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기행(1)
<남한산성>은 경기 광주시 중부면에 위치한 사적 제74호 이다. 이웃 성남시를 경계하는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 연주봉(467.6m), 동쪽으로 망월봉(502m)과 벌봉(515m), 그리고 남쪽의 다수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길이 11.7km(본성 9km, 외성 2.71km)의 산성으로, 서울 도성의 길이(19km)보다는 짧다.
[남한산성 안내도 - 이해를 돕기 위해]
남한산성,... 인조 14년 청태종의 침공(병자호란)으로 임금이 이곳으로 피신하여 47일간 항전한 유서 깊은 곳이고, 난공불락의 요새라고도 하는 이 산성에서 끝내 식량이 떨어져 항복을 해야만 했던 치욕적인 일을 겪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 남문으로 오르는 길의 비석군]
아주 오래전에 성남으로 다닐 때 성의 남문을 몇 차례 통과한 것 외에 산성길은 처음으로 가 본다. 오늘의 산행은 고향의 친구들과 함께 했다. 오랫만에 만나는 의미를 산행으로 함께하자고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8시 반쯤 되니 '산성입구역'에 도착 했다.
[남한산성 남문 - 지화문]
약속시간에 모두 모여 산성으로 출발했다. 금새 도착한 행궁 앞 주차장에서 모두들 일찍 집을 나선 탓에 주변 음식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하기로 했다. 음식맛이 괜찮았다. 도중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즐빗하게 주변 자리를 차지했고, 사람들에게 뭔가 안내문을 나눠 주었다.
[지화문 문루에서 본 역사터]
우리에게도 한 부 건네며 관심이 없어도 한 번 읽어 보란다. 남사모(남한산성을사랑하는모임) 회원들이 모임을 하기 위해 자리한 거다. 작은 페이지의 안내문에는 금일 시산제를 할 계획도 있었는데, 마치 옆에 둔 음식들이 그것인가 보다. 남사모 회원들의 활동으로 이곳 문화재에 대한 많은 전파와 보존이 함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남문에서 서문 방향 성곽길]
겨울 산행에 있어서 늘 준비해야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이젠 이다. 챙겨 놓고도 못 가져와 내심 걱정을 했는데, 역시나 서너번 눈길에 넘어지면서 후회를 많이 했다. 남문쪽을 향했다. 이곳에 오기전에 블로그 검색을 통해 빠른 걸음으로 3~4시간 가량이면 성곽길을 완주 할 수 있다기에 우선 완주 목표를 세웠다.
[저 멀리 보이는 정자 - 현판은 없지만 영춘정일거다]
하지만 친구의 만류로 오늘은 성곽의 절반만 걷기로 했다. 사실 눈길이라 빠른 걸음이 어려웠고 늘 카미라 달고 다니니,.... 오늘은 남문을 출발해서 서문 그리고 수어장대를 거쳐 연주봉옹성 그리고 북문을 통해서 행궁을 관람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남문으로 오르는 길 우측으로 30여기의 비석을 모아 놓은 <비석군>이 있다. 역대 광주유수 및 수어사, 부윤, 군수의 비를 한 곳에 모아 둔 곳이다.
[보편적으로 성곽의 보존이 잘 된 듯 싶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예정지]
[남문(至和門)]은 성의 서남쪽 곡저부 해발 37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3년 성곽을 개보수 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으로 칭하였고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 이란다. 이곳의 문루에만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 있다고 했지만, 서문(左翼門)과 북문(全勝門)에도 현판이 있어 어떤 연유로 기록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춘정에서 바라본 서울의 모습]
남문 앞 역사터에는 수령이 380여 년이나 되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다. 네 그루의 느티나무는 성문을 차폐하거나 사람들의 왕래가 심한 이 지역이 경사가 심해 토양의 유실등을 막기 위해 심어졌을 거라는 내용이다. 문루에서 내려다 보니 정갈하게 다듬어진 작은 연못을 지닌 아담한 공원으로 여겨진다.
[성곽 - 참 많은 분들이 만들어 낸 예술품이라 여겨진다]
성곽길을 걸을때면 늘 느끼는 것이지만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걸작품이라 여긴다. 오랜시간 많은 인력이 투입되어 함께 만든 예술품,... 어떠한 표현도 모자랄 것 같다. 선조들이 만들어낸 우리의 많은 문화재를 오늘 만난 남사모의 마음처럼 정말 소중하게 보존하였으면 좋겠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주는 성곽길 - 성곽 내.외를 걸을 수 있다.]
