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희문 가옥에 대한 설명 뿐만 아니라 가계도까지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블로거 한국의 숨결 님>을 발견하였다. 다녀온 곳의 문화재 안내문의 내용보다 섬세하게 잘 기록되어 있어 옮겨 본다.
권희문 가옥의 담장
[ 권희문 가옥 ]
권희문 가옥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22호로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산리 177-1번지(오메길 9)에 위치한다.
권희문 가옥의 서쪽 문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이 영창대군(1606~1614, 선조의 유일한 적자)을 유폐시키면서 서인 탄압을 할 때 권희문(1916~2008)의 10대조가 이곳으로 피하면서 정착하여 처음 입향조가 되었다고 하며, 이 가옥은 권희문의 5대조 때 같은 마을에 있던 종갓집에서 살림을 나면서 지은 가옥이라고 전하고 있다.
권희문 가옥의 서쪽문, 원래 정문이였다고 한다
가옥의 건립연대 경우 사랑채는 1773년(영조 49)의 건물이고, 안채는 1866년(고종 23)에 지은 건물이다.
북쪽의 문 - 근대로 접어들면서 건물을 변경
사랑채는 원래 다른 지역에 있던 건물로 1875년(고종 12) 가옥 전체를 대규모로 수리할 때 옮겨와 지금의 터에 다시 지었다고 전하여진다.
사랑채와 중문을 두고 바깥채이다. -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변형이 되었다.
이는 가옥을 처음 지을 때의 기록인 ‘창건기’와 보수할 때 적은 ‘중건기’가 같은 필체인 것으로 보아 1875년 보수할 때 ‘창건기’와 ‘중건기’를 같이 기록하였으며 이때 사랑채도 다시 지었다는 내용이 있다.
문갑채 - 서문 - 사랑채
그리고 1969년에 대대적으로 중수하면서 사랑채 화단 앞의 서문이 대문이었으나 좁아서 마차가 드나들기에 어렵고 대문 방향이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1973년에 따로 문갑채를 건립하였다.
문갑채와 서문, 문화재 안내문
[ 권희문 가옥의 건립 배경 ]
다만 건립 배경을 살펴보면 2021년 국제문화기술진흥원 Vol.7 No.4 (2021.11) 권윤희, 김귀석이 발표한 ‘朝鮮 後期 湖南地方 兩班家屋의 審美境界 고찰 – 전북 장수의 權熙文 家屋을 中心으로 - ’논문에 의하면 권희문 12대조 권인이 장수에 정착하였고, 권희문의 13대조는 권상(1508~1589)이라 하였으며, 넷째 아들이라 하였다.
문갑채
그러나 <<국조인물고>> 권37 음사(蔭仕)에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1556~1618)의 권상의 비명(權常 碑銘)에 의하면 권상은 ‘나모[羅某, 어모장군(禦侮將軍) 나운걸(羅雲傑)]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3녀를 낳았다.
사랑채와 안채로 중문
큰아들 권수는 정묘년(1567)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승정원 좌부승지가 되었고, 둘째 아들 권황은 병자년(1576)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의 음덕으로 고양군수에 보임되었으며, 셋째 아들 권희는 갑신년(1584) 문과에 합격하여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고,
사랑채
넷째 아들 권훤은 무자년(1588)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며, 다섯째 아들 권협은 정축년(1577) 문과에 합격하였는데 바로 나에게 찾아와 비명을 부탁한 사람이고 그의 형 권희와 나는 교분이 두텁다.
큰딸은 학생 정희로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내금위 한부에게 시집가고 셋째 딸은 현감 신길원에게 시집가 일찍 죽었다.
억왕서 현판 - 산 높고 풍족한 들에 깃들인다
안팎의 자손들이 60여 명이다.’고 되어 있다. 즉 넷째 아들은 요절하였다고 되어있어 다소 의문점이 드는 대목이며, 권상이 관료 시절 초기에 운봉현감(옛 전북 남원군 운봉면 일대)으로 부임한 적은 있다.
사량채에 걸려있는 현판과 주련
또 권희문의 9대조로 알려진 권숙(1655~1716, 후에 권집으로 개명)은 경상도 안음(옛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출생하였으나, 전라북도 남원군 대강면 서림촌에서 살았다고 하며, 시문집으로 <<화산유고>>가 있다. 이부분에 대하여서는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閑來無事不從容(한래무사부종용) 한가롭자 일마다 조용하지 아니함이 없고
[ 가옥의 배치 ]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의 공간 구성을 따르고 있다. 내외법(조선 후기 남녀가 마주 보지 않는다는 관습법)에 의해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분했으며, 안채 뒤에는 뒤뜰이 있다. ‘ㄱ’자 모양의 안채 전면에는 – 자형 사랑채가 있고, 안채 서쪽에 별채가 직각으로 배치되어 안마당은 ㅁ자형을 이룬다.
