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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기행

호국 영웅 충무공의 얼을 찾아서, 충렬사

by 포리시스 2026. 1. 30.

[ 충렬사 연혁 ]

1606  선조(宣祖) 39년(丙年), 이운룡(李雲龍) 제7대 통제사(統制使)가 왕명을 받아 정당 건립

1663  현종(顯宗)4년(癸卯), 김시성(金是聲) 제45대 통제사가 주청하여「충렬사」로 사액(賜額) 받음

 

충렬사 정문

 

1670  현종(顯宗)11년(庚戌), 김경(金鏡) 제51대 통제사가 부속제실로 동재·서재 건립

1681  숙종(肅宗)7년(辛酉), 민섬(閔暹) 제60대 통제사가 충렬묘비(忠烈廟碑) 건립. ※ 묘비(廟碑) : 사당에 세우는 비

 

강한루 - 충렬사 경내로 들어오면 2층 누각의 강한루가 있다. 좌우로 붉게 핀 상사화가 참 예쁘다. 누각의 좌측으로 전시관이 있다.

 

1695  숙종(肅宗) 21년(乙亥), 최숙제 70대통제사가 경충재 설립. 지방민 자녀를 교육시키기 위하여 건립한 충렬서원.  ※ 충렬서원 : 대원군의서원철폐령(1864,1876)때 제외되어 존속된 서원

1695  숙종(肅宗) 21년(乙亥),김중기(金重器) 제71대 통제사 때 숭무당 준공. 연대도를 사패지로 마련, 장교 3명이 차출되어 숙직하고 사우를 수호하고 전곡사무를 관장함.  ※ 사패지(賜牌地) : 왕족이나 공신에게 내리는 토지(전답)

 

강한루

 

1722  경종(景宗) 2년(壬寅),이봉상(李鳳祥) 제94대 통제사(제5세손)가 사당 중수

1795  정조(正祖) 19년(乙卯), 정조대왕이 이충무공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는 어제사제문과 이충무공전서(8책14권)를 하사, 팔사품을 진열하여 엄숙히 제사 지내게 함

 

강한루 현판

 

1840  헌종(憲宗) 6년(更子),이승권(李升權) 제172대 통제사(統製使)가 강한루 건립

1894  고종(高宗) 31년(甲年), 민형식(閔炯植) 제206대 통제사가 이순신대감 생신계를 만듬

1895  고종(高宗) 33년(丙申:建陽元年), 홍남주(洪南周) 제208대 통제사를 끝으로 통제영이 해체. 지방의 유림들이 이순신대감생신계와 협동하여 제향관리(管理)

 

 

1897  지방대 창설 1910년(庚戌)까지 13년간 지방대관리(地方隊管吏)가 제향관리

1915  외삼문 앞에 있는 강한루가 폭우로 무너짐

1919  기미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생신계·기신계·착량묘관리회(鑿梁廟管理會)를 통합, 충렬사영구보존회(忠烈祠永久保存會)를 설립

 

서재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들이 향사를 봉행하기 전에 심신을 정화(淨化)하고 제복으로 갈아 입는 곳이다. 제51대 통제사 김경(金鏡)이 맞은편의 서재(西齋)와 동시(1670)에 건립하였다.

 

충렬문

 

[ 정당(正堂) ]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조선 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통영 충렬묘비(統營 忠烈廟碑)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숭무당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숭무당 현판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 : 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경충재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경충재 현판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 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경충재와 5대통제사 유형기적비각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동재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漁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 통제사의 휘필이다.

 

동재 현판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서재

 

통용문인 양쪽 협문(夾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익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 : 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서재 현판

 

제향이 지작되기 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笏唱 : 제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동재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 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

 

서재

 

경충재(景忠齋)

제70대 통제사 최숙이 건립(1695). 지방이 청소년들에게 학문과 충의를 가르치던 강당으로 충렬서원이라 불렀다.

 

동재 주련 - 서해어룡동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1864)도 유일하게 제외, 존속되었던 유서깊은 서원이다.

