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수경원터와 광혜원을 복원해 놓은 건물이 있다. 수경원은 고양시 서오릉으로 이장되었지만, 아직 정자각과 비각이 남아 있다.
이와 관련된 역사의 인물과 연혁을 안내문과 박물관의 기록으로 기록해 본다. 그리고 연세대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더우드관과 스팀슨관에 대해서도 옮겨본다.
[수경원(綬慶園)터와 광혜원(廣惠院)]
이 지역 일대는 옛날 수경원이 있던 자리이다. 수경원은 조선왕조 제21대 영조의 후궁인 영빈이씨의 원묘이었다.
영빈은 1남 6녀를 두었는데, 외아들이 바로 사도세자이다. 1969년에 수경원이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 터로 옮기고 봉분이 있던 자리에는 1974년 연세대학교(루스채플)를 세웠다.
영빈의 원묘를 옮긴 뒤에 3개의 석함에서 두 벌의 지석과 한 벌의 명기 및 영조가 어필로 쓴 의열묘 현판이 찾아져 현재 우리 대학 박물관 민속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수경원의 부속건물인 정자각과 비각은 뜰 안에 그대로 보존되어 이다. 한편, 이 목조한옥은 광혜원을 실체 크기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광혜원은 1885년 4월 10일에 개원된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자 연세학원의 연원이 되는 기관으로서, 우리 현세인의 의술발전을 꽃피운 산실이 되었다.
광혜원은 처음에 재동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사용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건물의 형적 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1985년 5월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마침내 1987년 4월 10일에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발상지를 보존하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정자각은 연세기록보존소, 광혜원은 연세사료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뜰 안은 박물관 야외 전시장으로서 석조예술의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이 곳은 연세의 뿌리를 확인하고 역사를 이어주며 보람찬 미래를 키우는 자랑스러운 연세의 소중한 공간이다. 2003년 10월 30일 연세대학교
[영조.영빈 그리고 사도세자]
영조는 앙실의 대를 이을 왕자의 탄생을 간절했던 상황에서 42세(영조 11년, 1735)에 영빈 사이에서 원자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나 영조가 심혈을 기울여 시행했던 탕평의 이상이 현실의 한계를 넘지 못한 채 사도세자와 대결국면으로 치닫게 되고, 결국 영조38년(1762) 임오화변의 참극으로 사도세자는 생을 마감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따르면, 영빈 이씨는 영조에게 직접 나아가 종사를 평안히 하기 위해, 사도세자에 대한 ‘대처분’을 내려달라고 청하였다 한다.
이로 인해 ‘아들을 버린 어머니’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당시 정치 상황에서 왕실의 혈통을 지켜내기 위한 고육책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뜨거운 윤5월 뒤주 안에서 8일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발인 날 아들의 관을 잡고 통곡하던 영빈 이씨는 “자식에게 못할 짓을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들을 일찍 앞세운 2년 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영빈 이씨의 바램과 같이 세손은 왕세자로 책봉되어 훗날 정조임금이 되었고 순조와 헌종에 이르기까지 혈통을 이어 나갔으니, 영조가 ‘대의’라 불렀던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실록 40년(1764) 9월 26일 사도세자의 일은 대의였음을 하교하다. 임금이 공묵합에서 세 대신을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임오년(1762)의 대의를 만약 통쾌하게 유시하지 않았더라면 윤리가 그때부터 폐지되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만고에도 없는 지경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가 만고에도 없는 의리를 행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으며, 세손 역시 어찌 오늘날이 있었겠는가? (...)
너의 조모가 백세에 의리를 세웠으니, 일거에 종사가 다시 존재하고 의리가 크게 밝혀졌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았을 겨우에는 조선이 어떻게 조선이 되었겠는가? (...)
내가 의열로 표시한 것은 너의 조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종사의 대의를 위한 것이다.
영조는 어린나이에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세손인 정조가 자신과 할머니 영빈 이씨를 이해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정조는 ‘의’가 담고 있는 차가움에 거부감을 가졌고 열 살 나이에 직접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은 ‘대의’라는 명분으로 잊기에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정조는 할머니 영빈 이씨의 궁호를 선희궁으로 바꾸었다.
정조실록 12년(1788) 12월 26일
금성위 박명원이 의열 영빈궁의 묘호에 관해 상소하자 이를 논의.확정하다.
“시호를 그대로 궁과 묘의 칭호로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경의말은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 이것은 전례에 관계된 일이므로 예조로 하여금 대신과 의논해서 품처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다. (...)
무술년에 이 일을 가지고 백관들에게 수의했을 적에 김종수 혼자만 다른 의견을 제기하였는데, 그의 생각은 ‘궁과 묘에 같은 칭호를 사용한 것은, 선대왕께서 시호를 내리신 성의가 이미 우연한 것이 아니었고,
비록 원으로 봉해주라는 유명이 계셨지만 오로지 시호 두 글자로써 원으로 봉하는 본의를 삼으셨고 보면 칭호를 고치는 것은 의리에 있어서도 옳지 않고 마음에 있어서도 차마할 수 없기 때문이다.’는 것이었다.
그가 건의한 뜻이 오로지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궁과 묘에 시호를 그대로 칭호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글자의 뜻을 생각할 때마다 내 마음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워지는데, 지금에 미쳐 칭호를 고치는 것이 실로 예에 합당한지 모르겠다.(...)
의열궁의 묘호를 선희로 의논해 정하였다. 의열궁의 칭호를 처음 정할 때에 대개 임오년의 일로 인하여 상(정조)이 매양 애통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언더우드관]
사적 제276호,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4년에 완공된 연면적 2,700㎡의 근대식 4층 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H. G.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관이라 하였다.
설립자의 장남 원한경(H. H. Underwood)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을 감독한 화학가 교수 밀러(E. H. Miller)가 맡았다.
당시 문화관이라 불리었으며 본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 현관문이 튜더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양식의 웅장한 석조건물이며,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이 건물 양쪽으로 인접하여 건물군이 ‘ㄷ’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1개 층의 탑옥이 솟아 있다.
[스팀슨관]
사적 제275호,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에서 1920년 9월에 완공된 연면적 1,150㎡의 근대식 2층 건물이다.
C. M.스팀슨이 건축비 2만5천 달러를 기부하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서 스팀슨관이라고 하였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자인 고 원두우의 미망인인 L. H. 언더우드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화학과 교수 밀러가 맡았으며, 당시 미국 건축가들이 한국에 와서 설계와 계획을 하였다.
이 건축물은 근처 산간에서 나오는 운모편암과 화강석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석조건물로서, 건축 양식은 준고딕 양식이며 튜더풍의 아치형 입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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