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구리시(2) - #구리시 #라이딩 #장자공원 #카이트보딩 #광개토태왕 #명빈묘 #대장간마을 #큰바위얼굴
하나, 구리한강공원과 장자공원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고들 하지만, 생소하게 다가오는 그곳의 새로운 환경들을 느낌으로써 이 마음을 잠재워 주는 것이 여행인 듯 싶다. 사실 집에서 자전거를 이용하여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곳은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거창하게 며칠씩 잠을 자 가면서 긴 여정의 계획된 여행보다는 못 할지라도 나름 스릴은 있다.
[구리한강공원의 대형 태극기]
6월 초순경에 구리시에 들렀던 이야기이다. 잔차를 타고 다니며 이야깃거리를 많이 담아오기는 하지만, 늘 컴터와 시름하는 시간이 적어 그때마다 제대로 올리지 못하니 한 참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문득 유채꽃이 생각나기도 하고,... 해서 목적지로 정한 곳인데, 한강변을 따라 두어 시간 만에 도착한 구리 한강공원의 유채꽃밭에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 있다. 아마도 개화시기가 훨씬 지난터에 다른 식물을 파종하기 위해 밭갈이를 할 모양이다.
[인공암벽타기 대회]
주말이라 한강변으로 다채로운 행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젊음을 충분히 과시할 수 있는 레포츠가 참으로 생동감 있게 전해졌다. 뚝섬 공원의 한켠에 자리한 인공 암벽에는 대롱대롱 매달려 가며 정상 정복을 위해 혼신을 힘을 하다는 암벽타는 마니아들의 열띤 모습들이 한창이고, 한강에는 요트와 페러글라이딩과 윈드셔핑을 혼합한 카이트보드 마니아들이 수중보 아래를 잠식하고 있다.
[카이트보딩]
늘 강변북로를 타고 시골에 갈 때면 지나치며 보아왔던 대형 태극기,.. 구리시의 상징이기도 할 텐데 태극기의 도시답게 정말 깃봉의 높이며 크기가 엄청나다 싶다. 예쁘게 조성된 공원에서 망중한을 보내는 시민들과 한 켠에 시설된 야구장에서 진행중인 유소년 야구경기,... 그리고 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들이 이곳의 풍경이다.
[구리시민공원의 양귀비]
이 공원에 유채꽃은 없으되 대신 꽃밭에는 양귀비가 한창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나 또한 여지껏 실물로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많은 분들께서 아름다움을 담기에 여념이 없지만, 산들바람에 연신 흔들대는 가녀린 녀석들의 몸부림에 안절부절 애간장을 태우는듯 싶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화려하면서 부티가 나지 않는 꽃이라 여겨진다. 동화 속에 나오는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가냘픈듯,..]
구리시는 고구려의 역사를 패러디한 도시라 여겨져 여기저기 훝어 보다가 광개토태왕상과 고구려대장간 마을을 둘러보기로 했다. 가는길에 장자공원을 관통하게 되었는데, 이정표 없는 쪽문으로 난 호수의 다리를 건너면서 이곳이 공원임을 알게 되었다. 공원은 규모가 상당히 크게 느겨졌다. 담쟁이넝쿨이 감싸고 있는 아치형 교량의 모습도 고풍스러워 보였고, 내가 살고 있는 호수공원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하천을 연상케 할 만큼 길게 드리워진 호수의 초입에는 인공폭포가 조성되었는데, 지인의 블에서 본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장자공원의 호수와 멀리 아차산]
구리시립도서관 앞에서 재차 길을 물었다. 구리 경찰서 앞 사거리에 <광개토태왕비와 비>가 있단다. 서너 블럭 이동하다보니 저 앞으로 구리경찰서가 보인다. 앞쪽의 교차로 반대편의 인도에 가깝게 삼족오가 새겨진 구슬을 들고 있는 태왕상과 옆에 비가 서 있다.
[담쟁이넝쿨이 어울어진 아치형 교량이 참 운치있다]
2008년 5월 23일에 건립되었으니 지금부터 5년 전에 이 상과 비가 세워졌다. 건립 내역에 많은 교수진과 학계 여러 분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비가 여러모로 고증을 거쳐 실제 모습과 같게 복원 세워졌을거라 여겨 진다. 비의 높이가 제법 크다. 높이 6.39m, 각 면의 너비 1.35~2m에 달한다는 내역이다.