성곽길을 따라 구불구불 오르내리며 고개를 오르니 현판이 없는 아담한 정자가 보인다. 아마도 <영춘정>이라 여겨 본다. 정자에 오르니 자욱한 운무속에 서울과 성남시가지가 내려다 보인다. 정자를 배경으로 친구들 몇 컷 담아주고 이내 비탈길을 내려가다 보니 성벽 아래로 작은 문이 보인다.
[서암문 - 정말 보물찿기라도 해야만 알 수 있겠다]
<서암문>이다. 이 암문은 성벽의 흐름 방향과 달리 입구가 북서쪽을 향하고 있어 외부에서 쉽게 관측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북동쪽의 성벽을 돌출하여 암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단다. 원성에 설치된 12개 암문의 외측 개구부는 대부분 홍예식이지만, 제2암문과 더불어 이 암문의 개구부는 평거식이라고 한다.
[청량당]
서암문에서 북쪽으로 봉우리에 <수어장대.청량당>이 있다. 이 두 건물을 둘러 외벽이 시설되어 있는데, 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청량당이고 계단을 올라야 수어장대다. 청량당 앞으로 경기 광주시 지정 제15호인 360년 된 향나무가 있다.
[경기 광주시 보호수 - 청량당 앞 향나무]
<청량당>은 성벽을 쌓을 때 억울하게 죽었던 축성담당자였다고 전해지는 이회장군을 위해 세운 사당으로 그의 두 부인과 실제로 성벽을 쌓았던 벽암대사(1575~1660)도 함께 모신 사당이다. 내부에는 이회장군과 두 부인, 벽암대사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원래의 것은 1950년에 불에 타서 새로 그렸다고 하는데, 문이 잠겨 확인할 수 없다.
[수어장대]
<수어장대>는 장수가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어졌다. 함께 지었던 5개의 장대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단다. 원래는 1층으로 지었던 것을 1751년 유수 이기진이 영조의 명령으로 2층으로 지은 후 외부편액(건물의 명칭)을 '수어장대'라 하고 내부 편액을 '무망루'라고 제작하여 설치하였다고 한다.
[수어장대 옆 무망루(현판) 보호각, 옆에는 이승만 대통령 기념식수 표지석]
수어장대의 우측편에 <무망루> 보호각이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증축한 수어장대 2층의 내편 문루로서 그 편액이 2층 누각에 있어 1989년 전각을 건립하고 이 안에 현판을 새로 설치하여 일반인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무망루 보호각 내부]
<무망루>는 병자호란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8년간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효종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가 이름지은 것이라고 한다. 보호각 옆에 <리대통령각하행차 기념식수> 기념표지석이 길게 세워져 있다.
[좌 - 구소삼각점 표지석, 우 - 안내문]
수어장대 좌측에는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7호인 <탁지부측량소 삼각점> 표지석이 있다. 대한제국 말기(1908~1910년초) 탁지부에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건국 이래 최초로 경기도와 경상북도의 일부 지역에 지적세부측량의 기준이 되는 삼각점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수어장대 남측 축대]
1910년 8월 경술국치 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일제히 삼각점을 설치하면서, 이와 구별하기 위하여 탁지부에서 설치한 삼각점을 <구소삼각점>이라 하였다. 이곳 경기도 남한산성 도립공원의 수어장대에 설치되어 있는 구소삼각점은 '장대' 라고도 불리며, 머리 부분에 "+" 가 새겨져 있고 모서리에는 "度支部" 라고 음각되어 있으며 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서북쪽에서 본 수어장대]
소재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815-1(지목:사적지)
위도 : 37˚ 20´ 37˝ 445
경도 : 127˚ 10´ 32˝ 180
해발고도 : 495.34m
[수어장대 북측 성벽]
이 구소삼각점은 전국에 10여 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적사적 측면에서 볼 때 매우 귀중한 유물로써, 삼각점으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눈이 쌓여 성곽의 윤곽이 더욱 돋보였다]
수어장대를 뒤로 하고 내려가다 보면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가 있다. 가공석이 아닌 자연석에 세겨진 것으로 이 비는 선조들의 건축실명제를 한 단면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란다.
[병암남성신수비 - 자연석이라 쉬이 구분이 어렵겠다]
정조 3년 6월 18일까지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비문에는 산성을 증 개축하는데 돈 1만 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다는 것과,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 등을 구어 운반하는 관리자와 보수영역을 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 등이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돌로 되어 있고 병암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성곽 내부의 산책길에서 본 서문]
북쪽으로 가는 성곽길에 높다란 문루는 서문(右翼門)이 있다. 성 안쪽으로 탐방로가 낮아 언듯 보면 출구가 없는 성벽위의 누대처럼 보인다. 성문 근접하여 축대를 쌓아 출구가 상당히 비좁아 보이고 높은 뚝을 쌓아 좁다란 호를 만들어 놓은 듯 대문 답지않게 갑갑한 느낌이 든다. 어쩌면 철옹성의 역할을 이 작은 문이 해 냈을지도 모른다.
