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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고양(12) - 행주산성

by 포리시스 2010. 10. 23.

   행주산성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내동에 위치한 해발 124.8m의 덕양산 능선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사적 제56호 이다.

 

   성벽은 흙을 쌓아 만든 토성으로 길이는 약 1km에 달한다고 한다. 성의 남쪽에는 한강이 인접해 있고 동남쪽으로 창릉천이 흘러 한강으로 유입되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해 주었다고 한다. 

 

   대첩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의 샛길을 따라 내려가면 <충훈정>이다. 국궁장으로 지난 행주문화제 때 많은 궁사들이 활쏘기의 경연을 벌였던 곳이다.

 

[충훈정에서의 국궁 대회]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도원수 권율장군 동상이 있다.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는 곳으로 동상 주위로 행주대첩 당시 관군, 의병, 승군, 여성들의 치열했던 당시 전투상상도가 벽화되어 있다.

 

[도원수 권율 동상]

 

 

   행주산성은 오랜 시간 아이들에게는 역사 체험장으로, 시민들에게는 휴식공간으로 자리해 왔다.

 

   퇴각하던 왜군은 명나라 군대와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를 하고 사기 또한 충천해 있었다 하나, 한양을 되찿기 위해 한강을 건너 선점하였던 권율의 부대가 이 작은 산에 진을 치자 왜군은 3만으로 이 곳을 에워쌓았다.

 

[관군]

 

   임진왜란 3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 김시민의 진주대첩, 그리고 권율의 행주대첩이다.

 

   선조 26년(1593) 2월 12일 이 곳에서 관군. 의병. 승병이 모두 일치단결하여 싸운다. 왜군의 10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던 2,800여 병력이 하루 9차례에 걸친 공방전이 펼쳐지는 가운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한다.

 

 

[의병]

 

   결국 왜군은 퇴각을 하였고, 권율이 이끄는 병사들은 이들을 뒤쫓아 무려 150여 왜군을 더 살상했다고 하니 당시 얼마나 우리의 한이 컸던 전투였던지 가름할 수 있겠다.

 

[승군]

 

   당시 의병장은 김천일, 승병장은 처영이 관군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여성]

 

   성내에 있던 아녀자들은 입고 있던 치마 위에 짧은 덧치마를 대어 적군들에게 던질 돌은 운반하여 행주치마의 유래가 되었다고 하나, 중종 12년 최세진의 사성통해에 의하면 이미 임진왜란 전부터 행주치마라는 단어가 존재 했었다고 하니 아이러니 하다. 어찌되었거나 행주치마의 유래에 관한 이야기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

 

   200여미터 정상으로 오르다 보면 우측에 충장사가 있다. 권율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충장사 외삼문]

 

   충장사는 권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원래는 행주 나루터 안마을에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행주기공사가 있었으나 6.25사변 때 소실되어 1970년 행주산성 정화공사 때 이 곳에 충장사를 다시 지었다. 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 콘크리트 건물이다.

 

[충장사 전경]

 

    충장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휘호이며 사당 안에 봉안된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현장 안내문> 사당의 아랫 뜰에는 양편에 제법 커다란 배롱나무(백일홍)가 자라고 있다.

 

   사당의 윗쪽으로 대첩기념관이 있다. 원 길로 가면 200여미터 가량 되지만 사당의 바로 윗쪽에 있다. 예전에는 이 곳을 무기창고로 사용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기념관 내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용되었던 여러 형태의 무기류와 토성을 발굴 조사하면서 출토되었던 유물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첩기념관 내 화차]

 

   행주대첩에 사용되었던 화차는 우리 군이 왜군의 조총과 맞설 수 있었던 유일의 신무기였다. 조총의 사거리 보다 멀리 또 한 번에 화살을 100여 발 이나 쏠 수 있었던 화차에 신기전이 가세하여 200여발을 동시에 쏘아댔다고 하니 당시에는 최첨단 무기였다 하겠다.

