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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인천 강화(26) -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위리안치 #고려왕족 유배 #조선왕족 유배

by 포리시스 2018. 8. 1.

   인천 강화(26) -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위리안치 #고려왕족 유배 #조선왕족 유배



   [무오사화 - 연산군4]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 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의 내용을 문제삼아 사초 작성에 관련된 인사, 교류문인과 비호 관원들을 처벌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부관참시하였을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처형, 유배 보냈다. 연산군은 세조에 대한 반역이라는 입장에서 관련자들을 처벌한 것이다.



   [갑자사화 - 연산군10]

   폐비 윤씨 사건과 관련 성종의 후궁을 비롯하여 훈구파 사림파 대신들을 처형하거나 부관참시했다. 연산군은 폐비 문제와 직결된 이극균, 윤필상, 성준, 김굉필 등도 숙청하였는데,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은 부관참시되었다. 또한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은 살해하였다. 당시 연산군은 할머니인 인수대비와도 크게 다투었고, 훗날 폐비 윤씨를 복위하는 문제로 재차 다투다가 당시 병으로 누워 있던 인수대비를 머리로 받아 그 후유증으로 인수대비는 사망했다. 연산군은 인수대비의 초상 때에도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상을 끝냈다.



   [중종반정 - 연산군12]

   1506년 성회안, 박원종, 유수넝이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진성대군을 옹립한 사건이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더욱 더 난폭해졌다. 그러자 대신들 중에는 연산군의 횡포에 맞서려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중 이조참판을 지내다 연산군을 비웃는 시를 쓰는 바람에 관직에서 물러난 성희안이 박원종을 찾아갔다.

   박원종과 성희안은 영의정과 우의정 등을 끌어들여 연산군을 몰아내는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날도 술을 마시다가 잠이 든 연산군은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고, 연산군이 소리를 질렀으나 아무도 반란군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침실로 몰려들어와 연산군의 몸을 꽁꽁 묶었다.

   이로서 연산군은 임금이 된 지 12년 만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고 박원종을 비롯한 신하들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중종)을 왕의 자리에 앉혔다. 중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신하들에게 연산군을 죽이지 말도록 명하고, 교동으로 위리안치 하였다.



   [교동에 유배된 연산군 - 조선 제10대 왕]

   조선시대의 가장 패악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연산군의 학정으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연산군은 그날 바로 폐위돼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실린 연산군 유배 여정은 다음과 같다.



   연산군은 붉은 옷에 갓을 쓰고, 내전문을 나와서 땅에 엎드려 "내가 큰 죄를 지었는데 특별히 왕의 은혜를 입어 죽지 않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한 후 4명이 메는 평교자(종1품 이상 타는 가마)에 올라 탔다. 나인 4명, 내시 2명, 반감 1명이 따라 갔고, 중종반정에 참여한 무신 심순경. 최한홍. 유계종. 이곤이 동행하고, 정3품 당상관이 군사들과 함께 호위하였다.



   9월 2일 창덕궁 인정전 동쪽에 있는 선인문을 빠져나와 돈의문 서대문으로 한양 도성을 벗어나 연희궁(지금의 연세대학교 정문) 근처에서 첫날 유숙하였다. 둘째 날 김포, 셋째 날 통진에서 유숙한 뒤 넷째 날 강화도로 들어와 유숙하고 다섯 째 날인 9월 6일에 유배지인 교동에 도착했다.



   안치되는 곳의 울타리는 좁고 높아서 해를 볼 수 없으며, 작은 문 하나가 있어 음식을 간신히 넣을 수 있고, 연산군이 안으로 들어가지 시녀들이 목 놓아 울었다고 한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에 유배된 후 역질에 걸려 물도 마시지 못하고, 눈도 뜨지 못하다 그해 11월 8일 죽었다. 연산군이 죽자 강화에서 왕주군의 예우로 장사 지내도록 하고, 수행시녀는 3년, 수행 방자는 100일 동안 복을 입게 했다. 또 수행 내관은 백일 기한으로 서로 교체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중종은 소선(고기나 생선을 쓰지 않는 반찬)으로 수라를 올리게 하고 경연(왕에게 강론)을 정지했다.



   장사 지낸 후 강화 교동에 분묘와 사당을 짓고, 1508년(중종 3)에 3명의 백성을 선정해 지키도록 했으니 1512년(중종 7) 12월에 폐비 신씨의 상언으로 1513년 3월에 연산군을 양주 해촌(지금의 도봉구 방학동)으로 이장했다. 이후 폐비 신씨가 죽자 합장을 하고, 외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연산군의 진면목을 알기 어렵지만 당시 교동으로 폐천되어 가시울타리 안에 거처하게 되었을 때 강화 백성들이 왕을 원망하며 지어 불렀던 이가는 연산군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짐작하게 해 준다.


   충성은 거짓이요

   거동은 교동일세

   일만흥청어디두고

   석양하늘 끝 뉘 따라 가는고

   두어라, 교동 또한 각시집이니

   날새기 무방하고 조용도 하네


   연산군일기에 실려 전하는 노래다. 여기서 사모와 사모, 거동과 교동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와 가시는 말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뜻을 빌어 노래한 것이다.

   나라와 백성을 위한다는 말은 사기였고, 그 결과 옮겨 간 곳이 유배지 교동도였다는 것이다.

   권세자로서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렸던 것도 모자라 석양처럼 세력이 쇠한 때에도 각시의 집이나 찾아다닌다며 연산군을 조롱하고 회화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