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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기행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 회랑을 짓고, ‘미륵사’라 하였다

by 포리시스 2026. 2. 3.

이렇듯 드넓은 터에 건물의 형태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곳곳에 다듬어진 돌무지와 복원을 위한 세심한 흔적, 그리고 세워둔 안내문의 내용을 음미해 보면서 그 옛날 웅장했던 미륵사의 모습을 한 번 그려보았다.

 

미륵사지

 

[ 백제역사유적지구 ]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대한민국 중.서부에 있는 백제의 왕도와 밀접하게 연관딘 유적으로, 주변국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하여 문화적 발전이 절정에 이른 백제 후기(475~660)를 대표하는 유산이다.

 

미륵사지안내도

 

백제는 기원전 18년부터 기원후 660년까지 약 700년간 이어진 한국의 고대 왕국 중 하나이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백제역사유적지구는 백제의 도읍들과 연관된 백제 후기의 유산으로, 웅진 왕도 관련 유적인 공산성과 송산리고분군, 사비도성 관련 유적인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 금마저(익산)왕도와 관련된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등 8개의 유적으로 구성된 연속유산이다.

 

미륵사지 서탑

 

[ 익산 미륵사지 ]

미륵사지는 남아 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 가운데 가장 크며, 미륵사는 무왕 대(600~641,재위)에 지어졌다.

 

미륵사지 서탑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무왕과 왕비가 사자사에 가는 길에 지금의 미륵산인 용화산 밑의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연못을 메우고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 회랑(주요 공간을 둘러싸며 지붕이 있는 보고)을 짓고, ‘미륵사’라 하였다고 한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1980년부터 1994년까지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하였는데, 세 곳에 각각 탑과 법당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것이 확인되어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당간지주와 서탑

 

지붕 양 끝을 장식하는 기화인 치미, 녹색 유약을 입혀 서까래 끝에 놓아 장식하는 기와인 녹유서까래기와, 석등 받침돌인 석등하대석, 전각이나 탑의 처마에 매다는 풍경인 금동풍탁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동쪽 연못

 

출토된 유물과 절의 독특한 배치 방식에서 백제 문화의 독창성과 탁월함을 엿볼 수 있다.

 

미륵사지

 

법당 아래 빈 공간이 있었고 고려와 조선 시대의 건물터에서 온돌이 발견되는 등 건물터와 유물로 보아 미륵사가 1600년대까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간지주와 동탑

 

미륵사지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석탑으로 2001년부터 해체. 보수하기 시작하여 2017년에 조립을 마쳤다.

 

당간지주와 서탑

 

2009년에 석탑을 해체하다가 탑 안의 중심에 세운 기둥돌 1층에서 사리를 넣으려고 만든 구멍을 발견하였으며, 이 사리공 안에서 사리를 넣어 둔 항아리인 금제사리호 등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동쪽 당간지주에서 본 서쪽 당간지주와 서탑

 

또한, 미륵사를 짓고 탑을 세운 내용을 기록한 사리봉영기도 함께 발견하였다. 미륵사지에는 석탑, 당간지주사찰 문 앞에 깃발이나 불화를 꽂는 기둥 받침대, 석등하대석, 금동향로, 사리장엄구를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동탑

 

미륵사지는 독창적인 가람절, 사찰 배치, 목조 건축 기법을 알 수 있는 석탑, 백제 공예문화의 수준을 보여 주는 사리장엄구, 유적의 연대를 명확히 밝혀 적어 둔 사리봉영기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동탑

 

[ 익산 미륵사지 당간지주 ]

당간은 사찰에서 행사나 의식을 치를 때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깃발인 당을 달아 두는 길쭉한 깃대이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받쳐주는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동탑 내부로의 출입문

 

주로 사찰 입구에 세워 그 곳이 신성한 공간임을 알렸다. 후대 남회랑 안마당에 약 90cm 간격으로 서 있는 당간지주 2기는 크기와 형태, 제작 기법이 서로 같다.