당장이라도 중국으로 달려가 실제 모습의 비를 보고 싶지만, 이렇듯 국내에 서 있는 비를 보고 있노라니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원거리의 비에 쉬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비의 뒷쪽에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쉽게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있도록 번역해 놓은 해석문이 있다. 블에 옮기는 정도의 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진다. 다음은 안내문이다.
[광개토태왕상과 비]
둘, 광개토태왕상과 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광개토태왕비는 일반적으로 능비로 불리며,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한 고구려 제19대 임금이신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기리는 송덕비로서,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사실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생생한 역사 기록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 광개토태왕의 팽창정책을 비롯하여 고구려인의 독자적인 천하관 등 고구려사의 발전 과정은 물론 동아시아 세계의 생동하는 국제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태왕비의 건립
태왕이 붕어하신 뒤 2년째 되는 장수왕 3년(414년) 9월에 그 훈적을 기리기 위하여 국내성 고도에 태왕릉과 함게 기념비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그 유명한 '광개토태왕릉비'로 한국사에서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사면 석비로서 당대 고구려 문화의 결정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태왕비의 형태
능비는 우리가 흔히 보는 황강암이 아니라 방주형의 안산암질 응회암에 약간의 인공을 가한 것으로, 높이 6.39m, 너비 1.35~2m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크기이며, 여기에 예서를 바탕으로 한 고구려 특유의 웅혼한 필체로 44행 1,775자의 문자가 음각되어 있어 충북 중원군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와 더불어 당대 고구려사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문으로 평가된다.
비문의 구성과 내용
그 내용은 대체로 '고구려 시조인 추모왕의 건국 신화를 비롯한 세계와 태왕의 치적 및 비의 건립 경위, 영락 5년에서 20년까지의 정복 활동, 수묘인 연호와 규정'의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쟁점이 되어 왔던 부분은 비문의 제2부로, 영락 5년(패려 정벌 및 요동 순시), 신묘년기사(391년 : 태왕이 즉위한 영락 원년, 남진 기사의 집약문), 6년(백제 정벌과 복속), 8년(백신 토곡 관찰과 인접한 나라 복속), 9년(태왕의 평양 순시와 신라의 구원 요청), 10년(신라 구원과 가야 정벌 및 왜구 토벌), 14년(백제와 왜 연합군 격파0, 17년(백제 정벌), 20년(동부여 정벌과 복속)에 걸쳐 태왕의 정복 활동이 차례로 기록되어 있다.
[삼족오의 구슬을 들고 있는듯]
다음은 광개토태왕비 한글 번역문이다.
<제1면>
추모왕의 고구려 건국신화, 광개토태왕의 계보 및 업적, 비의 건립 경위
아!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으로 천제의 아드님이시고 어머니는 하백의 다님이시다. 알을 가르고 세상에 내려오시니, 나면서부터 성스러운 덕을 갖추셨다. OOOOO명[을 받들어], 수레를 타고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시는데, 길이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께서 [대수에] 이르러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을 띄워라."고 하시었다. 그 소리에 응하여 바로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들이 떠오르니, 물을 건너시게 되었다. 왕은 비류곡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다.
세속의 지위를 즐겨하지 않으실 무셥,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하였다.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가시며, 세자 유류왕에게 고명하여 도로써 나라를 다스려 일으키라고 하셨다.
대주류왕께서 왕업을 이어 받으신 뒤,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다. 18세(391)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였다. 태왕의 은택은 황천에까지 미쳤으며, 위무는 사해에 떨쳤다. OO을 쓸어 없애고 백성들의 생업을 편안하게 하시니, 나라는 부강하고 민은 유족해지며 오곡은 풍성하게 익었다.
하늘이 돌보지 않아 39세(412)에 세상을 떠나 나라를 버리시었으니, 갑인년(414) 9월 29일 을유에 산릉을 옮겨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새겨 써서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
그 말씀에 이르기를...
패려 정벌과 요동 순시
[영락] 5년 을미년(395)에 왕께서는 패려가 OO하지 않기 때문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주둔하면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과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가의 언덕에 이르러 3개의 부락 6~7백 영을 쳐부소고 소.말.양떼들을 얻은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어가를 돌리셨다. 이어 양평도를 지나 동쪽의 후성.역성.북풍 등지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사냥 준비를 하고, 국경의 땅을 순시하면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시었다.
