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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고양(23) - #흥국사 #원효대사 #창릉천 #흥국사 만일회비 #영조

by 포리시스 2018. 9. 3.

   경기 고양(23) - #흥국사 #원효대사 #창릉천 #흥국사 만일회비 #영조대왕


  

      한낮에는 더위의 열기가 남아 전하지만, 청명한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는 가을의 하늘이다. 흥국사 입구 <寺谷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 위로 엄청난 폭우가 지나간 자국이 선명하다. 이 하천은 <창릉천>이다. 옛 이름은 <덕수천>이라 하기도 했으며 창릉천의 상류 일부지역은 <청담천>이라 부르기도 했단다.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창릉천]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서 발원하여 사기막골과 고양시 덕양구의 동서를 관통하여 한강으로 유입되는 하천이다.

고양시에서 발원하여 고양시의 한강으로 들어가는 가장 큰 하천으로 유명하다. 마을 입구에서 사찰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남짓 거리겠다. 큰 힘 들이지 않고 언덕을 오르니 사찰의 일주문이 보인다.


[사찰 오르는 길에 만난 상사화]


   일주문 앞 약수터에서 청소년들의 한 무리가 목을 축이고 있다. 사찰에 왔다 가는지 아님 주변 누리길을 다녀가는 길인지 모르겠다. 일주문 뒤로 50여 계단의 정상 부분에 원 모양의 석조물을 껴안은 듯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의 계단 중턱에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기가  있는데, 이 사찰의 연혁을 잘 알 수 있겠다 싶어 옮겨 보았다.


[흥국사 일주문]

 

   금년 8월 흥국사 주지 海松스님께서 돈을 내어 비석을 마련하고 상좌 允進스님을 開運寺에 머물고 있는 내게로 보내어 <萬日會碑記>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절의 기록을 살펴보니, 근년의 큰 업적이 만일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량을 장엄하고 像幀을 조성하여 사람들을 감동케 한 일이 자못 많다.


[일주문과 불이문]


   그러나 노스님께서는 진실한 가풍만을 준수할 뿐이요 일을 떠벌려서 기록하지 아니하였다. 그저 도량에 모여 부처님 명호를 외우고 塔廟를 장엄하고 경전을 공부하고 재계하여 계율을 지키기를 수십년을 하루같이 하였으니, 여타의 허무를 뇌까리고 실컷 노닥거리며 부처님을 속이는 무리들과 한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흥국사 현판]


   전해오기를, 이 절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해동의 화엄초조 元曉대사가 梁州 千聖山으로부터 북한산에 와서 머물면서 몇 곳의 절을 지었으니, 북한산성 서쪽의 원효대가 그 첫째요, 노고산의 흥서암이 그 다음이며, 석조약사불상도 같은 시기에 조각한 것으로서 1천백여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엄연히 모셔져 있다고 한다.


[탐방 온 청소년들]

 

   암자를 로 바꾸어 興國를 내린 것은 조선 영조 때의 일이다. 산명을 漢美로 바꾼 것은 老姑(할미)의 소리를 옮긴 것이요 별다른 의미는 없다. 영조가 잠저에 계실때에 북한산에 와서 향을 사룬 적이 있었더니, 왕위에 오른 뒤 세모에 昭寧園에 거둥하던 길에 이 절에 들렸다가 대설을 만났다.


[좋은 글귀]


   영조는 버들가지로 朝來心有喜尺雪驗豊徵 (아침나절에 기분이 상쾌하더니, 한 자 눈이 내려 풍년을 예고하네)라는 5言時句를 전각에 새겨두고, 藥師殿 3자를 써서 내거니, 사중이 모두 기뻐하였다.


[청명한 하늘  아래]


   철종 갑인년(1854) 봄에 장련군 학서사에서 옹정 신해년(1731)에 주조한 4백여 근짜리 범종과 三尊佛像, 七星木幀을 모셔왔다. 철종 무오년(1858) 여름 信士朴壽良이 거금을 희사하여 도량에 7층의 축대를 쌓았는데, 매층이 한 길씩이나 되니 이 얼마나 큰 공사인가


[편안한 경내]


   고종 정묘년(1867) 가을에 화주 晦스님이 약사전을 중건하고, 고종 병자년(1876) 여름에 화주 雷應스님이 칠성전을 짓고, 고종 무인년(1878) 가을에 玩海스님이 주선하여 내탕금을 얻어 괘불탱화를 조성하니 대단히 넓고 길었다.