 

탑 내부의 중심기둥(심주)

 

현재 당간은 사라직 지주만 남아 있는데, 미륵사지 서탑을 해체할 때 탑 안에서 나온 석재가 당간 형태임을 보아 당간은 돌로 만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원 금당터(앞), 동원 승방터(뒤)

 

지주의 높이는 약 4.5m이고, 바깥 면에는 가장자리와 중앙에 띠가 있다. 지주의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하기 위한 구멍이 뚫려 있다. 지주 아래에는 기단이 있으며, 기단 각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다.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

 

[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

이곳에 전시된 석조물들은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사용되던 것으로, 1980년부터 1994년까지 15년간 미륵사지 발굴 조사에서 거두어 정리한 것이다.

 

동원 금당 터

 

동원의 석탑에서 사용된 석탑 부재와 방형이나 원형 등 여러 가지 형태의 건물 초석, 석등과 당간지주에 사용된 부재, 건물의 기초부에 사용된 기단석, 맷돌 등 22종류의 석조물 6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동원 금당 터

 

[ 동원 금당 터 ]

금당은 불상을 모신 법당으로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금당이라는 이름에서 금색의 불상을 모셨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건물 안을 금색으로 칠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동원 금당 터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삼존이 나타났던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을 3곳에 두었다고 하는데, 발굴 조사에서도 동원, 서원, 중원 즉, 삼원에 각각 금당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동원 승방 터

 

이곳은 동원으로 금당이 있던 곳이며, 삼원의 금당 터 중에서 기단부 석재가 가장 많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원 금당 터에서 본 동탑

 

2층으로 된 기단의 남쪽과 북쪽에 계단이 있고, 기단 내부에는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초석이 있다.

 

서탑

 

초석의 높이가 1m 정도로 높아 금당 바닥에 공간이 생기며, 초석 윗부분에는 다른 석재나 목재를 수평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이 있다.

 

동원 승방 터

 

이 금당 터는 <삼국유사>엣 신라 문무왕이 용이 되어 드나들었다는 경주 감은사 금당 구조와 유사한 점이 있다.

 

동원 금당 터 앞 동탑

 

[ 동원 승방 터 ]

승방은 승려들이 생활하는 공간을 말한다. 미륵사 터에는 동원과 서원의 북회랑 터에 연결된 승방 터 2곳과 강당 터 북쪽에 승방 터 1곳이 있다.

 

중원 금당터

 

동원과 서원 승방은 길이 65m, 폭 14m이고, 안쪽 한 변의 길이가 6m인 방 2개가 남북으로 한 조를 이루며 4조씩 있다.

 

강당 터

 

승방은 사찰의 안팎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방을 중심으로 사찰 안쪽과 바깥쪽에 복도와 같은 공간이 있다.

 

강당 터

 

발굴했을 때 동원 승방 터에는 구들 시설과 아궁이의 흔적이 있었으며, 통일신라 헌안왕 2년(858)을 뜻하는 ‘대중12년, 미륵사’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 불에 탄 곡식 및 중국 당나라에서 만든 찻그릇인 백자완 등이 나왔다. 북쪽 기단 외부에서는 백제시대 장식기와인 치미가 발견되었다.

 

동원 승방터에서 본 동원 금당 터와 동탑

 

[ 강당 터 ]

강당은 사찰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불경을 강의하고 설법하며, 법회와 같은 불교 의식을 하던 곳이다.

 

 

강당 터는 중원 목탑과 금당터를 지나는 중심선을 그렸을 때 금당 터 북쪽에 있다.

 

북승방 지

 

강당 터의 동쪽과 서쪽 끝에는 동원 승방 터와 서원 승방 터를 잇는 회랑인 접랑 터가 있고, 강당 터 북쪽에 있는 석축 위에는 북승방 터가 있다.

 

강당과 동쪽의 승방터로 연결되는 회랑인 접랑 터

 

북쪽 중앙에 북승방 터와 이어지는 복도의 초석이 6개 남아 있다. 기단의 크기는 동서 65.6m, 남북 19.8m 정면 13칸, 측면 4칸 규모이다.

