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5) - #반구정 #황희 선생 #유적지 방촌기념관 #월헌사 #앙지대 #방촌영당
경기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127에 위치한 <황희 선생 유적지>는 자유로 임진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사실 정자 하나만 생각하고 왔는데, <반구정> 이외에 <앙지대>, <방촌영당>, <월헌사>, <방촌기념관> 등이 함께 하고 있어 둘러보면서 선생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보고 느낄 수 있는 아주 좋은 장소라 여겨 보았다.
[임진강변에 위치한 반구정]
방촌 황희(1363~1452)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정치가로 청백리의 표상이다. 초명은 수로(壽老), 호는 방촌(방촌)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1363년(공민왕 12) 개성 가조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어머니 용궁김씨가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서 물이 쏟아져 내렸다고 한다.
[황희 선생 초상화]
1376년(우왕 2) 음직으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조선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추천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고 그 후 직예문춘추관. 사헌감찰. 유습유. 경기도도사를 역임했다.
[청백리의 표상 황희 정승]
1400년(정종 2) 형조. 예조. 이조 등의 정랑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에 올랐다.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 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가 되었다.
[서진 - 책이나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누르는 물건]
1418년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남원으로 이배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관찰사.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 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
[벼슬아치를 떠나 사람으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참 의미 있는 글이라 여겨진다.]
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9년간 영의정에 재임 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으로부터 가장 신망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파주의 방촌영당, 상주의 옥동서원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저서에 <방촌집>이 있다.
[청정문]
황희 선생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은데, 특히 보물 제281호인 전북 남원에 있는 <광한루>가 그것 이란다. 1419년(세종 1) 남원에 유배된 황희가 선조인 황감평이 지은 서실을 헐고 다시 누각을 지어 <광통루>라고 불렀다. 1434년(세종 16) 당시 충청.전라.경상 삼도 순찰사 였던 정인지가 달나라 궁전의 경치만큼 아름답다고 감탄하면서 <광한루>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청정문을 통해 본 유적지]
방촌 기념관 내 선생에 관한 일화들이다.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하루는 어린 종 둘이 다투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황희와 마주쳤다. 그중 하나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일렇다. 어린 종에게서 자초지종을 다 들은 황희는 다독이며 말했다.
"그래, 네 말이 옳구나."
그러자 다른 종은 주인이 상대의 편을 드는 줄 알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네 말도 맞구나."
그리고는 둘을 타일러 돌려보냈다.
이때 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의 부인이 한마디 했다.
"아니, 대감께서는 이놈도 옳다, 저놈도 옳다 하십니까? 옳고 그름을 확실히 밝혀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정승께서 그리도 사리가 분명치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황희는 웃으며 말했다.
"맞소. 부인 말씀도 참으로 맞소."
이에 그만 부인도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황의는 공적인 일에는 엄격했으나 개인적으로는 온후하고 자상했다. 집에서 부리는 어린 종이라 할지라도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황희의 세심한 배려를 엿볼 수 있는 일화라 할 수 있다.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한 반구정]
<억울한 자백>
부인 양씨가 좋은 배 몇 개를 얻어 황희에게 주기 위하여 현판 뒤에 숨겨 두고 잠시 친정에 다니러 갔다.
황의가 집으로 돌아와 내실에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현판 뒤에서 쥐가 자꾸 들락날락하면서 배를 훔쳐가려고 했다. 그런데 쥐가 입으로 물어가기엔 배가 둥글고 미끄럽고 또 너무 컸다.
황희는 쥐가 어떻게 하나 궁금해 그냥 놔두었다. 이윽고 다른 쥐가 나타나더니 한 마리는 배를 안은 채 벌렁 드러눕고 다른 한 마리는 배를 안고 있는 쥐를 물고 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쥐들이 배를 몽땅 훔쳐갔다.