 

동재 주련 - 맹산초목지

 

숭무당(崇武堂)

제70대 통제사 최숙(崔橚)이 전면에 있는 경충재와 동시에 건립, 조선수군장교료 3명이 상주(常駐)하여 제위(祭位)전답과 사무(祠務)를 관리하던 곳이다. 현재는 본 재단의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다.

 

충렬사 앞 내삼문

 

충무공이 지은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

넓은 바다에 가을 햇빛 저무는데

 

충렬사

 

경한안진고(驚寒雁陣高)

찬 바람에 놀란 기러기 하늘 높이 날아간다

 

충렬사

 

우심전전야(憂心輾轉夜)

가슴에 근심 가득하여 잠 못 이루는 밤

 

충렬사 현판

 

잔월조궁도(殘月照弓刀)

새벽 달빛이 활과 칼을 비추는구나

 

충렬사 내 충무공 영정

 

강한루(江漢樓)

강한루는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升權 - 이충무공의 8세손)이 1840년에 지은 누각이며 전형적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정면 세칸, 측면 두 칸의 익공식 이층 구조에 아래층 뒤편에는 통용문인 <영모문(永慕門)> 현판이 걸려 있다.

 

충무공 영정과 좌우로 팔사품

 

1913년 큰 비로 인해 무너졌으나 1988년에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한다.

 

충무공 영정 우측의 팔사품

 

강한(江漢)은 중국 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 무한(武漢)에 있는 지명이다. 강한은 무한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長江 : 揚子江)과 지류인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예로부터 열국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景勝地)이다.

 

충무공 영정 좌측의 팔사품

 

이 강한(江漢)의 대안(對岸)에는 이백(李白)의 시(詩)에 등장하는 황학루(黃鶴樓)와 항주(恒州)의 서호(西湖)와 비견(比肩)되는 동호(東湖)가 있다.

 

충렬사 앞 삼문

 

또 고대(古代) 주(周)나라 때 이곳 강한변(江漢邊)에서 소호(召虎)가 적의 항복을 받아 나라의 우환(憂患)을 씻었다는 고사(古事)가 있다.

 

충렬사에서 본 은행나무와 서재

 

1840년 제172대 통제사 이승권(李承權)이 여기에 누각(樓閣)을 지었을 때 시인 강위(姜瑋)가 경승지 통제영과 이충무공의 위업을 이 강한의 고상에 연관지어 강한루(江漢樓)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충렬사에서 본 은행나무와 동재

 

예부터 충렬사를 찾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누각 위에 올라 이충무공의 큰 덕을 되세기며 동백 고목과 더부러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에 올렸던 누각(樓閣)이다.

 

충렬사 풍경

 

강한루(江漢樓) - 강위(姜瑋) : 1820~1884, 조선후기의 한학자

시소신선몽(試溯神仙夢)

물길 거슬러 신선의 꿈 아렸더니

 

충렬사 앞 삼문과 중문

 

중개한상금(重開漢上襟)

강한루 다시 올라 흉금을 활짝 연다

 

서재와 중문 풍경

 

고월행천원(孤月行天遠)

외로운 달 먼 하늘 떠나고

 

중문

 

중류도해심(衆流到海深)

개울물 모두 흘러 깊은 바다로 가는구나

 

숭무당과 비각

 

봉인문고지(逢人問古地)

사람 만나서 옛 땅 물어보고

 

숭무당

 

대주련초심(對酒憐初心)

술 나누는 첫 마음 애련도 하여라

 

숭무당과 비각 사이에서 본 서재

 

충렬사당재(忠烈祠堂在)

여기 충렬사 있어

 

중문 풍경

 

천애이재심(天涯已再尋)

찾아온 지 벌써 두 번째렸다

 

5대 통제사 유형기적비

 

통영 충렬묘비(統營 忠烈廟碑)

통영 충렬묘비는 충무공 이순신의 충절과 업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다.

 

충렬사 풍경

 

비문은 광해군 6년(1614)에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지었고, 비석의 위쪽에 ‘통제사 충무이공 충렬묘비명(統制使 忠武李公 忠烈廟碑銘)’ 이라고 되어 있는 전서체의 글씨는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충렬사

 

비문의 끝부분에 묘비를 세우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송시열(宋時烈)이 기록한 것이다.