 

북승방 터와 좌측의 강당 터

 

면적은 1,298m2로 부여 능산리 사지 강당 터보다 2배 가까이 크다. 단층 기단으로 되어 있는 강당 터는 백제시대 석조 기단 건물 중 가장 크고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어 기단의 축조기법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동탑 뒤가 동승방 지 서탑이 보이는 곳의 강당이다. 두 곳을 연결하는 회랑터가 보인다.

 

[ 북승방 터 ]

승방은 승려들이 생활하던 공간을 말한다. 미륵사 터에는 동원과 서원의 북회랑 터에 연결된 승방 터 2곳과 강당 터 북쪽에 승방 터 1곳이 있다.

 

동탑과 동 승방 지 그 사이가 동원 금당지

 

강당 터 북쪽에 있는 북승방 터는 미륵사 터에서 단일 건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강당과 북승방지를 연결해 주었을 것으로 보여지는 초석

 

초기 건물 터는 길이 133.4m, 폭 14m이며, 내부 한 변의 길이가 6m인 방 2개가 동서로 한 조를 이루며 모두 8조가 있다.

 

북승방지에서 본 강당과 연결되는 초석

 

승방 터에는 사찰의 안팎을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고, 방을 중심으로 사찰 안쪽과 바깥쪽에 복도처럼 생긴 공간이 있다. 이러한 형태는 동원과 서원 승방 터 구조와 같다.

 

강당 뒤 초석

 

북승방 터 서쪽에 나중에 늘려 지은 부분은 평면형태가 초기 승방 터와 다른 모습인데, 남은 시설로 보아 도구를 만드는 작업장이나 창고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당 터와 서탑

 

이 승방 터 서쪽 부분까지 합하면 북승방 터는 동서 길이가 160m에 달한다. 북승방 터 남동쪽 모서리에는 통일신라시대에 썼을 것으로 보이는 작은 우물이 있다.

 

강당 터 위로 서원 강당과 서탑

 

[ 미륵사지 석등하대석 ]

석등하대석은 석등을 받치는 받침돌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강당 터 위로 본 동탑

 

석등은 부처의 광명을 상징하여 광명등이라고도 하며, 사찰의 금당이나 탑과 같이 중요한 건축물 사이에 세웠다.

 

강당 터에서 본 동탑과 서탑

 

석등에는 불을 밝혀 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위에는 지붕돌인 옥개석과 머리 장식인 보주가 있고, 아래에는 받침돌이 있다.

 

서탑 앞 서원 금당 지(우)와 좌측의 중원 금당 지

 

받침돌은 하대석과 하대석 위에 놓는 기둥인 간주석, 기둥 위에 얹는 상대석으로 되어 있다.

 

초석같다

 

미륵사 터의 석등은 하대석만 2기가 남았는데, 동원과 중원의 금당과 탑 사이에 1개씩 있다.

 

강당 터와 북 승방 지

 

1980년 발굴 조사를 하기 전에 서원에서도 하대석 위에 놓는 기둥, 불을 밝혀 두는 돌, 지붕돌이 발견되어 서원에도 석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강당 지 계단

 

석등하대석에는 여덟 잎짜리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 이 무늬는 미륵사 터에서 나온 백제시대 말기 기와인 수막새의 연꽃무늬와 같다.

 

강당 지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석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며, 높이는 2.7m 안팎으로 추정한다.

 

서탑과 서원 금당지

 

[ 중원 금당 터 ]

금당은 불상을 모신 사찰의 중심 건물이다. 금당이라는 이름은 금색의 불상을 모셨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건물 안을 금색으로 칠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동탑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삼존이 나타났던 연못을 메우고 탑과 금당을 곳에 두었다고 하며, 발굴조사에서도 동원, 서원, 중원 즉 삼원에 각각 금당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서탑

 

이곳은 중원 금당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석재 대부분이 없어졌지만 2층으로 된 기단 일부와 남쪽과 북쪽에 계단 흔적이 남아 있다.

