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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여주(2) - 영릉

by 포리시스 2011. 3. 28.

   영릉[英陵]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번지에 위치한 조선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의 합장릉으로 사적 제195이다.

 

 

[매표소 앞 안내도] 

 

   세종대왕은 1418년 왕위에 올라 1450년 승하(昇遐)하니 재위(在位) 32년에 춘추가 54세였다.

 

   세종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훈민정음 :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록)을 창제하고 측우기(測雨器), 혼천의(渾天儀), 해시계 등 과학기구를 발명하고 제작하였다.

 

 

[훈민문] 

 

   아악(雅樂)을 정립하고 북방의 야인(野人)을 정벌하고 4군(四郡)과 6진(六鎭)을 개설하여 우리나라의 국경선을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정하였으며, 일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금천교와 홍살문] 

 

   <금천교 : 능 앞으로 흐르는 개울을 높이 일컬어 어구 또는 금천이라 하고 여기에 놓인 다리를 금천교라 한다. 금천교는 주로 능역의 수계가 맞닿는 홍살문 앞에 설치한다.

 

   금천교는 그 안쪽이 바깥쪽과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 즉 임금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풍수지리설의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세)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물은 산으로부터 흘러온 땅의 기운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금천교는 1930년대까지는 남아 있었으나 그 후 훼손되어 없어진 것을 발굴하여 2008년 5월 복원한 것이다.>

 

[묘역 주변 전각]

 

   학문을 숭상하여 학자를 기르고 활자를 개량하여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부처의 공덕을 칭송한 노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조선의 창업을 찬양한 노래), 농사직설(農事直說 : 농업기술을 모은 책),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 윤리덕행을 찬양한 책), 팔도지리지(八道地理誌 : 한국의 지리책), 석보상절(釋譜詳節 : 석가의 일대기), 의방유취(醫方類聚 : 의학백과사전) 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백성을 사랑하였으며, 어진 성덕(聖德)이 하늘같이 높았다.

 

[정자각]

 

   <정자각 : 제례때 제물을 진설(차림)하고 제례를 드리던 집이다. 위에서 보면 건물이 " T " 자 모양을 하고 있어 한자의 " 丁 " 자와 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동쪽과 서쪽에 오르는 층계가 있는데 이는 원래 제례의식이 동입서출(동쪽으로 진입하여 서족으로 내려옴)로 진행됨을 의미한다. 뒷벽의 중앙칸에 달린 문짝은 제례를 드릴 때 열어놓게 되어 있으며 뒤편 서쪽에는 제문을 태우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묘역 주변의 문인석과 석상들]

 

   영릉은 원래 서울 헌릉 서쪽에 있었던 것을 예종 원년(1469)에 여주로 옮겨왔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숭모하고 그 위업을 오늘에 이어 받아 민족문화 창조의 기틀로 삼고자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세종전을 새로 짓고 경역(境域)을 정비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릉 앞의 장명등]

 

   <능침 앞의 장명등. 이 등은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다고 한다. 일부 묘역에서는 곡장이 능침보다 위로 솟아 갇힌듯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는데, 곡장이 현저히 아래로 시설되어 있어 느낌이 시원스럽다.

 

   묘역 동쪽의 계단으로 오르면 일반 내방객들도 대왕의 능침 주변을 직접 관람할 수 있다. 동구릉의 경우에는 묘역으로의 진입을 금하는 표시가 있어 어색하였던 반면 이 곳에서는 다소 평안한 마음도 든다. 얼추 환갑에 가까워 보이는 몇몇의 관람객이 묘역 주변을 돌아보며 나즈막히 대왕의 이야기를 꺼내고, 저 아래로 정자각을 돌아드는 사람들, 홍살문을 통과한 가족과 여인들,..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는다.>

 

[재실]

 

   <재실 : 홍살문 밖, 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 제관이 머물며 제례를 준비하던 집이다. 국장 후 탈상때까지 대군 등 자손과 문무백관이 매년 제례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 제례를 준비하던 집이다. 이 재실은 영릉 안산(능 앞에 있는 산)인 북성산 동남쪽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후에 없어진 것을 1970년 이곳에 복원하였다.>

