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비릉
수로왕비릉은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위치한 사적 제74호이다.
김해시내 북단에 위치한 이 곳은 가락국[금관가야] 수로왕비의 능으로 전해지고 있다.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미터 지점에는 구산동고분군이 있다.
[정문 앞 안내문]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된 것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미터, 높이 5미터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는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 이라 새겨져 있다.
[왕비릉과 파사각]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전문, 고직사 등의 건물이 있다.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각이 있다. 파사각의 내부에 파사석탑이 있는데,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에서 옮겨온 것이라 한다.
[파사석탑을 모셔둔 파사각]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안내문>
[파사석탑]
허황후께서 인도에서 오실 때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
[파사석탑]
붉은 색을 띠고 있는 돌의 형질이 특이하다. 이 돌을 갈아서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풍설의 원인 때문인지 마모가 심해졌다고 한다.
[파사각]
가락국보주황후는 아들 10남 2녀를 낳으셨는데, 시조왕께서는 허태후가 멀리 아유타국에서 오셔서 일가친척 없는 까닭에 항상 외로워하시는 것을 가엾게 여기시고 맏아드님은 왕위에 오르게 하시고 두아들을 외가성을 따라 허씨로 삼았다.
그 후 이르러 가락국사직이 끊기니 사방으로 분거하였다가 그 거주지에 따라 양천, 하양, 김해, 태인, 함창 등 오관으로 나뉘었다.
[왕비릉 전경]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의 비문. 시조 할머니를 생각하며 참배를 하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왕비릉의 우측 담장 '구지문'을 지나면 구지봉 정상이다. 그 오랜 옛날 수로왕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던 곳으로, 이 곳에서 촌장들과 백성들이 모여 땅을 치고 발을 굴러 '구지가'를 부르며 우리의 왕을 달라고 기원하였던 곳이다. 우리에게 많이 익수해져 있는 '구지가'이다.
거북아 거북아
목을 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 김해김씨안경공파세보에 기록된 내용이다.>>
하늘이 대왕을 보내심
후한의 시조인 광무황제 건무 18년 임인(서기 42년) 3월 상사일에, 그들이 사는 곳에서 북쪽이 되는 구지(이 것은 산의 봉우리를 일컬은 바로서 10붕의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으므로 이르는 것이다.)에서 수상한 소리가 있어 사람을 불렀다. 9간들과 마을사람 2,3백인이 이 곳에 모이었다.
사람의 음성이 나는 듯 했으나, 그 형상은 볼이지 않고, 그 음성만 내었다.
<여기 누구가 있느냐?>고 하였다.
구간들은 대답하기를
<저희들이 있습니다.>고 하였다.
또 가로되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또 대답하기를
<구지로소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되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건립하여 임금이 되라고 하시기에 하강했느니라.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 마루를 파고, 흙을 집으면서 노래를 하되, '신이여 신이여, 마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을 것 같으면, 굽고 구워 먹으리라'하고 춤을 추어라. 이렇게 함은, 곧 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는 너희들의 즐거운 춤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구간들은 그 말씀대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얼마후 하늘을 쳐다보니, 자주빛깔의 밧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는 것이었다. 그 밧줄 끝을 찾아보니, 분홍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있었다.
금합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황금색 알이 여섯개가 있었는데, 태양같이 둥글었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백번 절을 하였다. 조금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 아도간의 집으로 안고와서 탁자 위에 모셔두고, 여러 사람은 모두 흩어져 갔다.
그 이튿날 아침에, 여러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금합을 여니, 여섯 알은 모두 어린 동자로 화신했는데, 그 용모가 매우 거룩하여, 이내 평상에서 좌정하셨다. 여러 사람은 모두 절하고 경하하면서, 극진히 공경하였다.
[구지봉 정상의 고인돌]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 돌을 쌓거나 돌판으로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로 큰 돌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구지봉 정상부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규모는 240*210*100cm로 작은편 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안내문>
[구지봉 정상]
구지봉 정상에 표지석 같기도 한데, 아무런 글씨며 내역이 없다. 정상에 구지가의 주인공이었을 6개 알 모양의 조형물이 있다고 하나 여전히 확인할 길이 없었다.
[구지봉에서 본 주변 전경]
왕후릉의 동쪽 100미터 지점에 구산동고분군이 발굴중이라는 것으로 보아 저 높은 곳의 언덕을 말함이겠다. 저 곳으로 이동을 해 보니 주변으로 중장비와 흙더미가 널브러져 있다.
[구지봉에서 내려다 본 왕비릉의 전각들]
왕비릉과 구지봉을 연결해 주는 구릉에는 터널이 뚫려 새로운 길이 형성되어 있다.
[아유타국 왕손부부 기념수]
1999년에 아유타국의 왕손부부의 방한이 있었던 듯 싶다. 릉의 앞쪽으로 파사석탑 아래로 여러 그루의 기념수가 자리하고 있다.
[인도 페자바드시장 기념식수]
[숭보재]
[파사각 아래의 기념수]
[수로왕비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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