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회암사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를 소원하며, 이 곳에서 출토되었던 유물들과 더불어 박물관에 기록된 이야기를 더하여 <회암사지 박물관>을 소개해 본다.
기록만 늘어놓아도 굉장히 많은 분량이라 여겨져 어쩌면 두 번에 나누어 지루함을 "컷~~~!" 해야 겠다.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가람. 회암사]
회암사는 고려말에 전국 사찰의 총본사였다.
이후 조선전기에 불교계의 여러 종파가 선종과 교종으로 통폐합될 때도 선종의 본찰로서 크게 번영하였다.
또한 당시 불교계를 이끌었던 지공. 나옹. 무학 등의 고승들이 머물렀던 최고의 가람이다.
회암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원증국사탑비'나 <동국여지승람>등의 기록에 '회암사'라는 사찰명이 있는 점으로 볼 때 12세기에는 창건 되었을 것이다.
회암사가 현재의 회암사지와 같이 대규모의 사찰로 중창된 것은 지공과 나옹에 의해서이다.
고려말에 인도의 고승인 지공이 "회암사의 산수 형세가 천축국의 나란타사와 같으니, 이곳에서 불법을 펼치면 크게 흥할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 제자인 나옹이 그 뜻을 받들어 대대적인 불사를 시작한 것이다.
조선초에는 태조 이성계,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 등의 왕실 인물이 회암사에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1964년에 사적 제 128호로 지정된 회안사지는 1997년부터 2012년까지 10차에 걸쳐 사찰의 중심 권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회암사는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궁궐과 유사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왕실에서만 제한적을 사용되었던 도자기류와 기와류 등 귀중한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고려말부터 조선초 최대의 사찰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회암사는 천보산에 있다. 고려 때 서역의 중 지공이 여기에 와서 말하기를 "산수 형세가 완연히 천축국 나란타 사원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중 나옹이 절을 세우기 시작하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고, 그 제자 각전 등이 공역을 마쳤다.
절이 무릇 2백 62칸인데, 건물과 상설이 굉장하고 아름다워 동방에서 으뜸으로 중국에서도 많이 볼 수 없는 정도이다.목은이 기문을 지었다.
[지공선사 : ?~1363]
인도의 승려로 법명은 '디야나바드라'이다.
인도의 동북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의 왕자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나란타사에서 율현에게 불교를 배웠다.
지공은 자신의 새로운 불교 사상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네팔과 티베트를 거쳐 원나라로 주요 도시에 머물면서 교화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1326년(충숙왕 13) 3월부터 1328년(충숙왕 15) 9월까지 고려에 2년 7개월 동안 머무르며 회암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불교를 전파하다가 원나라로 돌아갔다.
그는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는 물론 중국과 우리나라 불교 교학과 사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토착신앙을 두루 익힌 최고의 고승이다.
[나옹선사 : 1320~1376]
나옹의 속명은 원혜, 휘는 혜근, 호는 강월헌이며, 시호는 선각이다.
1340년(충혜왕 1)에 회암사에 수도하며 큰 깨달음을 얻은 후 1346년(충목왕 3)에 원나라로 건너갔다.
원에서 유학하는 동안 고려인이 세운 사찰인 법원사에 머무르며 지공에게 수학하며 새로운 불교 사사인 무심선과 임제종을 배웠다.
이후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황실 사찰에서 개당법회를 주재하면서 그 명성이 높아졌다.
15년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려로 귀국하였고, 1372년(공민왕 21)에는 왕사에 올랐다.
나옹은 국왕의 후원 아래 회암사의 중창과 불사에 힘쓰는 등 침체된 고려후기 불교계를 부흥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무학대사 : 1327~1405]
무학의 휘는 자초, 당호는 계월헌이다.
1344년(충혜왕 5) 18세에 출가하여 혜명국사에게 불교를 배웠고, 부도암에 머물던 1346년(충목왕 2)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 묘향산 금강굴 등에서 수도 생활을 하였으며, 1353년(공민왕 2) 연경에서 지공과 나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1356년(공민왕 5)에 귀국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 거처하면서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1402년(태종 2)에는 회암사의 감주가 되었다.
무학은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하는 한편 숭유억불의 정치 이념 속에서도 불교계를 이끌었다.
[조선시대의 회암사]
회암사는 조선시대에 왕실의 보호 아래 성장하였다.
조선건국 후 다음 해부터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이 회암사의 주지를 맡았으며, 태조는 회암사를 자주 찾기도 하고 내신들을 보내어 토지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전기에는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불교행사의 대부분이 회암사에서 시행되었다.
이처럼 회암사는 조선 왕실의 막강한 정치, 경제적 후원을 바탕으로 조선중기까지 조선시대 최대의 사찰로 그 위상이 높았기 때문에, 당시의 왕실문화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392년 임신]
조선왕실의 후원으로 최고의 사찰로서 비상하다.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숭유억불정책을 정치이념으로 불교를 탄압하였으나 태조는 왕조 창업에 공헌한 불교 세력에 대한 배려가 컸으며,
특히 무학을 왕사로 임명하여 그가 주지로 있던 회암사에서 왕사접견을 이유로 7찰에 걸쳐 회암사로 행차하는 등의 후원을 단행하였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회암사는 효령대군, 정희왕후, 문정왕후를 비롯한 많은 왕실인물들의 불사 후원이 지속되면서 중수와 중창을 거듭한 결과 조선최대의 사찰을 완성하였다.
1424년 회암사는 토지가 500결에 달하고 승려 250여명이 머무는 조선최대의 사찰로 입지를 굳혔다.
[1434년 갑인]
조선최고의 왕실사찰로 널리 이름을 떨치다. 효령대군은 회암사 중수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불사를 단행하였다.
이에 세종은 신하들의 불사 금지조치 요구 등 회암사에 대한 배척을 무갈하고 이듬해 회암사에 쌀을 하사하는 등 불교의 중흥을 간접적으로 묵인하였다.
1443년의 가뭄에는 회암사에서 기우제를 지내도록 요청하였으며, 1446년에는 회암사 소속 승려들의 잡역을 면제 시키기도 하였다.
1472년(성종 3)에는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에 의해 정현조가 13개월에 걸쳐 회암사를 중창하였다.
[1549년 기유]
문정왕후와 보우, 불교중흥의 기반을 다지다.
명종이 즉위하자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문정왕후는 회암사와 선왕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유생들이 절에 들어가 난동 부리는 것을 금지하고, 도첩제를 실시하는 등 불교 중흥정책을 펼쳤다.
한편 회암사에서는 모든 왕릉의 제사를 지내게 하여 회암사에 대한 비호와 특권을 유지하게 하였다.
[1565년 을축]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다. 1565년 문정왕후는 회암사에서 화려한 대규모의 무차대회를 계획하여 불교중흥을 꾀하였으나, 무차대회 직전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던 회암사는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 탄압과 비난의 표적이 되어 급격하게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역사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흥하고 쇠퇴하고,.... 하지만, 그들의 삶을 발견할 수 있음이 아닌가 싶다. 다음에 이어서 기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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