 

중원

 

기단 내부에는 기둥을 받치는 초석은 사라지고, 초석을 받치던 초반석 일부만 남아 있는데, 동원과 서원 금당 터에 있는 초석과 같은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남아 있는 초반석의 위치로 보아 금당은 정명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중원 금당지

 

[ 중원 목탑 터 ]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며, 목탑은 나무로 만든 탑이다. 미륵사는 삼원으로 되어 있으며 중원에 목탑을 두고, 동원과 서원에는 석탑을 각각 두었다.

 

중원 금당지에서 본 동탑

 

이 건물터는 중원의 목탑이 있던 곳으로, 바닥에 있는 기단은 잘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이중으로 만들었다.

 

중원 금당지에서 본 서탑

 

아래 기단에는 네 면을 이루는 벽체 부분인 면석과 그 위에 뚜껑처럼 얹는 덮개석이 있고, 위 기단은 기초부에 까는 받침돌인 지대석과 면석, 덮개석으로 되어 있다.

 

미륵사지석탑

 

기단은 네 면의 길이는 모두 18.5m로 정사각형이며, 각 면 중앙에는 계단이 있다.

 

미륵사지석탑

 

터의 기초는 메웠던 흙을 깊이 3.5m 정도로 다시 파낸 뒤에 사람 머리 크기의 돌을 아래에서부터 1.5m 정도 채워 다졌다.

 

미륵사지석탑

 

그 위에 마사토와 점질토를 섞어 3~5cm 두께로 층층이 다져 올렸다.

 

서원 금당지

 

기초 아래는 습지의 개흙으로 되어 있어 <삼국유사>에서 연못을 메우고 탑을 세웠다고 한 기록과 같다.

 

미륵사지석탑

 

발굴 조사를 했을 때 기단 앞에서 불에 탄 기와들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목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화재로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

 

[ 서원 금당 터 ]

금당은 절에서 불상을 모신 법당, 대웅전 등의 중심 건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금색의 불상을 모셨다는 설과 건물 내부를 금색으로 칠했다는 설에서 명칭의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

 

서원 금당 터는 동원 금당 터와 미륵사지의 중심에서 서쪽과 동쪽에 대칭으로 위치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

 

서원 금당 터는 현재 석재들이 대부분 없어진 상태로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만 남아있으며, 기단 남쪽과 북쪽에 계단의 흔적이 남아 있다.

 

미륵사지석탑 내부 출입문

 

1980년대 발굴조사에서 서원과 동원의 금당 터는 기단의 형식과 규모가 동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석탑 모서리의 석상

 

서원 금당터는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정면은 5칸 중 중앙의 3칸이 조금 더 넓고 측면은 칸의 폭이 모두 같다.

 

석탑 모서리의 석상

 

건물의 기둥을 받치는 주춧돌은 사각형의 큰 받침석(초반석) 위에 놓여있는데 동원 금당 터도 동일한 방식이다.

 

석탑 모서리의 석상

 

주춧돌은 높이가 약 1m 정도로 높게 만들어진 특이한 형태이며, 윗부분에는 다른 석재나 목재를 수평으로 끼워 넣을 수 있는 홈이 있다.

 

석탑 모서리의 석상

 

높은 주춧돌로 인해 금당의 바닥에는 빈 공간이 만들어지는데 신라의 문무왕이 용이 되어 드나들었다는 경주 감은사지의 금당 구조와 유산한 점이 있다.

 

미륵사지석탑 출입구

 

[ 미륵사지 석탑 – 국보 11호 ]

미륵사지 석탑은 7세기에 미륵사가 처음 지어질 당시 세워진 세 기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미륵사지

 

많은 석재들이 없어져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던 석재를 참고해 9층으로 복원된 동쪽 석탑과 같은 규모로 추정된다.