날이 저물어 집에 돌아온 부인은 배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화가 나서 어린 계집종에게 추궁했다. 그 아이는 모른다고 대답하다가 매를 서너 차례 맞더니 자기가 훔쳐 먹었다고 울며 말했다. 황희는 어린 여종이 죄 없이 억지로 자백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한동안 탄식했다.
어느 날 황희는 세종에게 이 일을 이야기한 후 덧붙여 말했다.
"이처럼 지금 국내에는 반드시 억울한 형을 받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한번 살펴보소서."
세종은 즉시 오랫동안 수감되어 있는 죄수들 중 억울한 자를 다시 가려내도록 명하여, 많은 수감자들이 구제돼었다고 한다.
[반구정에서 본 앙지대의 망중한의 관람객]
<누렁소와 검정소>
어느 날 황희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을 암행하는데 한 늙은 농부가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와 함께 쟁기질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 지방에서는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황희는 농부에게 그 고을 수령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대놓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우선 말에서 내려 길가에 앉아 농부에게 말을 붙였다.
"그 두 마리 소 가운데 어느 소가 일을 더 잘 하오?"
그러자 농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끌고 밭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황희는 뜬금없는 농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하고 농부를 따라갔다. 밭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르자, 농부는 황희의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런 놈은 일도 곧잘 하고 시키는 대로 말도 고분고분 잘 듣는데, 검은 놈은 꾀가 많아 다루기가 힘들답니다."
무슨 중요한 애기를 하려는 줄 알고 따라온 황희는 어이가 없어 다시 물었다.
"아니 노인장, 그게 무슨 비밀이라도 된다고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말씀하시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짐승이라도 서로 비교되는 것은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황희는 그 말을 듣고 되물었다.
"그럼 저 미련한 소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다는 말이오?"
그러자 농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령 저놈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손 치더라도 매사 경솔하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저놈들은 '이랴!' 하면 가고, '워!' 하면 멈추며, '이리!' 하면 오른쪽으로, '저리!' 하면 왼쪽으로 갈 줄 아는데 어찌 저놈들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만일 아까 저놈들 근처에서 이 얘기를 했다면 다 들었을 것 아닙니까? 농사를 애써 도와주는 저놈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소이다."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숙연한 마음으로 스스로 반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미물을 대할 때도 이러해야 하거늘 하물며 사람은 어떠하겠소? 노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경박함을 면치 못할 뻔했소. 앞으로 노인의 말을 약으로 삼아 주의하리다."
황의는 이 일을 가슴 깊이 새겼다고 한다.
[앙지대]
방촌 기념관에서 바라다 보는 곳의 "청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선생의 유업을 기념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인 <방촌선생영당>과 주변에 <경모재>, <월헌사>가 있고, 우측의 강변으로 <반구정>, <앙지대> 그리고 <선생상>이 위치하고 있다. 영당 건물의 보수를 위해 공사가 한창이고, 내리쬐는 햇살을 피해 임진강변을 바라보며 정자에 올라 망중한을 보내는 분들도 눈에 띈다.
[앙지대에서 본 반구정]
<황희선생영당>은 경기도기념물 제29호 이다. 1452년(문종 2) 황희가 90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1632년(인조 10) 선생의 7세손 현감 수가 백옥동 유상을 모사하여 본가에 봉안하였다가 이 후 본가 터에 영당을 짓고 영정을 모시게 되었다.
[방촌 선생 영당]
그 후 한국전쟁으로 전부 불탄 것을 1962년 후손들이 복원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인 초익공양식의 맞배지붕에 단청이 되어 있고 솟을삼문이 있다. 영당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건물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둘렀다. 매년 선생의 탄신일인 음력 2월 10일 후손과 지역유림들이 제향을 올리고 있다는 안내문이다.
