁에서 살았다. 그녀가 낳은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까지 모두 영조의 사저(잠저)이자 별궁인 창의궁에서 태어났다.

 

냉천정 - 건립 기록이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으나 숙빈묘라는 이름으로 육상궁이 처음 건립된 영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 두 칸은 온돌방, 동쪽 한 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다. 냉천정에는 영조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선희궁> 소유영빈 이씨(1696 ~ 1764) 

영조의 두 번재 후궁이다. 부군 영조 이후 사도세자부터 정조, 순조, 문조, 헌종, 철종대까지 모두 혈통상 영빈 이씨의 직계 자손들이다. 화평옹주, 화협옹주, 사도세자, 화완옹주의 생모이며 정조의 친할머니이다.

 

저경궁.대빈궁.선희궁.경우궁.덕안궁의 삼문

 

1696년(숙종 22)에 태어나 6세의 어린 나이에 궁녀로 뽑혀 들어왔다. 지밀에 소속되어 대전(임금이 거쳐하는 곳)에서 일했다. 당시 숙종은 이씨를 두고 "이 나이의 사대부 집 여자아이들은 어린 티를 면하기 어려운데, 위항의 여자라 조숙하여 이런 일까지 다 하는구나."라고 말했다 한다.

 

덕안궁 - 순헌 귀비 엄씨 신주를 모신 곳

 

1726년(영조 2) 11월 16일, 30살에 영조의 승은을 입으면서 아이를 갖게 되어 이례적으로 내명부 종2품 '숙의'에 정식 책봉되었다. 1727년(영조 3) 장녀 화평옹주를 출산하고, 1728년(영조 4) 내명부 종1품 '귀인'이 되었다.

 

덕안궁 앞 이안청

 

비록 그동안 세 명의 옹주가 조졸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1730년(영조 6) 11월 27일 내명부 정1품 '빈'의 첩지를 받아 영빈이 되었다. 1733년(영조 9)에는 5녀 화협옹주를 출산했다. 1735년(영조 11)에 마침내 모두가 고대하던 왕자를 출산하는데 그가 사도세자다.

 

덕안궁 뒤 3개의 전각

 

정빈 이씨가 낳은 장남 효장세자를 일찍 잃고 오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해 노심초사하던 43세의 늦깎이 아버지 영조는 후궁 영빈 이씨가 출산하던 당일 직접 그 곁을 맴돌며 지키고 있다가 아들이란 소식을 듣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이 왕자는 곧 다음해에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자로 책봉됐다.

 

대빈궁 - 희빈 장씨 신주를 모신고

 

<경우궁> 현목수비 박씨(1770 ~ 1823)

정조의 간택 후궁으로 순조의 어머니이다. 정조의 부인들 중 가장 호사를 누린 인물. 효의왕후, 원빈 홍씨, 화빈 윤씨는 자녀가 없었고 이 중 원빈 홍씨는 단명했다. 또한 정조의 첫사랑이었던 의빈 성씨는 자녀들 뿐만 아니라 본인도 단명했다.

 

저경궁 - 인빈 김씨 신주를 모신 곳

 

오직 수빈 박씨만이 자녀들이 단명하지 않고 성장했으며, 살아서 아들이 왕이 되는 모습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본관은 반남. 반남 박씨 박준원의 6남 5녀 중 3녀로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에서 출생하였다.

 

선희궁(영빈 이씨 신주를 모신곳), 경우궁(수빈 박씨 신주를 모신 곳)

 

박씨가 입궁하기 전까지 반남 박씨는 노론 명문가였으나 박씨의 집은 대단하지 않았고, 박준원은 박씨가 입궁하기 몇 달 전에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유년생활이 부유하고 화려하지는 않았다. 아들 순조가 보위에 오른 후에는 그녀의 가문은 세도정치 가문 중 하나가 되었다.

 

3개의 사당 전각이 나란히

 

<덕안궁> 순헌황귀비 엄씨(1854 ~ 1911)

고종황제의 후궁으로 명성황후 사후 사실상 고종의 황후나 마찬가지였던 여성으로 영친왕의 어머니이다. 8살 때 궁녀로 입궐해서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으로 있었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다.

 

덕안궁 앞 이안청과 뒤의 전각들

 

이 사실을 안 명성황후는 엄 상궁을 궐 밖으로 쫓아냈다. 그 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죽자 고종은 엄 상궁을 다시 불렀고, 아관파천에도 개입해서 고종,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다.

 

덕안궁 삼문 앞의 안내문

 

1897년, 44세에 영친왕을 낳은 후 정식 후궁의 첩지를 받게 되어 귀인, 1900년엔 순빈, 1901년에 순비로 봉해졌다. 고종황제는 엄씨를 황후로 세우고 싶어 있으나 큰 반대에 부딪혔다. 엄씨의 신분이 원래 궁녀(평민)였고, 숙종이 세워놓은, "후궁은 왕비가 될 수 없다"는 법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서쪽 삼문을 들어서면서 위치한 건물인데,..... 이름은 확인하지 못했다.

 

궁궐의 규모 만큼 넉넉한 공간은 아니지만, 북악산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자락에 자연 친화적인 정원의 모습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작은 연못과 재실의 건물 구조가 특이하다 여겨졌다. 서울에 있는 궁궐은 거의 다 둘러본 것 같다. 블에 기록이 되지 않은 곳은 너무 오래되었기에 따로 방문하게 되면 올려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