[성곽 밖에서 본 서문(우익문)]
탐방을 하면서 특이한 점을 알게 되었다. 남문.서문.북문의 문루의 지붕이 그것인데, 전에 한옥을 기록을 들추어 보면서 성 문루의 지붕은 우진각지붕을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여태 여러 지붕의 형태보다 튼튼하기 때문이라고 한 것 같다. 하지만 남문.서문.북문을 둘러보면서 모든 지붕의 형태가 팔작지붕이라는 사실이다.
[국청사]
현재 한양 도성에 남아 있는 3대문(흥인지문,숭례문,숙정문) 문루의 지붕 형태도 우진각지붕이다. 어찌되었건 동문(좌익문)도 그럴 거라는 생각으로 다음에 확인해 보아야 겠다.
[국청사 삼신각 - 그외 대웅전과 천불전이 있는 아담한 사찰이다]
서문에서 행궁으로 내려가는 곳의 산기슭에 사찰 <국청사>가 있다. 인조 3년(1625) 각성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사찰에 모셔진 삼존불은 신라 헌안왕 3년(서기 859) 강원도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조성 봉안 하였던 천불 중 서기 1393년 심원사 화재와 임진왜란 때 소실 도난 되었던바 그중 삼존불 중 한분만이 국청사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성 내에서 본 서문]
서문에서 북쪽으로 성벽을 따라가면 <제5암문 - 연주봉옹성 암문>이 있다. 이 곳은 연주봉옹성으로 연결된 통로로 서쪽에는 성벽에서 2m 정도 돌출된 치가 있고 그 북쪽으로 직선길이 150m 정도의 연주봉옹성이 연결된다. 암문 개구부 외부는 홍예식이고 내부는 평거식 이다. 통로의 길이는 5m 정도로 천장은 장대석 5매로 덮여 있단다.
[연주봉옹성 암문]
<연주봉옹성>은 제5암문에서 연주봉까지 능선에 좁고 길게 쌓은 외성이다. 본성 보다는 성곽 전체가 좀 낮은데 새로 쌓은 흔적에서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연주봉의 능선을 방어하기 위한 재치가 돋보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남쪽으로 세개의 옹성과 동쪽의 장경사신지옹성이 있는데 같은 맥락일 거다.
[연주봉옹성]
동쪽으로 북문과의 사이에 <북장대터>가 명시되어 있지만 암시하는 건축물이 없어 알 수 없고 그곳에 소나무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산성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내력을 음미하며 걷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누각의 지붕이 보인다. 아마도 위치상 북문일 거다.
[북장대 터일거다]
[북문(全勝門)] ,..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곳이라고 한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전승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륜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의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고,..
[북문 - 북장대에서 동쪽의 내리막 능선에 있다]
정조 3년 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 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에 신축된 성문일거라는 안내문의 내용이다.
[성 내에서 본 북문]
성곽을 둘러 보면서 시간도 제법 흘렀다. 북문길을 따라 내려오며 오늘의 여정을 마치기로 했다. 북한산성.화성에도 행궁이 있는 것처럼 이 곳에도 행궁이 있다. 우리나라 행궁 중 종묘(좌전)와 사직(우실)을 두고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데,.. 다음에 관람하기로 한다.
[성곽 밖에서 본 북문(전승문)]
기록을 보니 구한말 의병의 근거지였던 이 곳을 왜놈들은 폐허가 되다시피 파괴해 놓았다. 주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벽에 걸려 있던 오래된 사진을 두 점을 보았다. 주인장께서 각각 100여년과 115년 전의 사진이라는 설명과 행궁의 위치를 알려 주며 남문과 서문 사이의 길이 당시 주 도로였다는 설명도 겉들여 주었다. 지금의 위치와 확연히 달라 잘 구별지을 수 없지만 서너컷 담아 왔다.
[어느 식당에서 본 115년전의 남한산성 행궁 주변 풍경 사진]
많은 왜침에서도 굳굳하게 지켜온 우리 선조들이 건네준 이 강산,.. 전란마다 우리의 소중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탈취되었다. 왜침을 받지 않고 보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 참 중요할 것 같다. <남사모> 회원님들처럼 이 산성을 보존하려는 지킴이의 마음가짐과 그들의 노력이 더욱 더 빛을 발해 주기를 기원하면서,...
[100년 전 행궁 주변 풍경]
다음에 발걸음을 할 때에는 북문에서 동문을 거쳐 남문,.. 그리고 행궁과 주변 문화재를 소개하고 싶다. 함께 해 준 벗들의 사진을 함께 올리지 못해 정말 미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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