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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기행

#강원 강릉 #객사 #임영관 삼문 #국보 제51호 #전대청 #동대청, #서헌 #중대청 #임영관 #공민왕 #집경전 터

by 포리시스 2023. 8. 13.

<강릉 대도호부 관아>는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걸쳐 중앙 관리들이 강릉에 내려오면 머물던 건물터로, <관아와 공해>, <객사> 등을 합해 모두 313칸 규모로 강릉의 행정 중심공간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임영관 삼 문과 칠사당을 제외하고 대부분 훼손되었다고 한다.

 

임영관 삼 문

 

<객사>는 관아의 뒤쪽으로의 공간에 <임영관 삼 문>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현재 <전대청>, <동대청>, <서헌>의 건물과 그 앞에 <중대청>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고, 우측의 공간에 <집경전 터>가 남아 있다.

 

임영관(객사) 전경 - 삼문 대신 담장으로 길을 내었다.

 

이 공간에 대하여 현장 안내문과 문화재청, 강릉시청의 홈페이지에서 내용을 옮겨 임영관(객사)의 이야기를 적어 본다.

 

국보 제51호 - 임영관 삼 문

 

[임영관 삼문]

고려시대에 지은 강릉 객사의 정문으로, 현재 객사 건물은 없어지고 이 문만 남아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 지붕의 기와가 조금은 흠이겠다.

 

객사란 고려와 조선시대 때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관아의 하나로 왕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으며,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나 사신들이 묵기도 하였다.

 

중대청

 

이 객사는 고려 태조 19년(936)에 총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이라 하였는데, 문루에 걸려 있는 ‘임영관’이란 현판은 공민왕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임영관 삼 문 주심포양식과 배흘림 기둥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학교 건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교가 헐린 뒤 1967년에 강릉 경찰서가 들어서게 되고 현재는 마당에 객사문만 남아 있다.

 

#서헌

 

남산의 오성정·금산의 월화정·경포의 방해정은 객사의 일부를 옮겨 지은 것이다. 문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중대청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간결한 형태로 꾸몄다. 앞면 3칸에는 커다란 널판문을 달았으며, 기둥은 가운데 부분이 볼록한 배흘림 형태이다.

 

임영관 삼 문

 

간결하고 소박하지만 세부건축 재료에서 보이는 세련된 조각 솜씨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문화재청>

 

#중대청

 

[망궐행례 의식]

망궐행례는 주로 외직에 근무하는 지방관이 지방관청이나, 황의 상징인 전패를 모신 객사에서 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의식이다.

 

임영관 삼 문의 문짝

 

지방관은 객사 중앙의 정청에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 정월 초하루와 임금이나 왕비의 탄신일, 한식, 단오, 추석, 동지 등의 명절에 궁궐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으며 대한제국 이후 폐지되었다.

 

중대청에서 본 동대청

 

[동대청]

이 건물은 좌측의 서헌과 더불어 사신 및 중앙관료들의 숙식 및 연회, 재판, 국가 경사 및 애사시 망곡 등을 하던 곳이다. 구조는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헌보다 규모가 더 크다.

 

임영관 삼 문

 

이용규정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수교집록에 의하면 문.무관 구별없이 사신일행 중 품계가 2품이상은 동대청을 이용했다는 것으로 미루어 서헌보다 위계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중대청(좌), 전대청(가운데), 동대청(우)

 

[전대청]

이 건물은 객사의 정청이자 중심공간이다. 전대청에는 왕의 전패를 모셔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망궐례를 행하였던 곳으로 좌.우측의 동대청과 서헌에 비해 지붕이 한 단계 높게 지어졌다.

 

집경전 터

 

[서헌]

이 건물은 우측의 동대청과 더불어 사신등이 숙식을 하던 곳으로 구조는 온돌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대청보다 규모가 작다.

 

임영관(객사)의 전경

 

이용규정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수교집록에 의하면 사신일행 중 정3품 관료들이 서헌을 사용했다고 한다.

 

중대청의 측면

 

[중대청]

이 건물은 고려 건축양식으로 전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의 용도에 대해서는 관찰사의 순력 등을 위한 장소로 추정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중대청(좌)와 전대청(우) - 전대청의 좌우로 동대청, 서헌 건물이 한 층 낮게 지어져 있다.

 

[집경전 터]

임진왜란 직후 경주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옮겨와 모셨던 곳으로 1631년 3월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전대청 건물의 뒤에서 본 모습

 

[강릉 임영관 삼문]

강릉임영관삼문은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에 있는 문 중 하나로, 1962년에 국보 제51호로 지정된 강릉의 자랑이자 명소로 자리 잡았다.

 

전대청의 세 건물

 

옛 명칭은 '강릉 객사문'이었는데, 2010년 4월부터 '임영관 삼 문'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영관 삼 문은 단층의 맞배지붕으로 3칸 2호의 장중한 형태를 갖춘 우수한 팔각 문이다.

 

객사의 뒤에서 본 풍경

 

건립되었던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건축 방식으로 보아서 조선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한국 목조 건축사상 뛰어난 구조와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선조들이 물려준 아름다운 유산이다.

 

서헌

 

[객사]

객사는 옛날 중앙에서 오는 관리나 내빈을 대접하고 묵게 하던 시설을 일컫는데, 임영관 삼 문은 객사의 문 이름이다.

 

서헌(좌), 전대청(가운데), 동대청(우)

 

임영관 삼 문이 있는 강릉 객사는 고려 태조 때에 세워진 목조건물로 그 무게 있고 두터워 보이는 아름다움과 섬세한 솜씨가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인정되어 국보 제51호로 지정되었다.

 

전대청

 

지금의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낙산사 가는 길에 들러서 쓴 친필이다.

 

공민왕이 직접 쓴 임영관 현판

 

객사 문은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그 중후 미와 구조의 정교함은 우리나라에서 그 유리를 찾아보기 드문 건축물이다.

 

전대청과 동대청 건물 사이

 

또한 기둥의 배흘림은 그 어느 건물보다도 심하며, 전체적으로 볼 때 아주 오래된 인상을 주며 장식화 경향이 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며 수덕사 대웅전보다 건축연대가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

 

보고 또 보아도 아름다운 건축물 임영관 삼 문이다.

 

현재는 객사 문만이 남아있다. 절집이 아닌 목조건물로는 이 객사 문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강릉시청> 이 곳에 있던 건축물들이 주변의 정자,누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월화정의 건물도 이곳에 있던 건물이였다는 조금 아쉬운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