[흥국사 전경]


   광무 임인년(1902)에 화주 뇌응스님이 나한전과 산신각을 세웠으며, 광무 갑진년(1904) 10會主 완해스님이 선도하여 상궁 金淨德行張淨心華, 鄭大德行과 함께 발원하여 <만일회>를 창설하였다. 만일회란 白蓮社의 이칭으로서 30년 동안 염불하며 부처님을 모실 것을 기약하는 모임이다.


[나한전과 등산객]


   그때에 대중들이 慧月스님을 선발하여 蓮社의 화주로 삼았다. 이듬해 을사년(1905) 봄에 진관사의 해송스님을 맞이하여 연사의 회주로 삼았다.


 [종각]


   융희 무신년 가을에 상궁 吳氏信士 元鶴柱가 중흥사의 金鼓를 사서 사중에 헌납하였다. 1911년 건봉사의 매스님이 연사의 성취를 위하여 양양의 논 80두락을 헌납하였으며, 같은 해 가을에 서울의 청신녀 朴信心月이 불량답을 헌납하매 절 땅을 함께 매각하여 통천의 땅을 마련하니, 1년에 도조가 4백여 말이 되었다.


[좌로부터 나한전, 약사전, 명부전]


   1912년 혜월스님이 입적하매 이듬해부터 대중의 요청에 따라 해송스님이 화주의 일을 겸임하였다. 그해 信女 鄭圓滿行3백금을 내어 상해 빈가정사판 대장경을 구입하여 사중에 보관하였다. 1913년 겨울 수실 해송스님과 뇌응. 豊谷. 虎峰스님 등이 협력하여 국유림 2698畝를 임대받으니, 원래 사유림은 3095畝였다.



   1915년 여름에 대중이 건물 232간을 짓고, 1917년에 또 향각과 동별당 214간을 지으니, 대가람이 이루어졌다. 이듬해 여름에서 겨울까지 화엄법회를 거듭 개설하였다고 한다.



   아아! 오늘날 사문의 풍조는 예전과 아주 달라서 부처님을 팔아먹고 상주물을 함부로 쓰는 것을 예사롭게 여기며 바깥에 권속과 사가를 두어 저자를 이루니, 거의 사문으로서의 행실을 잃어버린 지경이다.


[벽에 걸려있는 목탁]


   그러나 해송스님과 그 청정대중들은 연사를 맺은 이래 26년 동안 한눈을 팔지 아니하고 함께 기십만번 염불 정진하여 깊이 부법의 바다에 들어갔으니, 과연 경에 이른 바대로 연잎 위에 聖胎가 이미 향기롭구나, 또한 塔廟를 장엄하고 화엄법계를 연설하니, 이와 같은 가람은 옛날 불교가 융성했던 때에 비추어 보더라도 조금도 손색이 없거늘, 하물며 말법시대에 있어서랴!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본 경내 풍경과 북한산]


    너희들 태산. 화산과 노고산의 英靈들은 때마주어 와서 길이 산문을 보존할지어다

                                                                                불기 2956년 기미(서기 1929) 중춘일(양력 3)


[삼성각]


   나한전의 뒤로 등산로가 있다. 계단을 올라 보니 커다란 상수리나무 그늘에 아래 작은 쉼터를 조성하여 놓았다.뒤돌아 보니 사찰의 전각들이 한 눈에 들어 쏘옥 들어 온다.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조잘거리는 소리가 이 산 중턱의 어디엔가에서 산행을 하거나 탐방로를 거닐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사전]


   [한미산 흥국사 약사전]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57호이다. 이 약사전은 흥국사의 주불전이다. 흥국사는 신라 문무왕 1년(661) 원효대사가 절을 짓고 홍서사라고 이름했다. 조선 숙종 12년(1686) 절을 다시 지었고, 영조 46년(1770)에는 이 절의 약사불이 나라를 흥하게 한다고 하여 절 이름을 흥국사로 고쳤다. 이와 함께 약사전을 크게 중건하고 궁궐의 상궁들이 번갈아 머무르면서 선학을 공부하도록 허락했다.