睡覺東窓日已紅(수각동창일이홍) 잠 깨자 동창에 해가 이미 붉었구나
[ 사랑채 ]
사랑채의 상량문을 보면 “崇禎 紀元後 癸巳三月 初十日卯時 立柱未時 上樑乙亥五日重修(숭정 기원후 계사 삼월 초십일묘시입주미시 상량을해오일중수)”이라 되어 있는데,
萬物靜觀皆自得(만물정관개자득) 만물을 조용히 바라보면 모두 스스로 득의함이요
1866년(고종 23) 안채를 지은 후 1875(고종 12)에 가옥 전체를 대규모로 수리할 때 1773년(영조 49)의 건축물이던 사랑채를 이건해서 같이 중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권희문의 증조인 권윤수(1837~1876)의 생정 시기로 이때에는 이미 만석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사랑채에는 ‘억왕서(嶷汪棲, 산 높고 풍족한 들에 깃들인다)‘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억왕(嶷汪)은 높고 깊은 산과 휘돌아가는 물을 뜻하여 자연을 말하고, 서(棲)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사랑채 툇마루
이는 만석꾼으로서의 자연에서 모든 것을 얻으며, 따라서 만인에게 베풂을 실행해야 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안채 벽의 장식 - 꽃밭에 돌담을 쌓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한강 이남의 선비 중에 이 사랑채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선비가 다녀갔다고 한다. 또한 선비들은 이곳에서 머물며 숙식을 제공받았으며, 발병하면 치료까지 받았다고 한다.
아래채(좌)와 안채(우)
또 주변 마을의 많은 백성도 발병하면 사랑채에 와 치료받을 정도로 베풂을 실천한 사랑채이다. 사랑채는 4칸 규모의 –자형 팔작지붕 가옥이다.
'ㄱ'자 형태의 안채
60cm 높이의 잡석 기단 위에 세웠으며, 2칸의 대청마루에 이어 윗방, 사랑방이 연이어 있다. 각 방은 툇마루가 있어 서로 연결되며 마루 끝에는 계자 난간을 둘렀다.
바깥채
뒤쪽 툇간(退間, 집채의 간살 밖에다 딴 기둥을 세워 만든 조붓한 간살)은 서고 또는 벽장, 골방 등의 용도로 건축하였다. 사랑채 동편에는 중문과 외양간, 창고로 이용하는 바깥채가 있다.
뒤에서 본 사랑채
[ 안채 ]
안채는 1886(고종 23)년에 건립하고, 1875년(고종 12)에 중수하였으며, 권희문의 증조인 권윤수(1837~1876)는 거실에 ‘嶷汪(억왕)’이라 편액 하였는데, 이 또한 사랑채에 걸린 현판과 동일하다.
안채
안채는 맞배집으로서 박공(건축물의 측면 중 지붕과 연관되는 삼각형 부분)면에 도리(서까래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 위에 건너지르는 나무)의 뺄목(부재 머리가 다른 부재의 구멍이나 홈을 뚫고 내민 부분)이 충분히 뻗어 나와 단정한 기품을 느낄 수 있고,
안채
3칸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작은방과 찬방(도장방, 주로 여자들이 거처하는 방)이 있으며, 큰방과 부엌이 찬방 전면으로 돌출된 ‘ㄱ’자형 평면이다.
안채
3칸의 대청마루 중 끝의 한 칸은 신위[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지방(제사를 지낼 때 종이에 쓰는 글)]를 모시는 사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래 집 북서쪽에 별도의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안채(좌)와 사랑채(우) - 잘가꾸었다
지금은 작은방을 입식 부엌으로 바꾸어 사용하며 부엌이 있던 자리에는 방을 만들었다.
뒷쪽 정원에서 본 안채
[ 종가의 가양주와 점주 ]
권희문 가옥에는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접대하면서 발전해온 음식 문화가 있다.
대청마루 3칸의 문 - 제일 좌측의 공간이 사당방인듯 싶다
그중에서도 집에 묵었던 많은 선비들의 벗인 술을 만들기 위해 빚었다는 가양주(家釀酒 : 종갓집에서 빚는 술)가 유명하다.
대청마루 문
한여름 더위를 넘겨도 변하지 않는 약주라 하여 이름이 붙여진 과하주(過夏酒) 및 식솔식솔(식술, 묶은 쌀로 빚은 술), 백일주, 천일주, 떡술떡술(구멍떡으로 빚은 달달한 술), 점주 등 다양한 전통주가 지금까지 계승되어 전해지고 있다.
뒷 정원에서 본 안채(좌), 사랑채(가운데), 바깥채(우)
특히 이 가옥의 점주(粘酒 : 끈적임이 강한 동동주)는 여름에 어울리는 고급술이며 멥쌀과 누룩을 주원료로 빚은 술로 물을 적게 사용하였기에 단맛과 끈적임이 강하다.
정원에서 본 안채
장수군의 대표적 전통가옥인 권희문 가옥에서는 조선시대 상류사회의 정취와 문화를 흠뻑 느낄 수 있으며,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에 있는 장재영 가옥과 함께 장수군을 대표하는 만석꾼 집이다. <블로거 한국의 숨결 님>
사랑채와 바깥채
사랑채 주련에 쓰여진 글귀의 주인공은 정호이다. 북송의 유학자로 가을날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 즐거움을 읊은 시 <秋日偶成>이다. 주인공과 시의 내용이다.
바깥채의 주련
[ 程顥(정호) : (1032~1085) ]
북송(北宋) 중기의 유학자,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시호 순(純). 주돈이(周敦頤 : 濂溪)의 門人, 존칭으로 명도선생이라 불리고, 동생 정이와 함께 이정자(二程子)로 알려졌다.
바깥채의 주련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성즉이설(性則理說)’을 주창하였는데, 그의 사상은 동생 정이를 거쳐 주자(朱子)에게 큰 영향을 주어 송나라 새 유학의 기초가 되었고, 정주학(程朱學)의 중핵을 이루었다.
바깥채의 주련
저서에 <정성서>, <식인편> 등이 있다. 그의 전기는 주자의 <이락연원록>에서, 유저(遺著)는 서필달(徐必達)의 <이정전서(二程全書)>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