신묘년 기사
백제와 신라는 옛 속민인데도 아직까지 조공을 바치지 않고, 왜는 신묘년(391)부터 [바다를] 건너왔다. 그래서 O은 백잔과 O를 공파하고, 신라는 O하여[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
백제 정벌과 한강 유역 진출
[영락] 6년 병신년(396)에 왕은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잔국을 토벌하였는데, 군은 OO에서 먼저 영팔성.구모로성.각모로성.간궁리성.OO성.각미성.모로성.미사성.O사조성.아단성.고리성.O리성.잡진성.오리성.구모성.고수야라성.막O성.OO성.분이야라성.전성.어리성.농매성.두노성.불성.비
[광개토태왕비]
<제2면>
백제정벌
리성.미추성.야리성.대산한성.소가성.돈발성.OOO성.누매성.산나성.나단성.세성.모루성.우루성.소회성.연루성.석지리성.암문민성.임성.단성.OOOO.의리성.취추성.O발성.고모루성.윤노성.관노성.삼양성.OO성.유고로성.구천성.OOO성 등을 쳤다.
그리고 그 국성에 O하였는데도 [백]잔이 의에 따르지 않고 감히 나와 여러차례 맞서 싸우므로 왕은 크게 노하시어 아리수를 건너 정예병을 보내어 그 성을 압박하였다. [백]잔이 O하여 소굴로 쫓겨 가니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그리하여 [백]잔국의 우두머리가 곤궁하고 절박한 상태에 이르자 남녀 포로 1천명과 가는 베 1천필을 바치며 무릎을 꿇고 스스로 맹세하기를, "지금부터는 영원히 노객이 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태왕이 은혜로서 지난 허물을 용서하고, 그 뒤의 순종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겼다. 이때에 58개의 성과 촌 700개를 얻었으며, 잔주(백제 아신왕)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군사를 돌려 환도하였다.
백신 토곡 관찰과 인접국 복속
[영락] 8년 무술(398)에 군사 일부를 파견하여 백신 지역의 토곡을 관찰하고 이어 [인접한 나라의] 막사라성.가태라곡에서 남녀 300여명을 잡아왔다. 이로부터 [그 나라는 고구려에] 조공을 바쳐오고 복종하여 섬기게 되었다.
평양 순시, 신라사 접견
[영락] 9년 기해(399년)에 백잔이 맹세를 어리고 왜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와 순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신라가 사절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왜인들이 [신라]국경에 가득히 들어와 성지(城池)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노객(奴老:신라 내물왕)을 백성으로 삼으셨으니 왕께 귀의하여 구원의 명을 청합니다."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롭게도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밀계를 갖고 돌아와 보고하게 하였다.
신라 구원과 왜구 격파 및 가야 복속
[영락] 10년 경자(400년)에 보병과 기병 5만명을 보내어 신라에 주둔하여 구원하도록 하교하였다. 남거성으로부터 신라성에 이르니 왜가 그 안에 가득하였는데 관군이 이르자 곧 왜적이 물러났다. △의 배후에서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자, 성은 곧 항복하여 귀순하였다. 나인(신라인)으로 하여금 수병(戍兵)케 하였다. 신라성과 신성을 함락시키자 왜구가 △ 궤멸되었다. 성내의 모두가 △ 를 따라 가기를 거부하여 나인(신라인)으로 하여금 수병케 하였다. 滿△△△△其△△九△△△△言
[비의 번역문]
<제3면>
△△△△△△△△△△△△△△△△△△△△△△△△△△辭△△△△△△△△△△△△△귀△以수△, 나인(신라인)으로 하여금 수병(戍兵)케 하였다.
예전에는 신라 매금(매금:왕을 낮추어 부름)이 스스로 와서 △△△한 적은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하자 △△(신라) 매금이 △△하고 가복(家僕)이 되어 △△△△하며 조공을 바쳤다.
왜의 대방계 침입과 백제.왜 연합군 격파
[영락] 14년 갑신(404년)에 그런데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계에 침입하였다. △△△석성을 △△하고 연이은 선단이 △△하니, 왕은 몸소 △△을 이끌고 평양으로부터 △△△하다가 선봉부대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자 왕의 친위대가 적의 허리를 끊고 깨끗이 쓸어버리자 왜구가 궤멸되었는데 참살된 자가 수없이 많았다.
