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문산천변의 덕은5리 4거리에서 LG디스플레이단지를 지나면 소하천 만우천이 흐른다.
옆으로 곧게 뻗은 넓직한 도로를 따라 가면서 비석 4거리에 이르면 <황희 정승 묘>의 이정표를 볼 수 있다.
이곳으로부터 다시 약 1km 가량 지점에 위하한 황희 정승의 묘역은 경기도 기념물 제34호이다. 문화재청의 기록을 옮겨 왔다.
[황희 정승]
조선 시대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 황희(黃喜, 1363∼1452) 선생의 묘소이다.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 데에 큰 업적을 남겼고,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世宗盛世)에 공헌하였다.
묘역은 부인 청주양씨(淸州楊氏)와 합장된 하나의 봉분 형태이다.
봉분은 커다란 직사각형태에 앞부분에 ‘ㄷ’자 모양의 둘레석을 하단에 쌓은 형태로 조선초기의 독특한 묘제이다.
묘역은 계단식으로 3단으로 나누고 계체석(階砌石 ; 묘역을 구분하는 편평하고 긴 경계석)으로 구분하였는데, 고려의 묘제를 계승한 조선 초기의 묘제이다.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 묘표가 있는데, 1824년에 건립한 것이다.
장명등은 머릿돌이 몸돌에 비해 큰 조선 초기의 장명등 형태를 잘 보여준다.
화창은 앞뒤로만 凹자형으로 뚫었으며, 원수(圓首)는 2단의 구조를 보이는 전형적인 15세기의 장명등이다.
시자석인은 황희 묘의 대표적인 석물로 상징된다.
두 손을 모아서 공손하게 서 있는 자세이며, 소모자를 쓰고, 옷은 방령포를 입은 형태이다. 이런 도상은 희귀성이 높아 매우 중요하다.
하단에는 문석인 1쌍을 배치하였는데, 복두공복형(幞頭公服形 ; 머리에는 복두를 쓰고, 공복을 입은 문신의 형태)이다.
머리가 크고 입주변의 팔자주름을 깊게 표현한 조선초기의 양식이다. 신도비는 규수방부형(圭首方趺形; 좌우 모서리의 각을 죽인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의 형태다.
이 묘역은 조선 초기의 독특한 묘제와 석물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경기 지역 능묘 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18년 동안 영의정을 지냈던 명재상 황희 (1363~1452)]
황희는 1363년 개성 가조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방촌이며 본관은 장수다.
황희의 출사는 이미 고려시대 때부터 시작되었다. 27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었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 개풍군 광덕산에 은거했다.
이때 그는 두문동 선비들의 설득으로 뒤바뀐 나라의 벼슬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성계의 행동은 용서할 수 없으나 백성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조선 조정에 출사한 황희는 다시 성균관 학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황희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었으며 침착하고 사리가 깊었다.
또한 청렴했으며 학식도 역시 높았다. 특히 황희에 대한 왕의 예우는 극진했다고 전해진다.
태종은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 그를 대우하였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하였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보냈다.
정계의 요적을 두루 거치며 황희는 조선 초기의 국가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는 개량된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뽕나무를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했으며 경제육전을 펴내기도 하였다.
또한 국방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의 야인과 남방의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으며, 인권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천첩 소행의 천역을 면제하기도 했다.
이후,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황희는 왕을 보좌하여 세종성시를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하며, 그간 쌓아온 국정 전반에 관한 깊이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67세였다. 이밖에도 그는 나라의 안과 밖을 진정시키면서 4군 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을 진흥 등을 지휘하고 감독하였다.
오늘의 후손들이 돌아볼 때, 바로 이 시기야말로 조선시대는 물론이거니와 역사적으로 가장 태평하고 가장 찬란했던 시절이라 할 수 있겠다.
[대호大虎 김종서를 다스린 황희의 청렴함]
공조판서였던 김종서가 정승인 황희를 접대하면서 공조貢租의 물건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예빈시禮賓侍라고 해서 의정부 건물 옆에 귀빈들을 접대하는 별도의 전담기구가 있었다.
이에 황희는 “예빈시에서 가져오면 될 것을 어찌 공조의 물건을 사사로이 쓸 수 있는가?” 하며 남들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호통을 쳤다.
사람 좋기로 유명한 황희였지만 이후에도 김종서에게만은 아무리 사소한 잘못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보다 못한 맹사성이 어느 날 황희에게 물었다. “종서는 당대의 명판서이거늘 어찌하여 그리 허물을 잡으십니까?”,
황희가 대답하기를 “김종서는 성격이 굳세고 기운이 날래어 일에 거침이 없기 때문에 훗날 정승이 되면 신중함을 잃어 일을 그르칠까 염려하기 때문이요.
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가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황희의 유연한 정치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성룡, 채제공과 함께 조선의 4대 재상으로 꼽혔던 황희와 맹사성, 우연찮게도 그 둘이 같은 시기에 관직에 있었던 것은 그 시대의 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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