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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기행

경기 고양(5) - 벽제관지

by 포리시스 2010. 6. 7.

   <<벽제관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55-1번지에 위치한 사적 제144호 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을 통하는 관서로서 역관이 10여 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벽제관 정청과 익헌 터(뒤)와 삼문터(앞)]

 

   지금의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 자리로 일제 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6.25전쟁 때 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 버렸다.

 

[삼문터 앞의 표지석]

 

   그 후 객관의 문도 무너져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건물은 중앙의 청사와 좌우의 익사로 구성되는데,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나란히 배치되었다. 

 

 

   <<벽제관의 역사>>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이 곳 지명을 고양동이라고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하였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건물이 벽제관이었다.

 

 

   벽제관은 처음 이 곳에서 서쪽으로 3km 가량 떨어진 웃 고골(고읍)에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고양의 벽제관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1419)에 중국 사신을 효령대군, 영의정 유정현 등이 영접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수 십 차례 기록이 보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벽제관은 사신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 군수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공용의 숙박 장소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키도 했다. 특히, 벽제관은 인근에 조선시대 왕릉이 있어 이 곳을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는 이곳 벽제관의 옛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우선 입구에는 삼문이 있는데 여기에 벽제관이란 현판이 쓰여 있고, 중문에는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다. 일설에는 명필 한호 한석봉의 현판 글씨라 전해진다. 삼문 안쪽 정청 건물은 현재 터만 남아 있는데, 전돌과 마루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정청 좌우에는 방이 딸린 동익헌과 좌익헌이 있었다. 옛 기록에는 행랑, 중대랑, 즉청방, 익랑, 하마대 등이 보여 지금보다 훨씬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 벽제관지는 1998년 경기도 박물관, 연세대학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사진과 유사한 건축물 발굴결과가 나왔고 당시 명문기와, 도자기, 동전, 못, 등 18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삼문 동쪽 계단에서 [벽제]라 쓰여진 석물이 발견되어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유적지에 들러보면 여러 곳에서 항상 반복되는 글이 있다. 전쟁, 일제 강점기, 도굴,...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많이 훼손되고 소실되었다. 모두의 관심과 사랑으로 보존에 힘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