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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파주(7) - #용암사 #장지산 #용미리 쌍석불 #이승만 대통령

by 포리시스 2014. 9. 26.

   경기 파주(7) - #용암사(龍岩寺) #장지산 #용미리 쌍석불 #이승만 대통령

 

   바야흐로 가을이 무르익어 간다. 휘어진 국도변을 지나다 보니 노오랗게 물들어 가는 들녘의 모습에서 아름다운 우리 국토의 황금 벌판이 예쁜 파스텔 물결로 흔들거림을 한 번 상상해 보았다. 밤송이 벌어진 곳에는 실한 밤알이 떨어져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느껴지는 계절이다. 서너 달 참 많이 바쁘고 바빴다.

 

[장지산 용암사 일주문]

 

   참 오랫만에 문화재 답사에 나선 듯 싶다.

   [용암사(龍岩寺)]는 경기 파주시 혜음로 742-28에 위치한 사찰로 일주문을 들어서면 대웅보전, 요사채, 종각, 미륵전.삼신각을 품고 있는 아담한 사찰이다. <쌍석불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삼성각 뒷쪽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면 천연바위에 잘 새겨진 두 주인공의 석불입상이 있어 불려진 이름이겠다.

 

[사찰의 풍경을 담다]

 

   혜음로에 인접해 장지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이내 사찰의 일주문이 서 있다. 입구부터 경내는 물론 석불이 위치한 산기슭까지 도토리가 널부러져 있어 이 사찰에서도 사뭇 가을의 내음이 나는구나 싶다. 일주문의 단청 빛에서 사찰의 불사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겠다.

 

[대웅보전과 우측의 종각]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오랜 고찰이지만, 전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경 다시 재건하였다는데 어려운 재정 탓에 한동안 단청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사찰은 한 때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다가 현재의 용암사로 바뀌었단다. 앞을 지나는 국도 혜음로가 그 어원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배웅하는 스님]

 

   사찰의 이정표를 보고왔건만 일주문 우측 언덕 아래로 십여대의 차량을 주차할 수 있는 정갈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며 일주문 앞에 서서 인증샷을 하는 연인, 한 가득 차량을 이용한 가족들, 허리를 굽혀 도토리를 줍는 어르신들,... 가을 사찰의 또 다른 풍경이라 여기고 싶다.

 

[불전 앞 스님]

 

   여타의 사찰에서 처럼 이곳에도 창건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시대 중기 13대 선종(1083~1094년)은 자식이 없어 셋째 부인인 원신궁주 이씨(元信宮主 李氏)까지 맞이했으나 여전히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이것을 못내 걱정하던 궁주의 꿈속에 어느 날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오. 배가 너무 고프니 먹을 것으 주시오." 하고는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미륵전.삼성각과 석탑.동자상]

 

   꿈에서 깬 궁주는 이 내용을 왕께 아뢰었다. 왕은 곧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장지산 아래에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은 즉시 이 바위에 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리도록 하였더니 그 해에 원신궁주에게는 태기가 있었고,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는 이야기 이다.

 

[사찰 탐방중인 스님 일행]

 

   그 후 이곳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구전에 의하면 고 이승만대통령 모친께서 용암사 쌍미륵 석불에서 득남 발원기도를 하여 고 이승만대통령이 탄생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단다.

 

[미륵전(좌)과 삼성각(우)]

 

   1954년 고 이승만대통령 재임시에 용암사를 방문 참배하시며 남북통일과 후손 잇기 기원 기념으로 <동자상과 7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동자상은 정면에서 좌측의 미륵불상 오른쪽 어깨 옆에, 7층석탑은 동자상 뒤편에 세워져 있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원래 쌍미륵불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내 풍경 - 대웅보전, 요사체(종무소), 종각]

 

   고 이승만대통령께서 4.19로 인하여 하야하시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 하신 후 재야관련단체들의 문화재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심하여 1987년 철거하여 종무소(요사체) 우측에 모셔 있던 것을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여 지금이라도 늦은 감은 있으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도록 여러 불자님들과 현 주지 포운당 태공스님께서 2009. 6. 15. 이곳으로 옮겨 모셨다는 안내문이다.

