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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인천 강화 #갑곶돈대(甲串墩臺) #사적 제306호 #삼충사적비 #자연보호 금표 #이섭정 #갑곶리 탱자나무 #천연기념물 제78호

by 포리시스 2013. 4. 10.

 

 

<갑곶돈대>는 인천광역시 광화군.읍 갑곶리 100에 위치한 사적 제 306호이다. 김포에서 연결되는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바로 좌측의 해안가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갑곶돈대 매표소

 

서울의 주요 방어기지인 동시에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왕실이 피난하는 제일의 후보지였다. 안내문을 기준으로 글을 적어 본다.

 

안내도

 

<돈대> 

돈대의 의미는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춘 바위시설로 정의하는데, 해안가의 높은 곳에 축성 방식으로 작은 성곽을 만들고 포의 발사를 위해 시설한 곳으로 이해하면 쉬울 듯 싶다.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

 

<갑곶돈대의 유래> 이 돈대는 1231년(고려 고종 18) 이후 수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이 이 곳으로 건너지 못하고 발만 구르다 되돌아간 곳으로,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

 

당시 몽골군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을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다 하여 그 이름을 갑옷 갑(甲), 꿸 곶(串) 자를 넣어 지었다고 전한단다.

 

#금표 -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비

 

병자호란 이후로는 청의 침공에 대비하여 성곽과 진, 보, 돈 등의 군사시설을 강화하였는데 숙종 5년(1679)에 갑곶돈을 비롯하여 염주돈, 제승돈, 망해돈을 이 곳에 소속시키고 갑곶포대를 설치하여 대포 8문을 두었다.

 

비석군

 

이 돈대는 1977년에 복원한 것이라는 안내문의 내용이다. 매표를 하고 입장을 하자 이내 안내소 뒤 우측으로 <세계금속활자발상중흥기념비>와 <비석군>이 있다.

 

#삼충사적비 - 강흥업, 구원일, 황선신 장군을 기리는 비

 

비석군에는 크기가 상이한 여러개의 비석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다. 이 비석군은 조선시대 선정을 베푼 유수, 판관, 경력, 군수 등의 영세불망비 및 선정비이며, 자연보호의 일환으로 세운 금표, 삼충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충사적비 등 총 67기의 비를 모아 세워둔 곳이다.

 

비석군

 

특이한 것은 <금표> 다. 고양의 연산군 금표, 영월 단종유배지의 금표, 강원 인제의 소나무 금표를 보았는데, 이곳에 자연보호의 일환인 <금표> 는 어떠한 내용인가?

 

#하마비 - 수령이하개하마

 

이 <금표>는 숙종 29년(1703) 강화유수부(고려궁지) 앞과 여러 지방에 세웠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졌다.

 

폐관된 강화역사관

 

이 금표는 우리 조상들의 자연보호 정신을 엿 볼 수 있는 중요한 표석으로 1733년 세워진 강화 유수부의 경고문으로 비문에 가축을 놓아 기르는 자는 곤장 백대, 재나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자는 곤장 팔십대라고 쓰여 있어 형벌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섭정

 

<삼충사적비> 이 비는 인조 14년(1636) 청나라 군사가 우리 나라를 침입하여 강화도를 공략하자 월곶진(연미정)에서 적과 역전분투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전사한 삼충신(강흥업, 구원일, 황선신)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호국정신의 얼이 담긴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강화역사관 옆 천연기념물 탱자나무

 

<강흥업 : 1575~1637> 본관 진주. 자 위수. 시호 충렬. 임진왜란의 참화를 목격하고 무인의 길로 들어섰으며, 1596년(선조 29) 무가에 급제한 후 훈련원 참정에 이르렀다. 1636년 (인조 14) 청나라가 강화도를 공격해오자 우부천총(右部千摠)으로 강화부중군(江華府中軍)인 황선신(黃善身)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때 노장으로 분투하는 것을 본 적병도 ‘백수장군(白首將軍)’이라고 칭송하였다 한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천연기념물 제78호

 

<구원일 : 1582~1637> 본관 능성(綾城). 자 여선(汝先). 선조 때 무관에 급제하고 인조 때 정3품 천총(千摠)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듬해 정월 강화도가 적에게 실함될 위기에 놓이자 강화좌부 천총(江華左部千摠)으로서 군사 수십명을 휘하에 거느리고 갑곶나루[甲串津]로 나갔다.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그러나 전의(戰意)를 상실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싸울 뜻이 없음을 보고 항의하다가 바다에 빠져 자결하였다. 1642년 강화도 사람들이 세운 충렬사에 다른 병자호란 수절인과 함께 제향되고 표충단(表忠壇)에 배향되었으며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탱자나무

 

<황선신 : 1570~1637> 본관은 평해(). 자는 사수(). 1597년(선조 30)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정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1월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공격하자, 강화부중군의 직책으로 강화유수 장신(), 충청수사 강진흔(),

 

이섭정

 

장관() 구원일() 등과 함께 강화도의 연미정()에 주둔하여 적을 방어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갑곶진()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참의에 추증되었고,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특히, 1792년(정조 16) 정조는 그의 충렬을 기려 자손에게 벼슬을 주었다.