 

충렬사 좌측 풍경

 

이후 숙종 7년(1681)에 제 60대 통제사 민섬(閔暹)이 머릿돌과 거북받침대를 각각 세웠다고 한다.

 

충렬사 우측 풍경

 

비문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공훈에 대한 칭송과 그에 대한 존경 및 사모의 내용이 담겨 있다.

 

영모문 - 강한루 누각의 안쪽에 걸려있는 현판이다.

 

제5대 통제사 유형 기적비(第五代 統制使 柳珩 紀蹟碑)

유형(1566~1615). 시호는 충경공(忠景公), 명문가 경원부사(慶源府使 : 경원시장) 용(溶)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전시관 가는 길의 상사화

 

조실부모(3세에 부별, 26세에 모별)하고 15세 때 참의(參議) 조인(祖認)에게서 글을 배워 시문(詩文)과 사서(史書)에 통달하였다.

 

도독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김천일(金千鎰) 휘하에 들어가 강화도에서 종군하였다.

 

영패

 

29세에 무과 별시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선조 임금에게서 탐라말(耽羅馬 : 제주산 말)을 하사받고 진충보국(盡忠報國 :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은혜를 갚음)할 것을 맹세하였다.

 

사제문

 

훈련도감(訓鍊都監 : 군사훈련을 맡아 하던곳)의 파총(把摠 : 종4품의 무관)을 거쳐 해남현감이 되었다.

 

귀도

 

이순신 장군이 순직하신 마지막 노량해전에 함께 참전하여 유형 장군도 여섯 발의 적탄을 맞아 아무도 살아나기 힘들 것이라 하였으나 끝까지 전투를 지휘하였다.

 

참도

 

뒤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부산진첨사에 특진되고 경상우수사를 거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곡나팔

 

이순신 생전에 통제사 재목으로 낙점 받은 문무를 겸전한 장군으로 문집으로는 석담유고(石潭遺稿)를 남겼다.

 

홍소령기

 

사제문(賜祭文)

사제(賜祭)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내려주는 것이다. 정조 19년(1795) 11월(丁丑)에 충무공 전서를 펴내면서 충렬사에 1질을 봉안하게 하고,

남소령기

 

통제사 이득제(제147대)에게 명하여 명조 팔사품도 함께 장소를 알맞게 진열하고 술과 고기를 위패 앞에 모신 다음 투구와 갑옷은 입은 채로 잔을 올리고 제사하라 하신 정조 임금님의 하사 제문이다.

 

독전기

 

도독인(都督印)

선조 31년(1598) 명나라 신종(神宗)이 충무공(忠武公)에게 수군도독(水軍都督 - 朝.明 聯合艦隊司令官)을 제수(除授)하면서 이 도독의 직인(職印)과 모든 의장물(儀仗物)을 보내온 것인데, 인문(印文)은 아홉 번 꺾어 쓴 전자(篆字)로 도독(都督)이라고 쓰여 있다.

 

전시관 내 거북선

 

참도(斬刀)

상방검(尙方劍 - 명나라 신종의 궁중에 소장되었던 칼)으로서 연합함대산하 전장병을 호령하고 군법시행시에 지휘도로 사용하였다.

 

서적

 

곡나팔(曲喇叭)

출동시(出動時나) 접전시(接戰時)에 하늘을 찢을 듯한 큰소리를 내어 사기(士氣)를 고무(鼓舞)시키거나 군령신호(軍令信號)를 할 때에 사용하였다.

 

충렬사 팔사품

 

홍소령기(紅小令旗)

기함(旗艦)에서 남소령기(藍小令旗)와 호응(呼應)하여 조.명 연합군의 작전(作戰)을 지휘(指揮)하였다.

 

팔사품

 

남소령기(藍小令旗)

기함(旗艦)에서 홍소령기(紅小令旗)와 호응(呼應)하여 조.명 연합군의 작전(作戰)을 지휘(指揮)하였다.

 

강한루

 

독전기(督戰旗)

적(敵)과 접전시에 연합군(聯合軍)을 독전(督戰)하던 기(旗)로서, 중앙에 비단을 오려 붙인 글자는 범군임적부룡명자처참(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 - 적과 싸울 때에 명령을 어긴 자는 처참)이라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