 

[용미리 쌍석불 - 보물 제93호]

 

   이 사찰의 스님은 아닐텐데,.... 대여섯 불자님과 동행하며 사찰을 관람하시는가 보다. 쌍석불의 계단을 내려와 삼성각 옆에 세워진 동자상과 7층석탑을 관람하고 있다. 나와 거리가 있기는 했지만 풍경이 좋아 셔터를 눌러대다가 그만 스님의 렌즈와 마주쳤다.

 

[좌측 원립불은 남상, 우측 방립불은 여상 이란다]

 

   스님도 사진을 담는 것이 참 좋은가 보다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다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쯤 되냐며 물었다. 사실 내 것은 구닥다리다. 바디도 단품되었고 중고가격으로 2-30만원이면 살 수 있을거라 답했다. 이곳 저곳 다니며 국토의 풍경이 좋은 곳이 참 많터라는 이야기와 자신의 똑딱이는 한계가 있다며 이유를 털어 놓았지만 구입하겠다는 답은 없었다.

 

[좌측 등산로에서 본 불상]

 

   대부분 사찰의 경우 삼신각은 독립해서 본당의 뒷편에 많이 위치하고 있다. 오대산의 월정사에도 한 건물에 불전이 2개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이곳의 삼신각은 방실이 나눠져 있는 한 건물에 미륵전과 삼신각의 현판이 따로 걸려 있다는 점이 참 특이 하다. 특히 미륵전 내에는 아주 작은 삼존불 뒤로 벽에 부처님의 두상이 담긴 액자가 걸려있어 더욱 그러했다.

 

[좌불은 연꽃을 든 모습, 우불은 합장한 모습이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보물 제93호)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구의 불상을 우람하게 새겼는데, 머리 위에는 돌갓을 얹어 토속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까닭에 신체 비율이 맞지 않아 굉장히 거대한 느낌이 든다. 이런 점에서 불성(佛性)보다는 세속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는 지방화된 불상이다.

 

[우측의 등산로에서 본 불상]

 

   왼쪽의 둥근 갓을 쓴 원립불(員笠佛)은 목이 원통형이고 두손은 가슴 앞에서 연꽃을 쥐고 있다. 오른쪽의 4각형 갓을 쓴 방립불(方笠佛)은 합장한 손모양이 다를 뿐 신체조각은 왼쪽 불상과 같다. 지방민의 구전에 의하며 둥근 갓의 불상은 남상이고, 모난 갓의 불상은 여상이라 한다.

 

[미륵전의 내부 - 부처님 두상의 액자가 걸려 독특하다]

 

   이 불상들은 고려시대의 조각으로 우수한 편은 아니지만, 탄생설화가 있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는 문화재청의 설명이다.

 

[칠층석탑과 동자상의 유래]

 

    <용미리 석불입상>은 보물 제93호 이다. 높이 17.4m로 천연 암벽을 몸체로 삼아 그 위에 목과 머리, 갓을 따로 얹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남자 부처와 여자 부처,.... 이 같은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기자전설에 불과하지만, 지금도 아이를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는다고 한다.

 

[경내에서 도토리를 줍는 모녀의 다정한 모습]

 

   대웅보전 앞 뜰에 있는 종각에는 봉덕사의 종을 본딴 범종(높이 197cm, whddlqrn 115cm)이 안치되어 있단다. 종각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종각 내 범종을 확인해 보지는 못한 아쉬움이 크다. 작은 에밀레종을 이곳에서도 볼 수 있었을텐데,...

 

[종무소]

 

   두어 시간 거닐며 경내에 제법 사람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곳이라 여겨 보았다. 풍성한 계절 탓인지도 모르겠다. 도토리를 줍는 어리신들과 아이와 엄마 그리고 답사여행중인지 스님과 불자님들,... 그리고 연인의 모습,... 푸르른 솔잎 가지 위로 청명한 하늘에 비춘 이불의 너그러운 모습과 일치 시키고 싶다.

 

 

   부처님 앞에서 머리 숙여 큰 절하며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기원하는 모습,... 이 또한 우리네 어머님들의 모습은 아닐까 싶다. 환한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가 마음의 부처는 아니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