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인제군 인제로 156번길 50에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이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에 위치하여 이름 그대로 산촌에서 살아 온 사람들의 생활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된다.
박물관의 이야기를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안내문의 내용과 더불어 내.외 전시물 들을 옮겨 보았다. 자라면서 많이 보아왔던 것들이라 생소함은 덜하였지만, 이미 생활에서 멀어져 박물관에서 느낌하는 세월의 흐름을 알 수 있겠다. 입장료는 1천원이다.
[김부대왕당 - 金富大王堂]
상남면 김부1리에 있는 대왕당을 이전의 형태로 복원한 것이다. 김부대왕은 사람에 따라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라 하기도 하고 마의태자라 하기도 하는 인물로서, 상남면 일대에 널리 전승되는 인물신앙의 한 형태이다.
제일은 매년 5월 5일과 9월 9일에 마을사람들이 모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제물은 그 해의 형편을 보아 제비가 넉넉할 때에는 소나 돼지를 잡기도 하였다.
술과 포, 과일 등을 마련하고 단오에는 취떡과 미나리적을 중앙절에는 시루떡이나 절편을 준비했다.
단오 취떡은 김부대왕이 생전에 즐겨 드시던 것이기 때문에 대왕님께 올리는 것이라 한다. 대왕당 제사의 절차는 마을의 나이 지긋한 초헌관이 초를 켜고 향을 피우고 나서 절을 하고 잔을 올리는 형식이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고 마을사람이 평안하고 농사 잘 짓도록 지켜주십사는 축원을 올리고 나면, 참석한 이들이 절을 올린다.
대왕당제사에는 소지를 올리지 않는데, 김부대왕은 어디까지나 마을의 어른이지 신령님이 아니기 때문에 소지를 올리지 않는다고 한다.
대왕당이 위치한 김부리는 군사훈련장으로 편입되면서 마을이 해체되어, 마을차원에서 전승되던 대왕당 제사의 맥은 끊기게 되었다.
대왕당의 역사성이나 가치로 볼 때 이는 무척 안타까운 일이므로 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오랜 전통의 맥을 잇고자 하는 염원에서 이전의 형태로 이전. 복원하였다.
[왕장금표 - 黃腸禁票]
인제군 북면 한계3리(큰 절골)안산에 있는 조선 중기(추정) 시대의 금표이다. 조선 중기 무렵 한계리 일대의 황장목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연석에 음각으로 새긴 표석이다.
황장목은 나무중심부에 누런부분의 황심을 가진 소나무로서, 조선시대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보호하였던 수종이다.
강원도내에서 황장금표가 발견된 곳은 북면 한계리 외에 영월군 수주면 두산2리 황장골과 법흥1리 사자산,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치악산 구룡사 입구 등이다.
황장목은 심재의 비율이 커 궁궐의 건축재, 선박재, 왕실의 관재 등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관리하였다.
1746년(영조 2년)에 간행된 <속대전>에 의하면, 국가에서는 황장목이 있는산에 산직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고, 감관이 이를 감독하였으며, 나무를 밸 때에는 경차관을 임명해 보내 황장목을 베도록 하였다.
벌목된 황장목은 합강리 앞 우소에 집적되었다가 뗏목으로 엮어 춘천을 거쳐 서울까지 운반되었다.
[ 여름날(음력 1. 14), 귀신날(음력 1. 16) ]
여름날 새벽 주부들은 첫닭이 울 때를 기다려 용알(우물물)을 떠오고, 이 용알로 오곡밥을 짓는다.
그리고 '부지런 하라'는 뜻에서 오곡밥을 아홉 그릇 먹고 남자는 나무를 아홉 짐, 여자는 삼을 아홉 광주리 삼는다.
귀신날에는 기둥이나 문턱에는 체를 걸어 놓고 바늘을 꽂아 두며, 체 밑에는 목화씨나 매운 고추를 태워서 독한 냄새를 피우는데 나쁜 귀신을 쫓기 위한 민속이다.
또 잠자라에 들 때는 신발을 감추는데 귀신이 와서 신발을 신어보고 발에 맞는 신발 주인을 잡아간다고 하기 때문이다.
[ 가을날(정월대보름) ]
정월대보름은 가을날이라고도 하며 집안에 따라서는 아침에 메밥을 지어 제사를 올렸다.
김치를 먹으면 쐐기를 쏘인다고 해서 먹지 않고, 소에게 찬밥과 나물을 주면서 풍농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소가 "찬밥을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했다.
특히 '망대세우기'는 기린면 방동리에서 1940년대까지 전승되었던 것으로 마을 공터에 소나무를 세우고 소원성취를 비는 호롱(등)을 거는 놀이로 한 해의 풍요와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 잘 나타났던 인제의 대표적인 '정월놀이'였다.
