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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인천 강화 #연미정(燕尾亭) #제비꼬리 #월곶돈대 #황형 장군 #창원황씨 #연미조범

by 포리시스 2013. 4. 10.

 

<연미정>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읍 월곶리 242에 위치한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이다.

 

월곶돈대와 강화외성의 성문

 

월곶리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불길이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이라 하였다고 한다.

 

성문과 성곽을 복원한지 오래되지 않은 듯 싶다.

 

강화 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을 이루는 곳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돈대로 이어지는 성곽 - 외부는 군사보호시설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1244년 왕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면학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고,

 

성문이 언덕에 가렸다.

 

그 뒤 조선시대 삼포왜란 당시 왜적을 무찌르고 1512년 함경도 지방 야인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국가에 공로가 많은 황형에게 조정에서 세워 하사하였다고 하는데,  돈대의 진입로 옆에 황형 장군의 택지비와 연미정 앞에 집터였음을 나타내는 표석이 있다.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대부분 파손된 것을 1744년(영조 20) 유수(留守) 김시혁이 중건하였고, 1891년(고종 8) 조동면이 중수하였으며, 1931년 유군성의 특지로 보수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월곶돈대와 성곽

 

6.25전쟁 때도 파손되어 전후에 중수하였고, 1976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성문의 문루

 

서남쪽 모서리의 기둥은 6.25전쟁 때 포탄에 맞아 세 동강 난 것을 붙여 다시 세운 것이다.

 

월곶돈대

 

구조는 팔작지붕 겹처마로 10여개의 기둥을 돌기둥 위에 얹은 민도리집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면적은 약 40㎡이다.

 

월곶돈대 출입문

 

사방이 바라다보이며, 월곶돈대 꼭대기에 세워져 있어 개풍, 푸자, 김포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자 옆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2그루가 서 있다.

 

월곶돈대와 느티나무

 

정묘호란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연미정은 월곶돈대의 내부에 있는 셈이다.

 

돈대의 출구로 본 연미정

 

돈대의 남쪽으로 쌓은지 오래되지 않아 보이는 돌들로 축성을 하였고, 성문이 세워져 있는데 문루에는 현판이 없다.

 

연미정

 

연미정 앞에 배가 머물던 곳이였고, 성곽과 성문을 복원한 것으로 보아 앞 쪽으로 나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강화로 사람들이 드나들던 곳이였음을 짐작케 하는 곳이다.

 

돈대에서 내려다 본 외성의 성문과 문루

 

정자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은 북녘의 땅일거다. 촬영을 자재해야 하는 구간도 있다. 제비의 꼬리를 생각하며 물길을 둘러보아도 이내 와 닿지는 않지만, 아름다움의 지형을 그려 보았다.

 

연미정에 오르면 서해바다로 이어지는 시원한 물길을 볼 수 있다.

 

성문과 이어진 월곶돈대의 성벽 중간쯤 언덕에 <장무공황형장군택지비>가 있고, <창원(회산)황씨 황무공파 종회>에서 연미정에 관한 안내문을 기록하여 놓았다.

 

석조기둥 10개 위에 연미정,..

 

<연미조범>이라는 싯구와 안내도가 함께 있는데 옛 선인이 감상하였던 풍경을 옮겨보기로 한다.

 

멀리 북녘의 땅일거다

 

연미조범(燕尾漕帆) - 華南 高在亨(1846~1916) 선생의 詩

燕尾亭高二水中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三南漕路檻前通 삼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浮浮千帆今何在 떠다니던 천 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想是我朝淳古風 생각건대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녹음이지면 정말 시원하겠다

 

돈대 안으로 따듯한 봄 볕이 가득하다. 준비해 온 먹거리를 나눠 드시는 어르신들의 망중한의 모습이 정말 따사롭다.

 

한여름이 되면 바다의 바람과 어우러져 정말 시원하겠다

 

농사의 준비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마을 사람들도 한여름이 되면 이 곳에 들러 피서를해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커다란 두 그루의 느티나무 사이의 연미정

 

연미정의 안내문이다. 이 곳은 장무공황형장군께서 오위도총부도총관에 이르는 30여년간을 남서북국경을 침략하는 왜군와 여진족들을 남정북벌로서 국가를 보위하신 후 공조판서를 역임하시고 낙향하셔서 거쳐하시던 집터다. 

 

포대일거다

 

공께서는 서기 1459년에 탄생하셨으며 서기 1520년 향년 62세에 천수를 다하셨다.

 

포를 쏘기 위한 장소

 

부음에 접하신 중종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시면서 시호를 장무로 추증하시고 이곳 연미정 전지역과 많은 전답 외에 앞에 보이는 3만여 평의 산지를 사패지로 하사하시면서 예장토록 하셨으며,

 

집터 표지석

 

장무사에는 불천지위신위를 배향하고 후손으로 하여금 제례를 거행하도록 하셨으므로 4만여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정에 제례를 거행하고 있다.

 

연미정의 석주 - 가장 우측의 기둥은 수리를 한 듯

 

공께서는 서기 1480년 춘추 21세에 무과와 진현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신 후 춘추 27세에는 무과중시에서도 거듭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절충장군으로 혜산진 병마절제사에 제수되셨다.

 

수리를 한 것 처럼,..

 

그 후 표확장군에 제수되시고 회령부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셨으며 서기 1510년 중종 5년에 왜군이 경상도 삼포지역을 함락하는 삼포왜란이 일어났다.

 

돈대 내부

 

공께서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제수되시여 왜란을 평정하신 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시고 정헌대부 오위도총부 도총관겸지훈련원사로 승차하셨다.

 

연미정 풍경

 

그 후 서기 1514년 서북방의 국경을 침략하는 여진족이 있었으니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제수 되셨다.

 

연미정 내부에서 본 출구

 

공께서는 이들을 격퇴하므로서 남서북의 국경을 두 번씩이나 수호하신바 있어 조선조명장록에 추대되셨으며 문무를 겸전하신 그 웅재무략은 일제의 무종으로 추앙되셨다.

 

연미정 풍경

 

만년에는 연미정에 낙향하셔서 소나무를 심게하여 70년 후 서기 1592년 왜군이 침략한 임진왜란때 병선용재로 크게 쓰인바 있으며 그 후 1579년 왜군이 재침한 정유재란때는 선조임금께서 연미정에 오셨을때 성책과 주택건축용으로도 쓰인바가 있어 세인들은 공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연미조범 싯구

 

이와같이 유비무환에도 대비하신바 있는 성웅장무공황형장군이시다. 연미정 경내 외에는 대나무가 있는데 이는 공께서 대마도를 정벌하고 회군할 때 손수 가지고 와서 심으신 대나무다.

 

외성의 문루와 성곽

 

또한 연미정은 조선조 때 중국사신을 영접하던 곳이며 국정을 논의하고 협약을 체결하던 역사적인 사적지이다. 연미정은 인천광역시 문화재다.  창원(회산)황씨장무공파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