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경복궁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로 사적 제117호이다.
올 초에 제법 눈이 많이 내렸다. 차가워진 손을 가랑이 사이에 넣어가며 하얗게 쌓인 고궁의 풍경을 담아 보았다. 분명 차가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가느다란 깃발의 선두는 궁궐 안내자의 뒤를 따라다니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연신 귀기울이던 외국인들, 그들이 눌러대는 뷰파인더의 제목은 아마도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고궁'일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돌아가겠지만 그들의 나라에 가면 하나하나 사진을 짚어가며 이웃 사람들에게 우쭐대는 마음으로 또 다른 안내자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경복궁은 서울의 밖같쪽 네개의 산인 아차산(동), 덕양산(서), 관악산(남), 북한산(북)이 넓게 감싸고, 안쪽 네개의 산으로 동쪽의 타락(낙산), 서쪽의 인왕, 안산인 남쪽의 목멱(남산), 주산인 북쪽의 백악이 감싸안은 곳으로 그 너른 품의 넉넉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은 이곳 서울의 중심인 백악산 남쪽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있다.
[흥례문 앞 수문장 교대식]
1394년(태조3) 8월, 태조는 무악을 살펴보고 돌아오는 길에 옛 고려의이궁이 있는 남경, 즉 한양의 옛 행궁에 무물면서 그 곳을 새로운 수도의 터로 내정하고 개경으로 돌아와 '신도궁궐조성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 궁궐 조성의 임무를 맡게 하였다.
[근정문 앞 금천 위에 놓인 영제교]
[근정문]
[국보 제223호 근정전 :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를 거행하던 곳]
그해 10월 25일, 한양으로 도읍을 결정한 태조는 종묘와 궁궐의 위치만을 정한 채 개경을 떠나 28일에 한양에 도착해 한양부 객사를 이궁으로 삼아 정무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궁궐 조성도 촉진되어 이듬해인 1395년 9월 25일에는 대체적인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조선 왕조 최초의 궁궐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이다.
[경회루 앞의 수정전]
[눈길을 쓸고 있는 고궁의 직원]
궁궐이 완성되었으니 그 이름이 없을 수 없었다.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는 뜻을 지닌 '경복궁'이란 명칭은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것이다. '경복'은 <시경> 대아의 [기취]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에서 따온 말이다.
[국보 제224호 경회루 :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
준공 당시 경복궁의 규모는 내전 영역 173칸, 외전 영역 192칸, 궐내각사와 회랑 등 기타 건물 390칸을 합하여 전체 755칸이었다.
그 후 조선 왕조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겪는 등 정정의 불안으로 개경 천도와 한성 환도를 거듭하는 바람에 경복궁은 10여년 동안 사실상 제구실을 하지못한 채 비어 있었다. 그러다가 태종이 창덕궁을 세워 한성으로 환도하면서 부왕인 태조가 영건한 경복궁을 버려둘 수 없다 하여 수리를 명하면서 다시 궁궐의 면모를 찾기 시작했다.
[경회루의 주변 길]
태종은 즉위 11년(1411)에 명당수를 금천으로 끌어들이고 주위를 아름답게 꾸몄으며, 이듬해에는 경회루를 지었다. 그리하여 태종때에 비로소 법궁인 경복궁과 이궁인 창덕궁을 오가며 정사를 보는 양궐체제가 이루어진다.
[함화당의 영지문]
경복궁이 실질적으로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이다. 세종은 1421년(세종3) 이후부터 경복궁에 자주 이어하면서 궁궐을 수리하고, 1426년(세종8)에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궁궐의 문과 다리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홍례문(지금의 흥례문).광화문.일화문.월화문.건춘문.영추문.영제교 등 이때에 지어진 이름에는 유교적 이상주의가 내포돼 있다.
[함화당 넘어 국립민속박물관]
또한 세종은 동궁인 자선당을 창건하고 근정전과 건춘문, 강녕전을 수리하였으며, 경회루와 사정전을 중수하고 북문을 신설하여 궁성의 4문 체재를 완성하였다. 이로써 궁전과 행랑으로만 이루어졌던 초기의
경복궁은 창건 30여 년이 지나 비로소 궁성과 궐문까지 갖춘 완비된 궁궐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경복궁은 중종 38년(1543) 동궁의 화재와 명종 8년(1553)의 큰 화재로 강녕전과 사정전, 흠경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지속적인 증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발전해 갔다.
[향원정]
16세기까지 꾸준히 중수와 신축을 거듭해 온 경복궁은 선조 25년(1592)에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돌이킬 수 없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 선조에 의해 구체적인 경복궁 중건 계획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전란으로 인한 재정 부족과 경복궁터가 길하지 않다는 풍수적 믿음으로 인해 실행이 무산되고 이때 마련한 재료는 창덕궁을 복구하는데 쓰였다.
[함화당 출입문]
[함화당]
그 후 경복궁은 무려 273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다가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의 의중에 크게 반영된 대왕대비 조씨의 중건 교서가 내려짐으로써 본격적인 복원논의가 이루어진다.
[보물 제847호 풍기대 : 조선시대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했던 것]
[자경전의 건물]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경복궁 재건공사는 고종 5년(1868)에 마무리 되었다. 이때 모습을 드러낸 경복궁의 규모는 태조 때보다도 장대했다고 한다.
[보물 제811호 아미산굴뚝 :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
경복궁의 주요 건축물로는 정문인 광화문, 동문인 건춘문, 서문인 영추문, 북문인 신무문과 광화문을 들어서면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강녕전, 교태전, 함화당, 집경당, 향원정이 있고, 근정전 동쪽의 융문루 밖으로 동궁영역, 뒤로 자경전, 국립민속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으며, 근정문 서쪽의 융무루 밖으로 문화재연구소, 수정전 그 뒤로 경회루와 하향정 등의 건축물이 있다.
[교태전 : 왕비의 침전]
[강녕전 : 왕의 침전]
[만춘전]
그 동안 광화문의 위치 선정이 잘못 되었다는 지적에 따라 올 해에 새로운 모습으로 광화문이 이전 복원되었다. 경복궁에 대한 설명은 '답사여행길잡이' <서울>에서 옮겨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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