 

연못

 

미륵사지 석탑은 목탑이 석탑으로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탑이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층마다 모서리의 기둥이 다른 기둥보다 살짝 높게 된 형태. 지붕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어 끝 부분이 솟아오르는 모양 등 목조건축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미륵사지 출토 석조물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된 1층에는 사방에서 계단을 통해 출입이 가능한 십(十)자형의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여러 개의 석재를 쌓아 올린 중심기둥(심주)가 세워져 있다.

 

문 돌쩌귀

 

2009년 1월 가장 아래의 심주석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는데 백제왕후가 639년에 탑을 세우면서 사리를 모셨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맷돌편

 

6층 일부까지만 남아 콘크리트 구조물에 의지하고 있었던 미륵사지 석탑은 1993년 구조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안전진단 결과에 따라 2001년부터 2017년까지 해체와 조립이 진행되었다.

 

석등간주석

 

수리가 완료된 탑의 높이는 약 14.5m, 폭은 12.5m, 무게는 약 1,830톤에 이른다.

 

석등화사석

 

[ 미륵사 – 권근 ]

 

창밖에 푸른 산 깎은 듯 솟아 있는데

 

석등 옥개석

 

시름 올 때 눈 들면 더더욱 뚜렷하네

 

받침석

 

가을바람 불어와 나날이 옷깃을 스치니

 

석등상대석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서울을 바라보고자 하네

 

당간받침석

 

[ 걸어가는 사람들 – 미륵사지 석탑 : 박태건 ]

 

걸어 왔네

익산 금마 미륵산 아래

미륵사의 가장 깊은 곳

심주석에 새겨진 천 년 전의 먹줄을 보러

걸어가기 위해 걸어 왔네

 

활주초석

 

백 개의 강, 천 개의 우물이 있던 곳

세상의 궁벽진 곳으로 밀리고 밀려

비탈길 따라 고구마를 심으며

가난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을 생각했네

 

 

달의 연못을 메우고

천년목을 다듬어

내 눈에 절 하나 지었네

 

초석류

 

허망한 기억은 탑 날개

풍탁 소리로 잡아매고

차마 말 못한 기원은 탑 아래

심주석의 먹줄로 남겨 놓았네

 

기단모서리 갑석

 

익산 금마의 미륵사는

지상에 내려앉은

하느님의 새,

 

기단모서리 면석

 

지상의 이정표 같은 미륵사 탑

절절한 기억을 기억하기 위해

어깨 무너뜨린 자세로

천년을 넘게 빈 터를 지키고 서 있었네

 

동원9층석탑3층면석및탱주(백제7C)

 

[ 금강 – 신동엽 ]

 

금마

하늬는 전우들과 자결

부여로 가는 길

마한 백제의 꽃밭

금마를 찾았다.

 

동원9층석탑면석및우주

 

언제였던가

가을걷이 손 털고

재작년 늦가을

진아는 하늬의 손가락 끼어

미륵사탑 아래

그림으로 서 있었지

 

동원9층석탑면석

 

그날은

저 탑날개

이끼 위

꽃잠자리가

앉아 있었다.

 

동원9층석탑옥개받침석

 

「금강」 제19장 중에서

 

동원9층석탑모서리옥개받침석

 

[ 미륵사지석탑 – 서탑 복원에 부쳐 : 하기정 ]

 

나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백제의 하늘에

흰옷 입은 백성들과 열 지어 날다가

눈 부릅뜨고 몰아치는 바람에

왼쪽 날갯죽지를 잃었지

스무 해 스무 날을 구름 속

 

동원9층석탑모서리옥개석

 

아무것도 입지 않고

아무 귀도 열지 않고

풍탁이 건네주는 바람의 손도 잡지 않고

빗물이 주는 나막신도 신지 않고

부리를 짓찧으며

 

동원9층석탑옥개석

 

돌의 심장에 먹줄을 놓았지

 

동원9층석탑노반덮개석

 

석공의 손에 돌꽃이 필 때까지

나무 같은 돌

돌 같은 울음

 

먹줄을 튕기며

 

미륵사지 동탑과 서탑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장막을 걷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