[일꾼날]
이월초하루를 '일꾼날'이라고 한다. "이월 초하루가 명일이에요. 농사꾼은 말하자면 다 일꾼이니까"
일꾼날에는 겨우내 집에서 만든 짚신이나 소쿠리 등을 마을 어귀나 공터에 모아놓고 대방(마을의 웃어른)에게 풍평을 받은 다음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풍물을 치면서 하루를 즐겁게 놀았다.
"농사꾼은, 아주 그날, 놀구부터(놀고나서) 일 시작을 한다는 거지. 옛날 같으면 나무를 한다던지 농구(농기구)같은 걸 만든다던지, 지게를 많이 지니까 지게를 만들던지."
[소보냄]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는 한식 무렵 밭으로 소를 몰고 나가서 연장에 빠진 부속품은 없는지, 쉬었던 소가 밭을 갈 수 있는지 알아보는 것을 '소보냄'이라고 한다.
'소도 겨우내 매겨(먹여) 가지고 이게 잘 가겠나, 연장(쟁기) 같은 거 만들어 가지고, 이제 이게 말을 잘 듣겠나(하고 알아보느), 매사(일이), 보냄이란게 그거에요. 쥐날, 돼지날 하는데 쥐가 땅을 쑤시잖아요, 돼지도 땅만 보면 들쑤시는 거야."
소보냄을 할 때는 살이 있는 방향을 피해서 한다. 또한 소를 갈지자 처럼 몰면서 소가 제대로 길이 들었는지 살핀다. 소보냄을 몇 고랑 해보고 이튿날부터 본격적으로 밭을 간다.
[밭갈이]
"돌이 많고 비탈이고 해서 두 마리로 갈아야지 한 마리로 가지곤 할 궁리도 못해요. 두 마리로 해야(쟁기가) 나가지."
인제 지역은 밭이 경사가 급하고 돌이 많아 겨리쟁기질로 밭을 갈았다. 겨리쟁기질은 외벌치기와 두벌치기가 있다.
외벌치기란 쟁기질을 한 번만 하는 것으로 주로 콩이나 팥을 심을 때 하고, 두벌치기는 쟁기질을 두번 하는 것으로 옥수수, 조, 수수 등의 작물을 심을 때 한다.
쟁기질을 하고 나가면 뒤따르는 사람들이 괭이로 파고, 거름(퇴비)을 넣고 씨를 넣는다. 겨리질은 망종이나 하지 등 모내기 무렵에 끝난다.
[벌목]
인제 지방에서 자라는 적송 등의 목재는 예로부터 질이 좋기로 이름높아 나무를 서울 등지에 내다 팔면 높은 값을 받았다.
벌목은 농사가 끝나는 음력 10월경부터 이듬해 강물이 풀릴때까지 했다. 미리 산을 둘러보아 산판(벌목할 곳)을 정하는데 좋은 나무가 많고 나무를 베어서 나르기 쉬운 곳을 선택한다.
첫 나무를 베기 전에는 산신에게 벌목을 허락해 줄 것과 무사고를 바라는 산치성(제사)드리고, 말없이 도끼질을 하여 첫 나무를 메어 쓰러뜨리면 산판꾼들이 환호성을 터트리고 제수를 내려 음복과 주연을 벌인다.
벌목은 주위의 나무를 모두 베는 개벌과 용도에 맞춰서 골라 베는 간벌이 있는데, 나무를 벨 때는 목재를 나르고 모으기 쉽게 하기 위해 산 아래쪽부터 위로 올락면서 작업을 한다.
[물대기와 모내기]
산골짜기에 위치한 마을들은 평소에 물이 넉넉하지 못해 보를 만들어서 물을 가뒸다가 모내기철에 '귀새'로 만든 수로를 통해 논물을 댔다.
"여기는 그 보가 생명이래요, 이 마을에는. 왜냐하면 그 보가 나오면서 밭이고 논이고 다 쓰게 되지, 그 물 떨어지면 물 어디가 만지지도 못해."
보에 대한 모든 관리는 '팻물'이라는 자발적인 마을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 보가 있긴 하지만 가물 때는 물 때문에 다툼이 생기기도 했다.
"별 사람이 다 있지. 꼬챙이 가지고 밤에 가서 땅강아지가 쑤신 것처럼(논둑에 물길을 터서 자기 논으로) 물이 흐르게 하는 사람도 있고, 더 욕심(내서 자기 논에 물) 부려 그걸(다른 논의 물을) 훔쳐(물대기를) 하려다가 얻어터지고, 먼저 물댄 사람이(더 대려고) 어물대다가 도랑에 막 꾸겨백히고(내던져지고)."
