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나 만의 택리지를 꿈꾸며,...
경상도 기행

#경북 칠곡 #다부동전투 #구국용사 충혼비 #구국경찰 충혼비 #볼링앨리전투

by 포리시스 2023. 3. 14.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다부동 전투]

경북 칠곡군 가산면 호국로 1486에 <다부동 전적기년관>이 있다. 자차를 이용할 경우 중앙고속도로 다부TG를 나오면 바로 찾을 수 있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앞 구국관과 주변 풍경

 

산으로 둘러쌓인 이곳에 누가 올까 싶었지만, 가족 단위로 방문하신 분들의 모습이 제법 눈에 띄어 보기 좋았다.

 

다부동 전적기념관 계단

 

얼굴 한 번 본적 없지만, 이곳에 잠들어 계신 많은 분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은 서로 서로 닮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 제1사단장 육군준장 백선엽 호국구민비(우측) -&nbsp; 6.25전쟁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51년 4월 주민들이 칠곡군 가산면 다부1리 산97-1번지(소야고개)에 세웠던 호국구민비로서 2003년 8월 29일 기념관으로 이전하였다.

 

전적기념관의 옥상에서 바라보는 다부동의 풍경은 우측 아래로 아담한 건물들의 마을이 내려다 보이고, 이 마을을 보호하 듯 360도 빼곡히 산으로 둘러져 있는 지형이다.

 

전적기념관의 조형물

 

앞(북쪽)으로 펼쳐진 능선의 봉우리에는 당시 공방이 치열했던 고지의 이름을 표식해 놓았는데,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하나씩 일치시켜 보았다.

 

구국경찰 충혼비

 

이곳에서 30일간 12번의 공방전이 있었다고 한다.  2~3일에 한 번은 고지 탈환을 위한 전진과 후퇴에 희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해 볼 수 있다.

 

6.25전쟁 다부동 참전 경찰관비

 

다부동 전투의 승리로 인천상륙작전과 북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한 많은 분들의 희생을 늘 잊지 말아야겠다.

 

구국용사 충혼비

 

전적기념관 홈페이지와 안내문의 내용을 옮겨 보았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지역으로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5번, 25번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으로 향하는 지방도로(908번 도로)의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다부동전적기념관과 참전국 국기

 

마을을 중심으로 좌측(북서쪽)에는 유학산(839m)이 북방을 향하여 횡격실을 이루고, 우측 동쪽에는 가산(902m)이 있어 방어에 유리한 반면,

 

기념관 좌측의 부조

 

만약 이 방어선이 돌파되면 10km 남쪽의 도덕산 일대까지 아군 철수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대구가 적 포병 사정권내에 들어가게 되어 다부동은 대구 방어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념관 우측의 부조

 

[다부동 전투]

다부동전투는 1950년 7월 29일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한치의 땅도 적에게 빼앗기면 수많은 전우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끝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라고 낙동강 방어선의 사수를 명령함으로써,

 

기념관 내부

 

한국군 제1사단이 1950년 8월 1일 낙동강을 도하한지 3일이 지난 4일에 낙정리(다부동 북방 43km)에서 시작되었으며 같은해 9월 16일 개시된 반격작전의 일환으로 다부동 북서쪽 11km 지점의 천생산을 탈환한 후 잔적을 소탕한 9월 24일에 끝났다.

 

기념관 내부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되자 김일성은 7월 21일 수안보 전선사령부까지 내려와서 8.15광복절 기념행사를 대구에서 거행하겠다는 망상하에 대구 공략을 위해 북한군 5개사단(3사단-성주, 10사단-고령, 13사단-상주, 15사단-선산, 1사단-효령)을 투입하여 총공세를 펼쳤으며,

 

기념관 내부

 

이에 아군은 왜관 303고지(자고산) - 328고지 - 518고지(숲데미산) - 839고지(유학산) - 다부동 - 중구동에 이르는 Y방어선을 구축하고 적과 공방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기념관 내부

 

이때, 8월 16일 유엔군은 B-29 폭격기 98대를 칠곡 약목 및 구미3공단 지역일대에 투입시켜 융단폭격을 감행하였고 북한군 13사단 기갑부대 T-34전차와 미 제25사단 27연대 M-26전차와의 최초 전차전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기념관 내부

 

55일 동안 이곳 전투에서 아군은 10,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적군은 17,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기념관 내부

 

[6. 25 전쟁 최초의 전차전, 볼링앨리 전투]

8월 21일 저녁, 다부동에서는 6. 25전쟁 최초의 전차전이 펼쳐졌다.