 

[수복방]

 

   <수복방 : 제기를 보관하거나 수릉관(능릉 지키는 관리) 또는 수복(청소하는 일을 맡아보던 일종의 관노비)이 거처하던 곳이다. 터만 남아있던 것을 발굴하여 1977년에 복원하였다.>

 

[영릉비각]

 

   <영릉비 : 세종대왕릉은 원래 헌릉(지금의 서울 내곡동) 서쪽 산줄기에 있었는데 예종 원년(1469)에 이곳으로 천장하였으며, 왕비 소헌왕후가 합장되어 있다.

 

   영릉비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약력, 그리고 영릉을 옮긴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영조 21년(1745)에 세웠고, 비각도 이때에 건조되었다.

 

   비문에는 "조선국 세종대왕 영릉 소헌왕후 부좌"라고 새겨 왕비가 대왕의 왼편에 묻혔음을 기록하고 있다.>

 

[예감]

 

   <예감 : 정자각 뒤의 서쪽에 있는 사각형의 석함으로 제례가 끝난 뒤 철상(제례 음식을 치움) 하면서 축문을 여기에 태워 묻었다.>

 

[수라간]

 

   <수라간 : 산릉제례때 제례음식을 데우고 준비하던 곳이다. 주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1977년에 옛 모습을 찾아 복원하였고 한다.>

 

[세종전]

 

   <세종전 : 매표소를 지나 좌측으로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개관한 단층 건물로 내부에는 세종대왕의 어진과 업적을 나타내는 그림들을 비롯하여 대왕이 편찬한 책, 어.축.박.편경.향비파 등의 악기와 당시 제작하고 정비했던 정남일구, 혼천의, 금속활자, 여러 총통류 등의 발명품, 훈민정음 언해본, 용비어천가 등의 서책류가 있다.

 

[현주일구]

 

   전시관 마당에는 해시계 등 대왕이 발명하거나 발전시킨 여러 가지 과학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물을 본따 만든 해시계인 앙부일구, 정교한 조각의 해시계 받침대인 일구대, 올라가 하늘을 관찰하는 관천대, 소리를 내어 시간을 알리도록 고안된 물시계인 자격루, 측우기, 혼천의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혼상]

 

   <혼상 : 하늘의 별들을 보이는 위치 그대로 둥근 구면에 표시한 천문기기. 하루에 한번씩 회전시켜 보면 별이 뜨고 지는 것을 알 수 있고, 계절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도 측정할 수 있다. 1439년(세종 19)에 제작된 것이 우리나라의 기록으로는 최초이다. 지름 71. 6cm인 구에 칠포를 입혀서 만들었다.

 

   그 후 세조 때 만든 것은 오랫동안 잘 사용되었으나 기계부분에 고장이 생겨서 1526년에 수리하여 내관상감에 보관되면서 두번째 혼상이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타 버렸다. 세번째는 1601년(선조 34)에 이항복의 감독하에 제작되었으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혼상은 2개인데, 하나는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의 소장품으로서 형태만 겨우 남아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지름 68.6cm로 경북 경주시 민속공예촌의 신라역사과학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측우기]

 

   <측우기(測雨器) : 측우기는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하여 세종 23년(1441)에 세계 최초로 발명한 우량계이다. 세종대왕은 땅속에 스며 든 빗물의 깊이를 자로 재어 강우량을 측정하던 종래의 불완전한 방법을 철로 주조한 원통형 우량계를 발명, 강우량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정확히 측정케 하였다.

 

   지방에서는 서울의 철제 측정기의 모형으로 자기나 와기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때의 작품들은 남아있지 않다.

 

   이 측우기는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금영측우기를 본뜨고 대석은 기상청에 보관중인 관상감 측우대를 본떠 제작한 것이다.>

 

 

   세종전의 맞은편에 같은 시대를 살지는 않았지만 우리들에게 친숙한 세종대왕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