[못자리 만들기]
한식 무렵 갈아엎어 놓은 논에 곡우가 되면 써레질을 해서 못자리를 만든다. 못자리는 가로가 2자(60cm가량) 정도되게 하며, 네 귀퉁이에 말뚝을 박아 새끼줄을 둘러 뿌려 놓은 볍씨가 물에 쓸려 나가는 것을 막는다.
볍씨는 1주일 정도 찬물에 담갔다가 싹을 튀어 나간다. 못자리를 만들고 한 달 가량이 지나 소만 무렵이 되면 마을 대방으로부터 갈을 꺾어 논에 펼쳐 놓으라는 '갈영'이 내려진다.
논에 갈을 펼쳐놓으면 벼가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모내기 할 논에는 미리 '아이논'을 갈아 놓은 다음 갈을 골고루 펼쳐놓고, '두벌논'을 갈아엎어 갈을 흙 속에 쓸어 넣는다. 이러한 작업이 끝나면 물을 대어 논을 삶고 망종에서 하지 사이에 모를 낸다.
[단오]
단오날 아침, 처녀나 총각은 약쑥을 베러 가고, 주부들은 단오차례 지낼 준비를 한다. 별식으로 떡취(나물)와 조찹쌀가루를 떡메로 쳐서 취떡을 해 먹느라고 단오날은 온 동네가 떡 치는 소리로 '털썩! 털썩1"했다고 한다.
마을 그네터에는 새롭게 그네줄이 매어지고, 동네사람들은 '그네터에 모구(모기)나리러 가자'고 하면서 함지 가득 음식을 담아 그네터로 모인다. 그네를 뛰면서 '5월 단오 취떡이요!' 라고 크게 소리치면 여름 내내 모기에 쏘이지 않는다고 한다.
[인제 뗏목]
인제 뗏목은 <조선왕조실록>에 '목수를 강원도에 보내어 인제 등지에서 나무를 베었으니 장차 창덕궁을 수즙(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이는 일)하려는 때문이다.(태종 18년 유월 계사일)'라는 기록처럼 궁궐을 짓는데 쓰일 만큼 질좋은 목재를 나르던 운송수단이다.
압록강과 두만강의 뗏목이 주민들과 화물을 나르던 교통수단이었다면 인제 뗏목은 순수하게 목재운반을 목적으로 했다는 특징이 있다.
인제 지역의 설악산. 대암산. 향로봉에서 벌채된 원목은 북면의 인북천을, 가리산. 점봉산. 방태산의 원복은 기린의 내린천을 통하여 합강에 모아져서 떼로 엮은 다음 춘천을 통하여 서울 마포까지 운송되었다.
[인제의 목기]
인제는 남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기 생산지로 함지.이남박 등의 목기를 일년에 4만개 가량 생산하여 전국 각지에 공급했다.
<조선물산, 1912년, 조선총독부>에는 인제 목기는 전업으로 목기를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비용은 판매업자가 부담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기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료를 확보하기 쉬운 장소에 갈이틀(녹로)을 설치하고, 벌목과 운반과정을 거쳐 목기의 형태를 잡았다.
형태가 잡힌 목기는 짚이나 속세풀 줄기로 문질러 사포질한 것처럼 표면을 다듬었다. 표면을 다듬은 목기는 붉은 흙(황토)을 헝겊에 묻혀 겉과 속을 문지르고 말린 다음 들기름을 바르면 광택이 나고 방수효과까지 볼 수 있었다.
인제 목기는 남원 목기에 비해 모양이나 품질이 거칠었지만, 소박하고 전통적인 목기제작법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었던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인제에서 생산되었던 목기는 이남박을 비롯한 약 17가지로 적송. 풀푸레나무. 엄나무. 참피나무 등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특히 엄나무는 색깔이 예뻐서, 박달나무는 재질이 단단하여 많이 사용하였다.
[인제의 목기 종류]
- 이남박 : 지름 30~40cm, 깊이 12~18cm, 안쪽에 나선형의 홈이 있다.
- 남박 : 이남박과 비슷하지만 홈이 없다.
- 백골박 : 지름 45~60cm, 깊이 30~45cm, 쌀통이나 빨래통으로 쓰였다.
- 민두리 : 지름 45~75cm, 깊이 40~45cm, 쌀통이나 옷감에 풀을 먹이는 통으로 쓰였다.
- 성지박 : 지름 40~60cm, 깊이 15~30cm, 용태박이라고도 하고, 구유통으로 쓰였다.
- 두가리 : 지름 15cm가량, 깊이 10cm, 국그릇
- 서두리 : 백골박과 크기가 비슷하며, 주로 빨래통이나 큰 것은 목욕통으로 쓰였다.
- 전모박 : 지름 40cm가량, 깊이 15~30cm, 구유통으로 쓰였다.
