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릉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사적 제191호 이다.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1389~1392 재위)과 왕비 순비의 능이다.
공양왕은 재위 4년만에 고려가 망하면서 폐위되어, 원주에 추방되어 공양군으로 봉하여졌고, 삼척에 옮겨져 그 곳에서 태조 3년(1394) 춘추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태종 16년(1416) 공양왕으로 추봉되어 봉릉이라 하였다.
능은 왕과 왕비의 쌍능형식으로 되었고, 능 앞의 석물로는 비석 1좌씩과 석상이 놓였고 장명등이 1좌 양쪽에 석인이 2쌍, 석호 1필이 있다.
비석은 봉릉 당초의 것으로 보이며, 왕릉 중간에 조선 고종때 세운 것으로 보이는 "고려공양왕고릉"이라는 비가 서 있다.
능의 뒷쪽으로는 작은 봉분의 묘가 여러개 있다. 누구의 것인지,.. 왕의 친족인지 여부 조차 확인해 볼 수 없었지만, 평범한 무덤과 어우러져 있는 왕의 존엄함이 그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아니 그들의 무덤 앞에 서 있는 망주석과 비석의 규모가 오히려 더 월등해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 더 손질을 해 왔던 것처럼 느껴지니 더욱 더 평범하다 싶어 진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과정이라 생각해 보니 아쉬움이 덜해 진다.
이 곳 공양왕의 릉 앞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연못이라고 불리우기에는 턱없이 작게만 느껴지지만 그 곳에는 스스로 자생하는 수초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능 앞 삽살개 석물]
왕릉의 정면에는 이 능을 수호하는 삽살개의 석상이 있다. 다른 왕릉에는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 삽살개와 왕릉을 수호하게 된 연유가 바로 연못에 얽힌 전설이다.
[고려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이 담긴 연못]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조선 태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성인 개성에서 도망쳐 이 곳 견달산 아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사방이 어두워졌다.
두려움과 배고픔으로 지쳐있는 왕의 일행에게 건너편 골짜기에서 한 가닥 불빛이 보여 찾아가 보니 마침 작은 절이 있어 하룻밤을 묵고자 부탁하였다.
그러나 이미 불교의 나라 고려는 멸망되고 새로운 유교의 나라 조선이 창건되었으니 절에서 머물기는 어렵게 되었고 인근의 대궐고개 대락골 누각에 피신하게 되었다.
이 후 남몰래 스님들이 밥을 날라 왕에게 드렸는데 이러한 이유로 이 마을의 이름이 밥 절. 즉 식사동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왕과 왕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과 왕씨 일행이 온 산을 뒤지며 왕을 찾았으나 모두 허사였다. 다만 공양왕과 왕비가 귀여워 하던 삽살개만이 골짜기의 작은 연못 속을 향해 계속 짖고 있었다.
이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연못을 자세히 보니 사람의 형상이 보였고,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그 안에 왕과 왕비가 편안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두 분의 시신을 정성들여 모셔 연못 뒤 양지바른 곳에 장례를 치루고 능을 지키기 위해 능 앞에 삽살개 모양의 석물을 세워 지키게 하였다 한다.
이러한 전설로 인해 인근에 식사동 뿐만 아니라 어침이, 대궐고개, 왕릉골 등 여러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사나 왕조실록 같은 정서에는 공양왕이 강원도 삼척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고양사람들의 공양왕에 대한 애절함이 이와 같은 전설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에 공양왕과 삽살개의 전설을 길이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고양시에서 공양왕릉 정비사업을 하면서 연못을 좀 더 깊고 넓게 보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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