[약사전 경관]


   현존하는 약사전의 현판은 영조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인 고종4년(1867) 승려 뇌응이 약사전을 다시 세웠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수리해 왔다. 약사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정면의 기둥머리에는 용 조각의 안초공이 창방과 평방에 직각 방향으로 놓여 결구되어 있다. 건물 내부에도 대들보 위에 직각방향으로 놓여 합각부의 하중을 받아 측면 평주와 대들보에 분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충량의 머리에 용 조각이 공포와 잘 어우러져 있다.


[동방만월세계 약사여래부처님]


   파아란 하늘 아래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다. 말로만 듣던 북한산의 여러 봉우리의 이름들,... 이곳에서 새롭게 알게 된다. 쉼터에서 보이는 북한산의 여러 고봉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속에는 어떠한 연유에서 이름 붙여졌는지 기록해 두었다. 옮겨 보았다. 


[약사전]


인수봉(人壽峰) : 고려시대 부야봉이라 부름, 조선시대 仁者樂山 仁者壽에서 유래됨

백운대(白雲臺) : 고려시대 중봉이라 부름, 조선시대 태조의 잠구시 백운에서 유래

만경대(萬景臺) : 고려시대 개성 천마산에 국망봉이라는 이름에서 유래, 후에 만경봉으로 부름


[영조께서 썼다는 약사전 편액]


원효봉(元曉峰) :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전설에서 불여짐

노적봉(露積峰) : 고려시대 적석봉으로 부르다 후에 이슬이 쌓이는 봉우리란 뜻으로 부름

의상봉(義湘峰) :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수도했다는 전설에서 붙여짐


[나한전]


용혈봉(龍穴峰) : 지세가 용을 닮았다하여 붙여짐

용출봉(龍出峰) : 용이 솟아오르듯 뾰쪽하여 이름 붙여짐

나월봉(蘿月峰) : 고려때 개성 천마산 나월봉에서 유래됨(봉우리가 달 모양을 닮았다하여 붙여짐)


[흥국사 전경]


보현봉(普賢峰) : 문수봉과 마주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

나한봉(羅漢峰) : 문수사 천연동굴의 오백나한에서 유래됨

문수봉(文殊峰) : 문수사에서 유래됨(고려 예종41109년 탄연국사가 창건함)


[나한전]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향토 유적 제34호이다. 흥국사 본전인 약사전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하여 규모가 약간 작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나한전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의 기단 위에 4개의 배수구가 있는 직사각형의 초석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가운데 계단을 두었다.


[약사전에서 본 나한전]


   나한전은 광서 4년(1878)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으며 머리에는 평방과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여러개의 공포를 짜 맞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의 문살로 장식되었으며 건물의 측면은 단청을 한 방풍판이 있으나 특별한 문양이나 조각은 보이지 않는다.


[나한전 편액]


   나한전 안에는 183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원래 나한전 정면에는 초서체로 쓴 뛰어난 필체의 <칠성각>이라 쓰여진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이 현판은 조선조 후기의 김성근이 소나무판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 법당에 나한을 모신 관례로 나한전이란 현판으로 바꾸고 건물의 명칭을 나한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불이문]


승가봉(僧伽峰) : 승가사에서 유래됨(신라경덕왕 15년 수태스님이 창건함)

비봉(碑峰) : 신라 진흥왕이 부아악(현 북한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가 있음

향로봉(香爐峰) : 탕춘대성 방향에서 바라보면 향로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짐(향림사 후봉이라 불림)

족두리봉(족두리) : 멀리서보면 봉우리의 모양이 족두리를 쓴것처럼 보이는데서 유래됨


[불이문을 통해 본 일주문]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