- 구박 : 지름 20cm, 깊이 15cm 가량, 가축의 사료를 솥에서 덜어낼 때 쓰였다.
- 소반 : 상
- 오합 : 다섯 개의 주발로 이루어지며, 큰 것은 지름 약 30cm에 깊이 약 20cm, 작은 것은 지름 약 15cm에 깊이 10cm 가량으로 과자나 밥 그릇, 세탁용과 김치통으로 사용하였다.
- 제기 : 제사에 쓰이는 그릇이나 받침
- 죽류 : 국자
- 나막신
- 식원리 : 남박과 비슷하며 바닥에 작은 구멍이 있어 술이나 간장을 양조할 때 깔때기로 사용한다.
- 소댕 : 솥뚜껑
- 도매 : 냄비뚜껑
[호무씨세 - 호미씻이]
음력 7월 보름을 전후로 해서 논밭의 김매기가 거의 끝나고 나면 집집마다 호무(호미)를 깨끗이 씻어 걸어 놓고 '호무씨세'를 했다.
어느 집이나 새로 난 햇참밀에 풋호박을 넣어 칼국수를 해먹고 음식을 장만하여 가까운 강이나 산으로 가 하루 종일 풍물을 치며 흥겹게 놀았다.
[한가위]
한가위가 다가오면 음력 7월 그믐부터 8월초에 걸쳐 조상의 묘소에 벌초를 한다. 한가위에는 집에서 갓 수확한 곡식으로 천신(조상제사)을 하였다.
벼가 일찍 익은 해는 한가위 전에 '천신'을 하기도 하고, 늦게 익은 해는 '바심'을 하여 솥뚜껑에 볶아 절구에 찧어 조상님께 올린다.
"설, 단오, 한가우 중에 한가우가 젤 큰 명절이래요. 추수할 때는 안됐지만 미리 된 것도 있잖아. 천신한다고, 미리 된 것 손으로 훑어 가지고, '바심이 한다'(여문 곡식만 골라 베는 것)고 그래. 발방아 찌가지고(찧어 가지고), 햅쌀밥에다가 햅콩을 손으로 까다가 햅곡물로다가 한다고."
햅쌀은 반드시 조상들께 먼저 올리는 것이므로, 천신하기 전에는 남의 집에 가서 쌀밥이 나와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시절이 늦어져 벼가 여물지 않아 한가위 무렵에 천신을 못하면 중양절(음력 9월9일)에 '9일 차사'를 올리기도 하였다.
[상달 텃고사]
가을일이 전부 끝나고 나면 상달(음력 10월)의 길일을 택하여 그 해 거둔 곡식으로 집안의 신들에게 가을걷이의 고마움과 집안의 안녕을 비는 '텃고사'를 지낸다.
"가을게(가을에) 농사 다 지내놓고, 마당 텃고사라 해가지고, 이것저것 해가지고 옥수수고 쌀이고 빠가지고(빻아서), 시루에 쪄 가지고 텃고사를 지내요. 잘해달라고"
집안의 대주가 주인이 되어 '텃고사'를 지내고 나면 긴 네모꼴의 창호지를 고무락(안방 천장 위)의 상기둥이나 대들보에 실타래로 붙들어 매었다.
매년 텃고사 때마다 상기둥에 한 장씩 붙들어 매는 창호지는 대주가 바뀌면 손 없는 곳에 가서 불에 살랐다.
[목청과 석청]
야생벌은 속이 빈 고목이나, 절벽 바위틈새에 집을 짓고 산다. 벌이 집을 지을때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습기가 많지 않은 곳을 고른다.
산의 600~700m 높이쯤이 적당한 장소로 거미, 너구리, 왕벌, 두꺼비 따위의 천적이 적은 곳에 집을 짓는다. 목청과 석청은 나무나 절벽에 있는 야생벌집에서 채취한 토종꿀을 말한다.
옛날부터 목청과 석청은 귀한 약재로 알려져 있는데, 약효 뿐만 아니라 나무 속이나 바위틈에 한 두해를 모아서는 꿀이 많을리가 없어서 희소성 때문에 더욱 귀하게 여겨오고 있다.
[갈무리]
겨울이 빨리 찾아오는 인제에서는 가을에 거둔 농작물을 빨리 저장해야 했고, 긴 겨울동안 보관할 수 있어야 했다.
겨울동안 갈무리를 할 때는 물기가 많은 작물은 말려야 했고, 쥐나 산짐승에게 식량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신경써야 했다.
그래서 갈무리는 방에다 하거나 땅에 구덩을 파서 했다. 우리 지방에서 갈무리에 쓰였던 도구는 통나무의 속을 파소 만든 나무독, 갈과 싸랙지(싸리나무)를 엮어서 만든 채독이 있으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삶에 이용하는 지혜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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