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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기행

#체코 #프라하 #프라하성 #카를교 #카를교탑 - 체코 프라하

by 포리시스 2020. 2. 28.

#체코 #프라하 #프라하성 #카를교 #카를교탑 - 체코 프라하




   체코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강이 블타바 강이다.



   한강의 폭 만큼 넓다 생각되지만 체육시설 등 넓은 둔치를 보유하고 있는 한강이 그래도 낫다 싶다. 



   널리 알려진 만큼 참 많은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지는 곳 같다.



   즐비하게 늘어선 고 건축물들,.....  중세의 거리를 걷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제법 느껴 볼만 하겠다.



   이곳의 야경이 참 아름답단다. 입소문 만큼이나 야경이 참 기대되었다.



   뷰가 좋은 곳이 카를 탑이다. 조금이나마 올라가서 본다는 의미가 무척이나 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다. 탑의 상층부 공간이 너무 협소하여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다 소화할 수 없다.



   탑의 지붕을 둘러 돌아 밀려서 내려오다시피 한다.



   카를 4세, 카를 4세,.....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시대적으로 우리 역사의 고려 말쯤 될 것 같은데, 블타바교와 탑, 프라하성에 대한 기록을 옮겨 본다.



   블타바 강에 처음 세워진 다리는 10세기경 나무로 만든 목조 다리였다.



   하지만 12세기에 들어와 프라하에 대홍수가 나면서 블타바 강의 물이 넘쳐 다리가 쓸려나갔다.



   12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유디트교는 독일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만들어진 돌다리였지만,



   200년 후인 1342년 겨울에 생긴 얼음 덩어리로 인해 다리가 무너졌다. 



   이후 1357년 카를 4세가 프라하 성 내 성 비트 대성당을 건축했던 건축가에게 이 다리의 건축을 맡겼다.



   그는 겨울에 얼음으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다리 밑을 거대한 교각으로 받치고 달걀 노른자를 섞어서



   돌과 돌 사이를 접착시키는 공법으로 매우 강하고 튼튼한 다리를 1407년에 완성하였다.



   구시가지와 말라스트라나를 이어주는 체코에서는 가장 처음 만들어진 돌(석조)다리가 카를교이다.



   블타바 강 위에 세워진 다리 중 유일하게 보행자 전용 다리이면서 프라하 성, 천문 시계와 함께 프라하를 대표하는 관광의 중심이다.



   전체 길이는 약 520m, 폭은 약 10m이며 30개의 성상들이 좌우 난간에 각각 마주보며 서 있다. 



   말라스트라나쪽과 구시가지쪽으로 양끝으로는 고딕 양식의 교탑이 각각 서 있다. 



   카를교 위의 성상들은 원본도 있지만 복제품도 마치 원본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복제품의 원본은 국립 박물관과 비셰흐라드 포대에 보관 중이다.



   카를교 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드는데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그리는 화가들,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 발길을 멈추게 하는 거리의 음악가들이 관광객들을 즐겁게 해 준다. 



   또한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얀 네포무츠키 성상 앞은 늘 소원을 비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카를교탑>은 1357년 카를 4세에 의해서 카를교와 함께 고딕 양식으로 세워졌다. 



   아치형의 문은 체코 왕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의미하지만 옛날에는 격자 무늬의 철문이 있어서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적인 역활도 했으며 통행료를 받는 역할도 했다. 



   현재는 카를교를 내려다 보고 프라하 성을 바라보는 전망대로 오픈되어 있다.



   <프라하 성>은 9세기 말경 보리보이 공에 의해 세워졌으며, 진흙과 돌로 된 단순한 성벽으로 해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여러 차례 증측되어 프라하 성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의 성채 단지가 된다.



   이 성은 보헤미아 왕국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체코 공화국의 정부 소재지가 되었다.



   성 내부에는 성 비투스 대성당과 수녀원 이외에도 12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200년 후 카를 4세의 주도 하에 고딕 양식으로 재건축된 왕궁의 유적이 있다.



   15세기에 후스파 전쟁으로 인한 혼란이 지나간 후 1485년 블라디슬라프 2세는 대규모 재건축 작업을 시작했다.



   보헤미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합병된 이후 성은 또 다시 변화를 겪게 되었는데,



   특히 루돌프 2세 때는 그가 16세기 말 이 성을 주요 거처로 삼으면서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성은 르네상스 풍으로 재건축되었고, '왕실 정원', '스페인 홀', 사격장, 공놀이 경기장 등 여러 부분이 새로이 증축되었다.



   30년 전쟁(1618~1648) 동안 입은 약탈의 피해로 프라하가 누리던 번영은 쇠퇴했으며,



   18세기 동안에도 곳곳에서 재건축 작업이 이루어지긴 했으나,



   프라하는 빈이 누리는 제국다운 호화로움을 따라가려 애쓰는 지방 도시가 되었을 뿐이었다.



   20세기에 프라하의 성은 체코의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실제적인 표상으로 새로이 주목받게 되었는데,



   특히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에 그랬다.



   1989년의 '벨벳 혁명' 이후 프라하 성은 개조 작업을 거쳐 현재는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다.


   성 안에는 여러 개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 중에는 루돌프 2세가 수집한 체코와 유럽 예술품 컬렉션도 있다.(네이버에서 퍼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