 

갑곶돈대 포대

 

당초 이들 비석들은 1965년 강화대교(구 강화대교) 착공시 그 주변에 있었던 것을 용정리 1086번징 이전하였다가 비석군 정비사업으로 이 곳으로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이다.

 

#소포

 

비석 하나 하나의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역시 시간이 허락해 주지 않는다.

 

#불랑기

 

이 비석군에서 눈에 띄는 것이 또 있다. <수령이하개하마> 강화향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수령 이하는 말에서 내려 입묘하기를 계도하기 위해 향교 앞에 세워졌던 하마비로 1783년에 설치되었단다.

 

소포

 

하마비는 신성한 곳의 홍살문 앞에 세워지는 것이 예인데, 지난날 지방의 향교 등을 오가며 간혹 보아왔던 것으로 현재는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섭정과 돈대의 성곽

 

비석군의 맞은편에 <강화역사관>이 있으나 폐관되어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소 어르신의 이야기이다.

 

이섭정

 

저렇게 큰 건물을 무엇으로 쓰려는 것인지?,.... 정원을 따라 돈대의 방면으로 좌측에는 400여년 긴 세월을 지내 온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가 있다.

 

갑곶돈대 성곽과 대포보관 전각

 

이 나무는 사기리의 탱자나무(천연기념물 제79호)와 함께 강화도가 우리나라 서해안에서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 됨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대포보관 전각

 

강화도의 북쪽으로는 탱자나무가 자생하지 못하는가 보다. 언젠가 사기리의 탱자나무도 찾아 볼 날이 있을거라 여긴다.

 

대포

 

이 곳 강화도에 처음 탱자나무를 심게 된 이유는 성벽 밑에 적병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탱자나무는 우리 조상들의 국토방위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대포

 

어렸을적에 학교는 물론 민가에서도 탱자나무를 이용하여 울타리를 둘러 친 경우가 더러 있었다. 가시가 날카롭고 단단해서 비집고 들어가기가 무척 힘들다. 얼익은 탱자는 놀잇감으로 최고였다.

 

이섭정 현판

 

이 곳의 돈대는 둥근 원형에 가까운 여타의 돈대와 다소 상이하다. 해안쪽으로의 성벽만 남아있고 후방의 성벽은 알 수 없다. 성문이었던 진해루가 없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돈대에는 <소포>와 <불랑기>가 전시되어 있다.

 

매표소와 역사관 주변 풍경

 

<대포> 구경은 100mm, 길이 215cm, 중량 1,800kg 에 달하는 육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700m이며 조선영조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 가나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다는 설명이다.

 

 

강화해역 - 건너편이 김포다

 

<소포>의 제원은 구경 84㎜, 길이가 119cm, 중량이 171kg으로 포구에서 화약과 포탄을 장전한 다음 뒤쪽 구멍에 점화하여 사격하는 포구장전식화포로 사정거리는 300m이며 우리나라 재래식 화포중 가장 발달된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며,

 

성곽에서 본 강화대교(신), 강화대교(구)

 

<불랑기>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으로서 포 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이다. 제원은 구경 26mm, 길이 82cm, 중량 38kg 으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널리 사용된 화승으로서 포 1문에 다섯개에서 아홉개의 자포를 결합하여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발달된 화기라고 한다.

 

이섭정에서 본 주변 풍경

 

이곳은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고려의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 때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였다. 돈대에는 2층 누각의 정자가 있는데, 현판은 "이섭정(利涉亭)"이다. 고려 때 몽골과 외교교섭을 벌였던 곳이라고 한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도 이곳에서 프랑스와 전투가 벌어졌는데 강화도 동종을 탈취해 가려던 프랑스군을 크게 물리쳤던 곳으로 그 때 사용했던 화포인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역사관이 이전되기 전의 기록 같다. 홍이포는 명나라에서 도입된 것으로 <소포>, <대포>와 유사할 거라 여겨진다.

 

이섭정 주변으로 붉게 물든어 가는 꽃눈이 개화하려면 그리 멀지 않음이겠다. 이 돈대의 주변을 관광하며 옛 이야기와 탱자나무에 관하여 열심히 토론하는 어르신들의 모습들이 참 훈훈해 보인다. 포근함에 이끌려 이곳으로 발걸음하였을 모든 사람들이 참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