 

[질려포통]

 

   나무를 깎아서 만든 둥근 통 속에 화약, 철 파편, 쑥 등을 넣어 사용하였다던 질려포통.

 

   철 파편은 동물. 사람을 상하게 만들고, 쑥 잎은 독한 연기를 발생시켜서 화생방 공격도 가능했고, 심지 길이를 조절할 수 있어서 시한폭탄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다음 그림은 권율 장군이 지휘했던 기념관내 전투도이다.

 

[행주대첩도]

 

[오산 독산성 싸움도]

 

   독산성 싸움에서 쌀로 말을 씻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산성에 물이 부족하다는 걸 안 왜군은 한 달여 간 성 밖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권율 장군은 쌀을 말 등에 부어 말을 씻기고, 이를 본 왜군은 장군의 병법에 속아 퇴각하였다고 한다. 그 후 왕은 이 곳에 세마정이라는 정자를 짓도록 하였고 지금까지도 전한다고 한다.

 

[금산의 이치대첩도]

 

   임진왜란 초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이 독산성전투이치전투에서 승전한 장군은 전라도 순찰사로 승진한다.

  

[진강정 오르는 길에 방화대교 풍경]

 

   대첩기념관에서 정상 방면으로 100여미터 지점에 진강정덕양정의 갈림길이다. 이 곳에서 보는 한강의 경치가 제법 운치 있다. 앞의 다리는 방화대교이다. 자유로에서 시작하는 인천공항전용도로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아직 한 번도 저 다리를 통해서 인천공항으로 가보지 못했지만, 만원가량 통행료를 지불하면 공항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진강정]

 

   갈림길의 동남쪽 산 기슭 아래에 위치한 정자이다. 어느 시기에 건축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진강정의 현판도 현대의 서체 마냥 간결한 글씨체이다.

 

[덕양정]

 

   이 정자 또한 어느시기에 건축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정비사업 때 건축물일거라는 생각 밖에는,..

 

 

[대첩비와 대첩비각]

 

    행주대첩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 이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로서, 1기는 선조 35년(1602)에, 또 한 기는 헌종 11년(1845)에 세운 것이다.

 

   덕양산 정상에 세워졌던 비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는데 오래 되어 글씨가 닳아 없어져 알아보기 어렵다.

 

   헌종 때 다시 세운 비는 그 이전에 세운 비의 비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헌종에 다시 세운 비 옆에는 1970년 건립된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가 있다.<안내문>

 

[정상에서 내려다 본 자유로]

 

   시원스레 쭉 뻗은 자유로에 오가는 차량도 많다. 시원한 한강변으로 습지를 관찰할 수 있는 자전거 전용도로(?)가 꼬불꼬불 펼쳐져 있고, 자유로와 맞닿은 강변북로의 좌측으로 새로 생길 이름없는 전철역과 그 앞으로 노을공원, 더 옆으로 남산의 타워가 보인다.

 

[선조때 세워진 대첩비]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비문의 글씨가 보인다며 유치원생들에게 설명하자 '글씨가 보이는데 한자라서 잘 알 수 없다며,..'

 

   어린 아이의 마음이 참 순진하다. 근데 아무리 보아도,... 마음이 맑지 못함이겠다. ㅋㅋ

 

[대첩비각]

 

[동북쪽 성벽]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에 서쪽 능선을 따라 흙은 쌓아 만든 성벽이다. 동쪽과 남쪽은 강과 만나는 지점이고 절벽을 이루어 굳이 성벽이 필요 없겠다.

  

[북서쪽 성벽]

 

   많은 사람들이 이 산성을 찾는다. 산성의 주변의 나룻터 쪽으로는 오래전부터 맛집이 빼곡히 모여 있다.

아마도 이 맛집들은 산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맛거리를 제공하려 생겼을지도 모를일이다. 가족 단위로 연인들이 이 곳을 많이들 찾는다. 나도 몇 번 가 본 적이 있다.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연인들끼리 많이들 찾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