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神勒寺)
신륵사는 경기도 여주군 여주은 천송리 282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나옹화상열반성지로 알려진 곳이다.
[신륵사 일주문]
예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범종각]
어느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 법고, 목어가 함께 있는 범종각]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 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사당 : 보물 제180호]
그러나 이는 이 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륵사 원구형석조부도(경기 문화재자료 제134호), 팔각원당형석조부도(경기 유형문화재 제 195호)]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馬岩)이란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 보물 제229호]
또 하나는 고려 고종(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印塘大師)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神力)의 신 "神"과 제압의 뜻인 륵 "勒"을 합쳐 "신륵사(神勒寺)"라 하였다는 것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 보물 제228호]
조선 초기 학승(學僧)인 신미(信眉)의 제자였던 김수온(金守溫)은 "여주는 국토의 상류에 위치하여 산이 맑고 물이 아름다워 낙토(樂土)라 불리었는데 신륵사가 이 형승(形勝)의 복판에 있다."고 칭송하였다. 이렇듯 풍광이 뛰어난 곳에 위치한 신륵사는 남한강 상류인 여강(驪江)의 물이 감싸않은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고찰이다.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앞 석등 : 보물 제231호]
일반적으로 많은 사찰들이 깊숙한 산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해 신륵사는 푸른 물줄기와 드넓은 모랫벌, 그리고 넓은 들판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적묵당 측면]
신륵사는 창건 이래로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화상(懶翁和尙)과 같은 고승대덕이 지냈던 곳이며 더불어 그 경관이 뛰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조선 후기 무인 김병기(金炳冀)는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극락보전 앞 다층석탑 : 보물 제225호]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 강가에 있으므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석탑의 하부 기단의 구름과 용무늬]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서로하가 생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裨補)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극락보전(경기 유형문화재 제128호) 터 : 2009년 해체보수하여 2011년 3월부터 11월까지 복원 예정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다층전탑 : 보물 제226호]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을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예스러워 목은(牧隱)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써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대장각기비각]
[대장각기비 : 보물 제230호]
신륵사 중수기는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글이다.
[신륵사 삼층석탑 : 경기 문화재자료 제133호]
이와 같이 신륵사와 여주의 뛰어난 경관이 전국에 알려진지 천 년이나 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주와 신륵사의 아름다움은 한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월헌 : 보제존자 나옹화상의 다비장소(화장터)로 나옹화상의 다비를 기념하여 세운 삼층석탑과 맞붙어 있는데, 1972년 홍수로 옛 건물이 떠내려간 이후 지금의 자리에 철근과 콘크리트로 1974년 재건축한 것이다.]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덟 가지를 들어 여주팔경(驪州八景)으로 일컥으며, 그 첫 번째가 바로 신륵사이니, 신륵사는 수승한 경관과 오랜 역사로 인하여 여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겨온 곳임을 알 수 있다. <펌>
[사찰 전경 : 우측의 비각은 김병기 공덕비]
신륵사는 사찰 전체가 정말 문화재투성이다. 앞으로 남한강의 푸른 물결이 유유히 흐르고 넓게 펼쳐진 경치가 여느 사찰에서 느낄 수 없는 너그러움과 시원함을 느끼게 해 준다.
[구룡루]
힘들여 높은 곳으로 오르지 않아도 평탄한 걸음으로 평범하게 공원을 나들이하듯 사찰을 관람할 수 있다. 이 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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