 

기념관 내부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북한군은 조공으로 국군 1사단 11연대를, 주공으로 미 27연대를 향해 대규모 야간공격을 감행해왔다.

 

기념관 내부

 

동시에 북한군은 신주막에서 다부동 접근로의 양측 능선을 따라 각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전진시키고 있었다.

 

기념관 내부

 

이에 미군은 모든 화력을 집중하여 북한군 보병과 전차를 분리시킨 후, 전차와 자주포를 공격하였다.

 

기념관 내부

 

이때 쌍방의 전차포에서 발사된 철갑탄들이 5시간 동안이나 불꽃을 튀기며 굉음으로 골짜기를 진동시켰다.

 

기념관 옥상 조형물과 북쪽 고지 안내문

 

전차포탄이 어둠을 뚫고 좁은 골짜기를 따라 날아가는 광경을 바라보던 미군들은 그 모습이 마치 볼링공이 핀을 향해 재빠르게 미끄러져 가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그날의 격전에 볼링앨리(Bowling Alley)전투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념관을 다녀가는분들

 

다음날 북한군 전차 9대와 자주포 4문, 수대의 트럭 그리고 1천 3백여 구의 시신이 확인되었는데, 이 전투로 인해 대구를 향해 진격하던 북한군 13사단 전력의 3/4이 손실되었던 것이다.

 

40mm 대공포, 122mm 곡사포, 57mm 곡사포

 

더욱이 8월 22일에는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정봉욱 중좌)이 작전지도를 갖고 국군에게 귀순함으로써 북한군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었다.

 

T-37C

 

[구국경찰 충혼비]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그해 8월 북한군은 대구 점령을 목표로 낙동강 전투력을 증강하여 총 공격을 개시하면서 시내중심가에 포탄이 떨어지고 영천이 함락되는 등 전황이 극도로 불리하자

 

다부동 전적기념관 전경

 

정부를 비롯한 미8군사령부까지 부산으로 이동하고 마지막으로 경찰도 철수하라는 요청이 있었으나, 당시 경찰 총수인 조병옥 내무부장관은 "대구를 적에게 내주는 것은 나라를 내 주는 것과 같다"며

 

기념관 주변 풍경

 

우리 경찰만이라도 대구를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는 필사의 굳은 결의로 공포에 사로잡힌 70만 대구 시민을 보호하고 군과 더불어 대구방어에 큰 몫을 다함으로써

 

호크미사일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 발판을 만들어 전쟁국면을 반전시키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구국경찰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기념관을 내려오며 본 나이키유도탄과 다부동 풍경

 

특히, 경찰은 낙동강 전투에 15,000여명이 참전하여 그 중 전사자 기록에 있는 197명을 비롯한 수많은 경찰이 고귀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나라를 구한 "대구사수정신"은 6.25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8인치 자주포, M60A3 탱크, M48A2C 전차, M113장갑차, CM6614 장갑차

 

이에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영령들의 넋을 위로하고 구국경찰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며 산 교육의 터전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이곳 다부동전적기념관에 모든 경찰의 뜻을 모아 <구국경찰 충혼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다부리 벽화골목

 

[구국용사 충혼비]

<구국용사 충혼비>는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24일까지 이곳 다부동 전투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장렬히 산화하신 국군 제1사단, 제8사단 10연대, 제7사단 3연대 1대대,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 27연대, 미 제2사단 23연대 장별들의 영령을 추모하고, 그 넋을 기리며 후세에 전쟁의 산 교훈으로 삼고자 김영삼 대통령이 "구국용사 충혼비" 비문을 직접 쓰시고 1995년 6월 24일 당시 전투에 참전한 용사들과 함께 제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화는 지킬 때 가능한 것이라 여긴다.

 

명각비는 다부동전투에 참전한 장병들의 명단을 병적확인을 거쳐서 확인된 전사자 및 생존자의 당시 부대와 계급, 이름을 새긴 비이며, 구국용사의 묘는 1994년 9월부터 1997년 4월까지 8차례에 걸쳐 육군 제50사단 장병들이 유학산 일대에서 발굴한 259점의 유해를 합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