[월헌사]
영당 옆에는 선생의 고손인 소양공 월헌 황맹헌(1472~1535) 선생의 신위를 모신 부조묘인 <월헌사>가 있다. 황맹헌은 황희선생의 증손인 부사 황관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소세양, 정사룡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방촌 황희선생상]
<반구정>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2호인 <반구정>은 황희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벗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워진 정자로 낙하진에 인접해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8도의 유림들이 유적지로 수호하여 내려왔으나 안타깝게도 한국전쟁때 모두 불타버렸다.
[앙지대중건기]
그 뒤 이 일대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정자를 복원해 오다가 1967년 개축을 하고 1975년에는 단청과 축대를 손보았다. 그 후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일환으로 <반구정>과 <앙지대> 등을 목조건물로 새롭게 개축하였다. 정자 내부에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미수 허목 선생이 지은 <반구정기>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시 정자 주변의 풍광이 잘 묘사되어 있다.
[허목이 지은 반구정기]
<반구정기(伴鷗亭記)> - 미수 허목
이는 이전 성대의 재상 황익성공의 정자이다. 상공이 가신지 삼백년이 가까운데 정자가 무너져 밭으로 폐허로 변한지도 백년이나 되었다.
지금 황생은 상공의 후손으로 강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이름을 이전대로 '반구정'이라 하여 이전의 '반구정'을 잊지 않고 있으니 역시 어진 사람이다. 상공의 혁혁한 업적은 온백성이 저마다 칭송하는 바이다. 상공은 나아가 조정에 임하여서는 선왕을 도와 정치의 체제를 세우고 여러 관료를 바로 잡았으니 어질고 재능있는 이를 관직에 맡겨 온 사방이 걱정이 없고 백성이 생업에 안락하게 되었으며 물러나 강호에 은퇴하여서는 갈매기나 해오라기와 같이 세상을 잊고 영구를 뜬구름처럼 여겼으니 대장부의 훌륭한 사업이 반드시 이같아야 한다.
야사에도 명인의 지난 사적을 전하고 있지만 상공은 한평생 말과 웃음이 적었고 사람들이 그 기뻐함고 노여워하는 표정을 볼 수 없었으며 일에 임하여서는 대체만을 힘쓰고 자잘구레한 것을 따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진 재상이라 하여 그 이름이 수백대까지 인멸되지 않은 것이다.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십오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하였다. 매일 조수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편편하여 광야도 백사장도 분간할 수 없고 구월쯤 되면 철새들이 첫 선을 보이기 시작하며 서쪽으로는 바다의 입구까지가 이십리 가량 된다.
[반구정에 걸린 편액]
<앙지대>는 반구정이 원래 위치했던 자리이다. 1915년 반구정을 현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그 자리에 황희선생의 유덕을 우러르는 마음을 담아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仰止臺)' 라 이름 하였다. 앙지대 상량문에 '오직 선(善) 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 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의 호인(好仁)이라는 뜻을 취했다.'라고 적고 있단다.
[고직사]
<관풍루(觀風樓)>
방촌 황희선생상 좌대에 선생이 1423년(세종 5) 감사 재직시 남긴 유묵이 음각되어 있다.
헌고능각서(軒高能却暑)
집이 높으니 능히 더위를 물리치고
첨활역위풍(첨豁易爲風)
처마가 넓으니 바람이 통하기 쉽네
노수음수지(老樹陰垂地)
큰나무는 땅에 그늘을 만들고
요잠취소공(遙岑翠掃空)
먼산 봉우리는 푸르게 하늘을 쓰는것 같네
[앙지대에서 본 민통선]
작은 정자 <반구정>을 찾아왔지만, 의외로 선생에 관한 많은 것들을 지득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에 한줄기 바람이라도 황포돗배를 밀어 준다면 참 좋겠지만, 분단의 아품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의 분위기는 고요한 강만큼이나 적막해 보인다. 한 때에는 쉬이 건널 수 있는 한 민족의 영역이었지만, 언제쯤에나 회복이 될런지 아쉬움이 정말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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