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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양주 #양주목관아지 #경기도기념물 제167호 #사령청 #동헌 #서헌 #외렴성문 #중렴성문 #어사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by 포리시스 2023. 9. 7.

이 곳을 다녀간지 10여 년이 훨 넘은 것 같다. 그때에는 동헌과 비각 그리고 목사의 송덕비가 전부였고 넓은 터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전각들이 많이 복원되어져 있다. 오래전 지방관청으로서 한결 보기 좋은 모습이라 여긴다. 안내문의 내용으로 다시 기록해 본다.

 

양주목관아지의 외삼문 - 문루의 현판이 없어 아쉽다.

 

[양주관아지 / 楊州官衙址 -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

<양주관아지>는 1506(중종 1)년 현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의정부시 의정부1동)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목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었던 곳으로 2000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양주목관아 전경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및 담장지, 배수시설, 출입시설 등의 유구와 평기와, 막새기와, 명문기와 등의 기와류 및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자기류, 상평통보 등 금속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양주목관아 모형도

 

양주 관아의 규모가 어떠하였는지는  「여지도서(1760)」,  「경기지 (1842)」,  「경기읍지(1871)」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양주목관아 내삼문

 

이 중 양주목의 규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경기읍지」로 약 31개의 관아 시설에 그 규모는 326여 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외삼문을 들어서 우측의 사령청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매학당)의 복원을 시작으로 그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동헌부 부속건물 및 내아에 대한 복원을 추진하였다.

 

내삼문에서 본 동헌

 

그 결과 2017년 동헌부 부속건물인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사령청, 외삼문, 중렴성문, 외렴성문과 양주목사의 관사였던 내아, 내아삼문에 대한 복원을 완료할 수 있었다.

 

동헌 앞 동행각

 

또한 문화재보호구역 내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무형문화재 통합공연장, 주차장, 양주관아지 관리센터를 조성하여 양주관아를 찾는 관람객들의 관람편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서행각

 

매학당 동쪽으로 18기의 양주목사 송덕비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매학당 뒷편으로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가 양주관아에 행차하여 활을 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어사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가 자리하고 있다.

 

동헌

 

매학당 동쪽 뒤편으로는 '금화정'이라는 정자가 위치하고 있는데 양주목사가 백성들을 사랑하여 함께 즐겼다는 '관민동락'의 사상이 배어 있는 장소이며,

 

동헌 마당에서 본 내삼문

 

그 글씨가 정자 아래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96년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다.

 

동헌

 

[사령청]

사령은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심부름 등의 천한 일을 맡고, 군관. 포교 밑에 있으면서 죄인에게 곤장을 치는 등 하는 일이 여러 가지여서 그 일에 따라 조례. 문졸. 일수. 나장. 군노 등으로 달리 불렸다.

 

동헌의 현판 - #매학당 - 영조의 글씨

 

사령청은 이러한 사령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2차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가 확인되어, 3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동헌의 원래 건물지

 

[동헌 / 東軒]

동헌은 지방수령의 정청으로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지방관의 관사인 내아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주목관아 동헌

 

매학당이 있기 전 동헌 역할을 했던 건물은 과학당으로 기존 매학당 자리 뒤편으로 추정된다. 매학당의 명칭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경기지」에서 부터이나,

 

동헌의 뒷쪽 - 외렴성문과 담장 너머 어사대비각의 모습이 보인다.

 

 「여지도서」의 내용을 볼 때, "외동헌 뒤에는 과학당 1칸이 있다."라 하여 이전 시기에 과학당을 대신하여 새로운 동헌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헌의 뒷 모습

 

또한  「경기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매학당의 현판 글씨를 영조가 지었는데 경진년(1760년, 영조 36) 봄 3월 이곳을 지날 때

 

#외렴성문

 

매학당의 현판 글씨를 써서 당시 양주목사였던 이지억에게 하사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매학당은 최소 18세기 중반에는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뒤에서 본 동헌

 

양주시는 1996년 원골문화마을 조성 계획에 따라 1997년 매학당을 복원하였다. 2001년 양주관아지 2차 발굴조사 때 매학당이 지어진 곳 앞 쪽으로 매학당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다.

 

동헌과 행각들

 

발굴조사 결과 매학당은 초축시 18칸으로 지어졌다가, 후대에 증축하여 27칸의 규모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헌과 뒤쪽의 외렴성문

 

발굴조사 결과에 따라 복원된 매학당 앞쪽으로 원래 매학당지를 정비하여 보존하고 있다.

 

내아와 동헌의 경계의 담장 그리고 중렴성문

 

[동헌영역 / 東軒領域]

동헌영역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동헌을 중심으로 하여 그에 부속하는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및 좌우행각, 사령청,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헌과 외렴성문

 

지방관의 생활처소인 내아와 구분되어 보통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이라고 불리며, 지방의 일반행정업무와 재판이 이뤄지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동헌과 내아(서헌)의 경계 담장, 그리고 출입문(중렴성문)

 

동헌인 매학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면부에 동행각과 서행각이 위치하고 있으며, 내삼문 좌,우측으로 좌행각, 우행각을 두었다.

 

동헌과 그 앞에 동헌의 원래 터

 

여기서 행각은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서, 양주관아에서 근무하는 군인,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던 공간으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헌 전경

 

또한 내삼문 및 외사문 사이에 사령(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공간인 사령청을 두었다.

 

서행각(좌), 내삼문(가운데), 사령청(우)

 

동헌영역에는 4곳의 문이 있는데 매학당으로의 주출입로인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으며, 이외에 협문인 중렴성문과 외렴성문을 두어 출입을 원활하게 하였다.

