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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고양(15) - 서삼릉

by 포리시스 2011. 5. 7.

   서삼릉(西三陵)

 

   서삼릉은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7-1번지에 위치한 능으로 사적 제200호 이다.

 

   이 곳에는 희릉, 효릉, 예릉 등 3기의 능이 있어 서삼릉이라고 부른다. 그 밖에 의령원, 효창원, 소경원, 태실 등이 있다.

 

[매표소 앞 서삼릉 관람 안내도]

 

   희릉(禧陵)

   조선 제11대 중종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장경왕후(1491 ~ 1515)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딸이다. 1506년에 중종의 후궁인 숙의로 책봉되었으나, 정비인 단경왕후(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자 150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에 세자인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인하여 경복궁 별전에서 승하하였다.

 

[홍살문 앞에서 본 희릉 전경]

 

   능제는 봉분에 병풍석이 없고 난간석만 두른 단릉으로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곡장이 둘려지고, 석양과 석호가 봉분을 호위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혼유석과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원 아래는 부속건물인 정자각,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 예감, 능 출입시 참배하는 곳인 배위, 표석, 홍살문 등이 있다.

 

[희릉 앞 정자각과 비각]

 

   효릉은 (비공개)

   조선 제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1515 ~ 1545, 재위 : 1544 ~ 1545)은 중종의 맏아들로 1520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창경궁 명정전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재위 9개월 만에 경복궁 소침에서 승하하였다.

 

[희릉 정자각의 잡상]

 

   생모 장경왕후가 7일만에 승하하여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으며,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도 깊고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하였다고 한다. 소생이 없어 이복동생인 명종이 대를 이었다. 인성왕후(1514 ~ 1577)는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이다. 152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예릉 상설도]

 

   1577년(선조 10)에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인종의 봉분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으나, 인성왕후 봉분에는 병풍석이 생략되어 간략하다. 능제는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한 동원쌍봉릉이다. 곡장이 둘려진 봉분 주위에는 석양, 석호 등이 호위하고 있고, 봉분 앞에는 상석, 혼유석, 망주석, 장명등, 문.무인석, 석마 등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 밖에서 본 예릉 전경]

 

   예릉(睿陵)

   조선 제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철종(1831 ~ 1863, 재위 : 1849 ~1863)은 장조(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이다.

 

[예릉의 정자각]

 

   1849년 헌종이 재위15년만에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인 대왕대비에 의하여 강화도 촌거로부터 영입되어 19세때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하였다. 재위 14년 동안 처음 3년간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였고, 그 뒤로 안동김씨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고, 1863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예릉의 비 - <조선국>이 아닌 <대한>이라는 국호가 새겨져 있다]

 

   철인왕후(1837 ~ 1878)는 영은부원군 김문근의 딸로 대왕대비에 의해 185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에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문화재청 출장소]

 

   의령원

   조선 영조의 아들 장조(사도세자)의 제1자 의소세손묘소이다. 의소세손(1750 ~ 1752)은 이름은 정이며, 3세의 어린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중앙여고 내)에 있었으나 1949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이다.

 

[의령원 전경]

 

   소경원은 (비공개)

   조선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묘소이다. 소현세자(1612 ~ 1645)는 인열왕후 한씨의 소생이다. 1625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세자빈은 민회빈 강씨이다. 세자는 정묘호란(1627년)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 민심을 수습하였고,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1637년 동생 봉림대군 및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비문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

 

   심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닌 조선을 대표하는 외교적 재량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친청적인 인물로 보여 세자로는 부적격자로 보였다.

 

[효창원(앞)과 의령원(뒤) 전경]

 

   소현세자는 서양문물에 심취하여 천주교 신부인 아담 샬 등과 친교를 맺고 그를 통하여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 등을 배우기도 하였다. 소현세자는 1645년 2월에 9년간의 인질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였으나 당시 조정에서는 반청친명정책으로 인해 박대 받았다.

 

[의령원, 효창원 앞의 전각과 신도비]

 

   그 해 4월 갑자기 병으로 눕게 되어 4일만에 급사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시신의 구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하여 독살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관람이 제한되어 있다.

 

[효창원 전경]

 

   효창원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 묘소이다. 문효세자(1782 ~ 1786)는 의빈 성씨의 소생으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나 5세의 어린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안내문>

 

[문효세자 효창묘 신도비]

 

   입장료는 대인 천원, 소인 오백원이다. 어린이 날이라 무료 입장했다. 신록의 푸르름 속에 여기저기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면서 한시간 가량 둘러봄직 하다. 한 낮의 기온이 제법 치솟았고, 정자각, 비각과 주변 나무의 그늘아래서 돗자리를 펴고 담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정겹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