백제 정벌
[영락] 17년 정미(407년)에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파견하여 △△△△△△△△를 정벌하였다. 군사를 △△하고 합전(合戰)하여 적을 참살하고 모조리 소탕하였는데, [적으로부터] 노획한 갑옷이 1만여벌에 이르고, 군수 물자와 병기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누성.△△성.△△△△△△나△성을 공파하였다.
동부여 정벌
[영락]20년 경술(410)에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 주둔하면서 토벌하였다. 군대가 부여성에 이르자 부여 온 나라가 놀라 △△△△△ △△△△, 태왕의 은덕이 두루 미치게 되자 이에 군사를 돌려 돌아왔다. 또한 그 중에서 [태왕의 덕을] 사모하여 관군을 따라 온 자들이 있는데, 미구루압로.비사마압로.서사루압로.숙사사압로.△△△압로(鴨盧:부족을 의미하는 듯) 등이다. 무릇 [당시에] 공파(攻破)한 성이 64개이고 촌이 1,400개나 되었다.
수묘인 연호(수묘인연호)의 출신과 호수
능묘를 지키는 자들의 호수[는 다음과 같다]. 매구여의 백성 가운데서는 국연(國烟)이 2호, 간연(看烟)이 3호, 동해고에서는 국연 3호, 간연 5호, 돈성 백성4가는 모두 간연이 되었다. 우성 1가는 간연이 되었다. 비리성 2가는 국연이 되었다. 평양성 백성 가운데서는 국연 1호, 간연 10호, 자련 2가는 간연이 되었다. 배루인은 국연 1호, 간연 43호, 양곡 2가는 간연이 되었다. 양성 2가는 간연이 되었다. 안부련 22가는 간연이 되었다. 개곡 3가는 간연이 되었다. 신성 3가는 간연이 되었다. 남소성 1가는 국연이 되었다.
새로 온 한(韓)과 예(穢)[의 수묘인은 다음과 같다.] 사수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1호, 모루성 2가는 간연이 되었다. 두비압잠한 5가는 간연이 되었다. 구모객두 2가는 간연이 되었다. 구저한 1가는 간연이 되었다. 사조성의 한과 예는 국연 3호, 간연 21호, 고수야라성 1가는 간연이 되었다. 경고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3호, 객현한 1가는 간연이 되었다.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의 도합 10가는 간연이 되었다. 파노성의 한(韓) 9가는 간연이 되었다. 구모로성 4가는 간연이 되었다. 각모로성 2가는 간연이 되었다. 모수성 3가는 간연이 되었다. 간저리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3호, 미추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구리경찰서 앞 네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제4면>
7호, 야리성 3가는 간연이 되었다. 두노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2호, 오리성에서는 국연 2호, 간연 8호, 수추성에서는 국연 2호, 간연 5호. 백잔 남쪽에 사는 한(韓) 가운데서는 국연 1호, 간연 5호, 대산한성 6가는 간연이 되었다. 농매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7호, 윤노성에서는 국연 2호, 간연 22호, 고모루성에서는 국연 2호, 간연 8호, 전성에서는 국연 1호, 간연 8호, 미성 6가는 간연이 되었다. 취자성 5가는 간연이 되었다. 삼양성 24가는 간연이 되었다. 산나성 1가는 국연이 되었다. 나단성 1가는 간연이 되었다. 구모성 1가는 간연이 되었다. 어리성 8가는 간연이 되었다. 비리성 3가는 간연이 되었다. 세성 3가는 간연이 되었다.
수묘 제도의 정립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이 살아계셨을 때 하교하여 말씀하시기를 "조왕(祖王)과 선왕(先王)들께서는 원근 지방에 사는 구민(舊民)들만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고 청소를 하게 하였다. 나는 구민들이 점차 쇠하여 영락하게 될까 걱정이 된다. 만약 나의 만년 뒤에라도 묘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내가 친히 순행하여 잡아온 한과 예족들로 [능묘를] 지키고 청소하는 일을 맡게 하라."고 하셨다.
말씀이 이와 같으므로 교령에 따라 한과 예 220가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수묘의] 법칙을 모를까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를 데려와 새로 신구 수묘호를 합치니 국연이 30, 간연이 300이 되어 모두 330가가 되었다.