 

내삼문(좌)와 사령청(가운데), 외삼문(우)

 

동헌영역은 2~3차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었는데, 특히 2차 발굴조사 결과 매학당의 원래의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현재 복원된 매학당 앞쪽으로 건물지 정비를 하여 보존하고 있다.

 

동헌영역

 

[외렴성문 / 外簾城門]

외렴성문은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인 동헌에서 뒤편 어사대나 금화정 등으로 출입하는 동헌에 부설된 출입문이다.

 

관아 앞에서 본 동헌 전경

 

 「경기읍지」에 의하면 외렴성문의 규모는 1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주관아지 3차 발굴조사 결과 동헌 북쪽에 출입유구시설이 확인됨에 따라 1칸의 규모로 복원하였다.

 

문루에 멋진 글씨체의 현판이라도 걸렸으면 좋겠다.

 

[중렴성문 / 中簾城門]

중렴성문은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인 동헌과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협문이다.

 

내아 가는 담장에서 본 내삼문의 건물과 외삼문

 

 「경기읍지」에 의하면 중렴성문의 규모는 1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유구위치는 확인되지 않았고, 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1칸의 규모로 복원하였다.

 

내아 외삼문

 

[내아영역 / 內衙領域]

내아영역은 지방수령이었던 양주목사의 가족들이 거처하였던 내아와 행랑채, 내아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아 전경과 관리사(좌측 건물), 그리고 내아 앞 행랑채터

 

관아건축 구조상 내아영역은 동헌의 서편에 위치하며, 내동헌 또는 서헌이라고도 불린다. 튼 'ㅁ'자 모양의 내아에서 양주목사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였고,

 

동헌과 경계의 담장과 출입문 중렴성문

 

양주목사 및 그 가족들이 내아와 동헌 사이의 협문인 중렴성문을 통해 내아와 동헌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사의 가족이 머물던 내아 내동헌, 서헌이라고도 한다.

 

내아 아래쪽에는 행랑채가 있어 주로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창고로 이용되었다. 또한 외부로의 출입을 위해 내아삼문을 두었다.

 

중렴성문에서 본 내아 건물

 

내아영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인들의 주내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내아 전면부 쪽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당시 죄인이나 포로를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등 후대에 이르러 건물들이 망실되었다.

 

내아 건물의 뒤쪽

 

3차 발굴조사 결과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아에 대한 복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

 

관리사

 

현재는 내아와 내아삼문은 복원된 상태이며, 행랑채의 경우 건물지를 정비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한 내아 좌측에 양주관아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별도로 관리사를 신설하였다.

 

뒤쪽 측면에서 본 내아건물

 

[내아삼문 / 內衙三門]

내아삼문은 내아로 진입하는 주 출입시설을 말한다.

 

내아

 

삼문이라 함은 대궐이나 관아 건물 앞에 있는 3개의 문으로 정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동협문(東夾門), 왼쪽으로는 서협문(西夾門)을 두었다.

 

관리사, 내아, 동헌

 

양주관아의 내아삼문은 내아와의 축선 위치를 고려하여 현 위치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외삼문 뒤로 동헌 영역

 

[내아 / 內衙]

내아는 지방수령의 가족들이 거처하는 내당으로 내동헌 또는 서헌이라고도 한다.

 

동쪽 밖에서 본 동헌, 외렴성문, 어사대비각

 

내아의 규모에 대해서 문헌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지도서」에서는 "내외동헌 모두 29칸"이며,  「경기읍지」에서는 26칸으로 기록되어 있어, 초축 이후 차후에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외렴성문과 어사대비각

 

건물구조는 튼 'ㅁ'자 구조에 4칸 반 규모의 행랑채가 내아 아래쪽에 위치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사대비 연혁

 

내아에서 양주목사의 가족들이 거처하였고, 아래쪽의 행랑채는 물품창고로 이용되었거나, 심부름 하는 사람들이 주로 기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사대비각과 문화재안내문

 

내아는 3차 발굴조사 결과 그 위치가 확인되었다. 현재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25칸 규모의 내아를 복원하였고, 내아 앞쪽에 위치한 행랑채는 그 터를 정비하여 보존하고 있다.

 

'어사대' 비

 

[어사대비 / 御射臺碑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2호]

어사대비는 조선 정조가 활을 쏘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둔 비이다.

 

어사대비각에서 본 동헌

 

1792년 9월 정조가 광릉에 행차하던 길에 양주목사가 있던 관아에 3일간 머물면서 백성을 시무하여 민정을 살피고, 이곳 사대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잔치를 베풀었다.

 

어사대비각과 문화재표지석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목사 이민채가 그때의 상황을 기록한 비석으로, 임금이 활을 쏘았던 곳이라 하여 비신 전면에 '어사대'라 음각하였다.

 

동헌의 동쪽 담장

 

비의 뒷면 끝 부분에는 정조 16년(1792)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도록 "숭정삼임자 십이월일립, 崇禎三壬子 十二月日立"의 글자를 새겼다.

 

양주목관아지와 공덕비군

 

또한 정조가 활을 쏜 내용과 활을 쏜 뒤 지은 고시(古詩)와 환궁 후 내린 말씀을 관아 우측 벽에 게시하여 성덕을 찬양하며, 아울러 그 사실을 석비에 새기고 읍지에 기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목관아지의 유물들

 

거북 기단 위에 대리석으로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모는 높이 140cm, 넓이 55cm, 두께 23cm이다. (안내문) 영조.정조의 이야기가 살짝 베어있는 곳이다.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해도 좋을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