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 고종(高宗) 33년(丙申:建陽元年), 홍남주(洪南周) 제208대 통제사를 끝으로 통제영이 해체. 지방의 유림들이 이순신대감생신계와 협동하여 제향관리(管理)
1897 지방대 창설 1910년(庚戌)까지 13년간 지방대관리(地方隊管吏)가 제향관리
1915 외삼문 앞에 있는 강한루가 폭우로 무너짐
1919 기미년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생신계·기신계·착량묘관리회(鑿梁廟管理會)를 통합, 충렬사영구보존회(忠烈祠永久保存會)를 설립
서재
[ 동재(東齋) . 서재(西齋) ]
헌관(獻官)과 집사(執事)들이 향사를 봉행하기 전에 심신을 정화(淨化)하고 제복으로 갈아 입는 곳이다. 제51대 통제사 김경(金鏡)이 맞은편의 서재(西齋)와 동시(1670)에 건립하였다.
충렬문
[ 정당(正堂) ]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령에 제향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훈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통제사 이운룡(李雲龍)이 선조(조선 제14대)의 명을 받아 세웠다.
통영 충렬묘비(統營 忠烈廟碑)
이충무공 한분의 위패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성한 장소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맞배지붕으로 1606년에 창건하였는데,
숭무당
정당의 후원은 충절을 상징하는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기와지붕의 용마루에 새긴 주역(周易) 팔괘(八卦)는 음양의 조화(造化)와 만물이 화생(化生)하는 역(易)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제의(祭儀)는 정통 유교의 법식을 고수한다.
숭무당 현판
1895년 통제영이 폐영되어 관급(官給)이 끊어지고, 경술국치(庚戌國恥 : 1910년 한일병탄)를 당하여 제사를 받드는 주체가 없어지자, 이 곳 지방민들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1919)을 계기로 충렬사영구보존회(현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의 전신)를 결성하여 제향의 맥을 이어왔으나,
경충재
일제강점기에는 왜경이 장군의 위패를 칼로 부수고, 삼문의 태극문양에 덧칠하여 일장기(日章旗)로 바꾸고 또 제사를 올리지 못하도록 정당에 못질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경충재 현판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을 필두로 송진우. 여운형. 신익희 등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하여 건국의 결의를 다진 유서 깊은 사당이며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 선생이 국역편찬한 ‘이충무공전서’의 산실이기도 하다.
경충재와 5대통제사 유형기적비각
정당을 향하여 중앙 좌측의 주련은 명나라 진린(陳璘:천린) 도독이 이충무공을 찬양한 어록의 한 구절인 [욕일보천지공(浴日補天之功) : 해를 씻어 빛나게 하고 하늘의 구멍을 메운 큰 공]이며,
동재
우측은 이충무공께서 임전결의(臨戰決意)하신 [서해어룡동(誓海漁龍動) 맹산초목지(盟山草木知)]에서 따온 것으로 조선 고종조의 명신이자 예서체의 대가인 신관호(申觀浩) 제187대 통제사의 휘필이다.
동재 현판
내삼문(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 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三門造形)이다. 솟을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쪽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팎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자는 8각 돌기둥이다.
서재
통용문인 양쪽 협문(夾門)을 낮게 만든 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익 맞배지붕에 겹처마이며 삼문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 장식하였고 신문(神門) 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蓮花丹靑紋樣 : 단청으로 그린 연꽃무늬)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서재 현판
제향이 지작되기 전에 헌관은 이 내삼문 단하(段下)에서 북향립(北向立 : 북쪽을 향하여 섬)하였다가 홀창(笏唱 : 제향의 순서 부름)에 따라 집사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오른다.
동재
앞 뜰에는 매년 공의 탄신제(4월 28일)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1호인 승전무(勝戰舞)가 시연(施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