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기행
#원주 강원감영 #사적 제439호
by 포리시스
2022. 7. 30.
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85에 있는 <원주 강원감영>은 사적 제439호로 관찰사가 주재하며 정무를 보던 곳이다. 강원감영은 1395년(태조 4)부터 1895년(고종 32)까지 500년 동안 유지 되었다. 옛 건물들이 남아 있고 건물터가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시대 감영의 건축형태를 잘 알려주며, 관아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강원감영 정문 - 포정루
포정루에서 본 중삼문
중삼문 - 관동관찰사영문
중삼문에서 본 포정루
관찰사 및 목사 선정비 - 강원감영의 중삼문과 내삼문 사이에는 총 17기의 비석이 있다. 이 비석들은 조선시대 때 강원감영과 원주목관아에서 관찰사와 목사로 재직하였던 관인들의 업적을 남기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선정비는 관찰사와 목사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되기도 하였으며, 동시에 새로 부임하는 관찰사나 목사를 경계하는 의미도 깃들어 있다. 원주 지역 곳곳에는 강원도 관찰사와 원주목사의 선정비가 많이 세워졌으나, 대부분 사라져 찾기가 어렵고 강원감영을 복원하면서 일부 남아 있던 선정비를 옮겨왔다. 이 중 2기의 비석은 후원 권역에 있던 원주우체국을 철거하면 서 찾은 것이다.
내삼문 - 내삼문의 고유한 이름은 징청문으로, 포정루. 중삼문을 지나 관찰사의 집무공간인 선화당과 직접 연결되는 문이다. 내삼문은 강원감영의 진입공간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으며, 방문자는 이곳에서 관찰사를 만나기 전 마지막 신원확인 절차를 거쳤다. 징청문이란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방문자는 문을 들어서면서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이는 관찰사를 만나러 온 방문개뿐만 아니라 관찰사를 포함하여 이 문을 들어서는 모든 관인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다.
공방고 터 - 조선시대 감영에는 지방의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육방이 있었는데, 그 중 공방은 공용지를 관리하고, 건축물을 짓거나 보수하는 역할을 했다. 공방고 터는 공방이 있던 자리로 고는 창고보다는 기관을 뜻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강원감영은 원주목과 같은 관아를 사용했는데, 공방고 또한 원주목과 함께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당시, 바닥에서 온돌시설 일부가 드러나 공방고에 난방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선화당 - 강원감영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임금의 덕을 선양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고종 32년 강원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관찰사가 강원도의 정무를 보던 집무실인 정청이다. 관찰사는 이곳에서 강원도에 속한 각 지역의 행정. 농정. 조세. 민원. 군사. 재판 등에 대한 업무를 수행했다. 선화당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현종 6년 이만영 관찰사가 다시 짓기 시작하여 1667년 이후산 관찰사 때 완공되었다. 선화당은 한때 일본군수비대, 원성군청, 강원도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이곳 선화당을 거쳐 간 관찰사는 500여명으로, 황희, 정철 등도 이 선화당에서 백성을 살폈다.
행각 - 자료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옥사와 형틀
옥사 내 순교자
나막신
쌍륙말
글씨 새긴 암키와
수키와
분청사기음각문병과 백자병
갈유병
태조부터 고종까지 500년간 임명되었던 관찰사 명단
과거시험 우등답지 묶음
감영 내 전경
선화당 뒤 후원
영주관
일각문과 선화당
채약오, 영주관, 선화당
영주관과 봉래각
책방
선화당
선화당
선화당과 내아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