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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기행

서울 관악구(1) - 낙성대

by 포리시스 2010. 7. 21.

   낙성대

 

   낙성대는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에 있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4호이다.

 

   낙성대는 고려시대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이 태어난 장소이다. 장군이 태어날 때 이곳에 별이 떨어졌다고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을 얻었다.

 

   장군은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것을 비롯하여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 고려 백성은 장군의 이러한 공적을 찬양하여 장군이 집터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이 석탑은 서울특별시에서 1964년 파손된 부분을 보수하였으며, 1974년 이곳에 사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시면서 봉천동 218번지에 있던 이 탑도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세종실록>과 <동국여지승람>에는 강감찬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즉 어느날 밤 중국의 사신이 길을 가다가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갔더니, 마침 그 집의 부인이 아기를 낳았다. 그 아기가 곧 강감찬이며, 뒤에 송나라 사신이 와서 만나 보고는 문곡성의 화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장군과 관련된 많은 설화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장군의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끝에 본 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만난 여우여인과 관계를 맺게 되어 낳게 된 것이 장군이라는 것이다. 그의 출생담은 흔히 시조나 위인 등에서 나타나는 출생 설화와 일치한다.

 

   또한 장군이 소년원님으로 부임하였을 때 그가 너무 어리다고 얕보는 관속들에게 뜰에 세워둔 수숫대를 소매 속에 다 집어 넣어보라고 하였다. 그들이 불가능하다고 하자 그는 "겨우 일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에 다 집어넣지 못하면서 20년이나 자란 원님을 아전이 소매 속에 집어넣으려 하느냐!"라고 호통을 쳐서 기를 꺾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리고 어느 고을에서 여름날 개구리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관속에게 부적을 써주고 연못에 던지게 했더니, 그 곳의 개구리가 다시는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여러 지역에서 전승된다. 또 그가 한성판윤으로 부임했을 때 남산(또는 삼각산)에 사는 수백년된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하여 길을 지나는 사람을 수없이 해친다는 민원을 듣고, 편지로 호랑이를 불러와 크게 꾸짖어 앞으로 새끼도 평생에 한번만 낳고 몇몇 산에만 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장 안내문에서>

 

안국문 앞 광장의 박대통령의 휘호 "낙성대" 표지석과 안내문

 

   <<박정희대통령께서는 고려의 명장 강감찬장군의 나라를 위한 슬기와 용맹을 이 나라 안보의 의표로 삼게 하시고자 장군이 출생하신 이 곳 관악산 기슭에 새로 유적지를 조성토록 분부하고 [낙성대]라는 휘호를 하사 하시었다.

   서울특별시에서는 그 뜻을 받들어 1974년 6월 10일 이 곳에 안국사. 안국문. 사적비등을 건립하고 박대통령께서 하사하신 휘호를 이 자연석에 각자하여 오늘의 낙성대를 조성하였다.>>

[안국문] 

   안국문을 들어서면 좌측의 삼층석탑과 우측의 사적비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안국사 앞의 중문]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 안국사 전경] 

[사적비] 

[사적비의 후면] 

[삼층석탑] 

[삼층석탑과 안국사 전경]

[마굿간으로 향하는 퇴문] 

[사당 밖에 위치한 마굿간] 

[낙성대 공원]

   안국사를 나오면 광장 앞 아래쪽으로 아담한 연못과 주변으로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공원의 한 가운데 장군의 용맹스런 모습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외적의 침입이 있어 금새 전장터로 달려나갈 것만 같은,.. 전장에서 종횡무진 외적을 물리쳤던 장군을 보는 듯 하다. 

   [인헌공 강감찬 장군 약전]

 

   인헌공 강감찬 (서기 948-1031) 장군은 우리 오천년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 중의 한 분이다.

 

   장군은 고려 정종 3년 봉천동에서 삼한벽상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장군은 문과에 장원 급제 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중까지 지냈으나 학자로서보다는 무인으로서 재량을 발휘하였고, 저서로는 <구선집>, <낙도교거집>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당시 고려는 친송배요 정책 때문에 요나라(거란)의 침입이 잦았는데 특히 현종 원년(1010)에 거란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그 때 조정에서는 굴복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장군은 홀로 항전을 주장하면서 전략상 일시적인 후퇴와 설득을 통하여 적을 물러나게 하여 크게 국위를 떨쳤다.

 

   당시 현종 9년 거란 10만 대군이 침입하자 장군은 상원수가 되어 흥화진에서 정예 기병 1만 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시킨 뒤 적을 앞 뒤로 공격하여 도망하는 적을 귀주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간 자가 수천에 불과하였다. 이 싸움이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이 승리는 거란의 야망을 꺾어버리고 동북아시아 3국의 평화적인 관계를 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장군의 업적은 당시부터 추앙받아 왔으며 민족의 영웅으로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동상 아래 약전>

 

   주변에 서울대와 서울특별시과학전시관, 물놀이체험관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 나들이 하면서 장군에 관한 이야기 한 번 기억해 봄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