윗대 조왕과 선왕 이래 묘상에 비석을 갖추지 못해 묘지기(수묘인) 연호들이 착오를 일으켰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조왕과 선왕의 무덤 위에 모두 비석을 세우고 그 연호[의 명단]를 새겨 착오가 없도록 하였다. 또 묘지기 제도를 제정하여 앞으로는 [묘지기직을]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였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고, 법령을 어기는 자 가운데서 파는 자는 형벌로 다스리고 사는 자는 법령에 의하여 그 자신이 묘지기가 되도록 하였다.
[명빈묘 입구]
셋, 태종 후궁 명빈묘
경기 구리시 아천동(아치울 삼거리에서 서울방면 우측의 산길로 200여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에 위치하고 있는 <명빈묘>는 사적 제364호 이다. 이 묘는 조선왕 제3대 태종의 후궁인 명빈 김씨의 무덤이다. 입구의 산길이 가파르고 능 앞으로 낮은 골에는 주말농장의 텃밭이 길게 이어져 있다.
[봉분 앞 묘비와 혼유석]
명빈김씨(?~1479)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다는 안내문과, 태종의 후궁으로 성종10년(1479)에 별세하였다고만 전한단다. 후궁이기 때문에 담장과 호석이 있는 능으로 조성되지 못하고 민묘처럼 나지막한 봉분으로 조성되어 있다. 다만, 혼이 나와서 논다는 혼유석과 향로석 그리고 한 쌍의 석인상(문인석)이 갖추어져 있다. 묘비 전면에는 [명빈김씨지묘], 뒷면에는 [양주□□ 면성화기해초칠일]이라고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묘역의 출입은 할 수 없다.
[묘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앞쪽으로 주말농장 텃밭이 있다]
넷, 고구려대장간마을
<고구려대장간마을>은 여러편의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기도 하다. 투막지붕의 건물들과 높게 솟은 망루, 우리의 전통 한옥보다는 세련되지 않았지만, 둘러보면서 그시대의 가옥을 추상해 보는 시간도 참 좋을듯 싶다. 시간의 부족으로 직접 구경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한번 쯤 관람해 보는것도 좋을 듯 싶다.
[대장간마을 출구 - 매표를 해야 한다]
안내도에 그려진 건축물의 설명이다. 매표소의 2층 건물은 한옥으로 지어져 있는데 아차산유적전시관이 있고 거믈촌, 경당(학습장), 연호개채, 망루, 대장간, 담덕채, 야외학습장, 광개토태왕비, 야외공연장, 선녀탕 등 동선을 따라 즐기며 관람할 수 있을것 같다.
[대장간마을 풍경]
구리시에서는 인근 아차산에 있는 여러 개의 보루중 가장 핵심이 되는 4보루를 복원 정비함으로써,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과 찬란했던 문화를 오늘날에 계승하고,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일개우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안내문이다.
다섯, 큰바위얼굴
'고구려대장간마을' 주차장에서 아차산 등산로를 따라 약 100여 미터 나무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계곡의 건너편으로 검은색의 삼족오 깃발을 볼 수 있는데, 이곳에 <큰바위얼굴>이 있다. 커다란 바위에 또렷한 눈과 코, 그리고 입을 측면에서 본 듯 한 얼굴 형상이다. 얼추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케도 한다.
[삼족오 깃발 아래 큰바위얼굴]
고구려대장간마을을 걸립하고 태왕사신기 촬영이 이루어질 무렵 발견한 사람 형상의 바위란다. 커다란 눈과 코, 그리고 지긋이 다문 입 모양과 머리칼을 휘날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사람 얼굴이다.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태왕역으로 열연한 배용준이 촬영중 발견되었다고 하니 배용준과 닯은 것 같기도 하다는 안내문의 내용이다. ㅎㅎ
[또렷한 눈.코.입,... 피카소의 그림을 연상해 보았다]
풍수지리학적으로 기가 매우 강한 지역으로 사람들이 찾아와 기원을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1,500여년전 고구려 군인들이 봉우리마다 보루를 조성했던 유적지로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이 '아단성(아차산의 옛지명)을 공략했고, 평강공주와 애틋한 사랑을 나눈 온달장군이 이곳 아차산에서 전사했다고 하는데, 혹 온달장군의 영혼이 환생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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