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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기행

강원 양양(14) - #명주사(明珠寺) #만월산 #고려 목종 #혜명스님 #대주스님

by 포리시스 2013. 4. 29.

   강원 양양(14) - #명주사(明珠寺) #만월산 #고려 목종 #혜명스님 #대주스님

 


   명주사는 강원 양양군 어성전리 488번지 만월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말사란다. 제법 이름이 있는 사찰로 알려져 있어 오래전부터 탐방을 하고 싶었는데, 이제서야 그 기회가 주어져 아주 짧은 시간에 그 뜻을 이루었다.

 

[명주사]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7번 국도 하조대에서 현북중학교~명지리 복지회관을 지나 낮은 재를 넘으면 어성전사거리에 도착하는 방법과, 양양읍에서 남대천을 따라 용천~수리~도리~원일전 마을을 지나 어성전사거리로 가는 방법, 그리고 6번국도 평창방면에서 진고개를 넘어 송천계곡의 부연동길을 따라 가는 방법이 있는데 마지막의 이 길은 경유해 보질 않았다.

 

[법당 앞의 종각]

 

   어성전사거리에 명주사의 이정표가 있는데, 콘크리트로 포장된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 자동차로 약 10여분 남짓 산길을 지나면 이 사찰이 나온다. 주변으로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있어 여름철에는 가볍게 걸으며 산림욕을 즐기기에 더 없이 좋은 길이라 여겨 보았다.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사찰 안내문의 내용과 함께 소개한다. 만월산(滿月山)에 자리한 명주사는 고려 목종 12년(1009) 혜명(惠明)과 대주(大珠) 스님이 창건하여 비로자나불(毘盧咨那佛)을 모신 화엄종 계통의 사찰이었단다. 사찰명은 두 창건주의 이름을 따서 명주사(明珠寺)라 하였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은 <대적광전>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법당 현판은 <극락전>이다.

 

[경내 풍경, 저 멀리 콘크리트 구조의 해우소가 있다]

 

   고려 인종 1년(1123)에 청련암과 운문암이, 그리고 조선 숙종 2년(1673)에 향로암이 부속암자로 창건되었으며, 정조 20년(1781) 명주사 출신의 고승 연파스님이 원통암을 창건하였다. 이후 헌종 15년(1849)과 철종 4년(1853)에 원통암이 수 번 소실되었으나 두 번 다 중건되었다고 한다.

 

[명주사 현판]

 

   그러나 철종 11년(1860) 화재가 산 전체를 뒤덮어 명주사와 인근 암자가 모두 불타버렸다. 이에 곧 월허(月虛)스님이 명주사를, 1861년 인허(仁虛)스님이 운문암과 향로암을, 그리고 1864년 학운(鶴雲)스님이 원통암을 중건하였다고 한다.

 

[달마대사 두상]

 

   고종 15년(1878)에 다시 명주사가 소실되었고, 그 뒤 중건되었으나 또다시 대한 광무 원년(1897)에 소실되자 복원하지 못하고 사찰의 부속암자였던 원통암으로 옮겨 편액을 달아 <명주사>라 하였단다. 현재는 법당을 중심으로 산신각과 종무소 외 1동의 건물이 전부인 듯 하고 부속 암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풍경]

 

   1911년 건봉사(고성군의 소재인듯) 말사가 되었으며 이후 중건이 계속되어 원통암(圓通庵) 30칸을 비롯한 독성각(獨聖閣), 산신각(山神閣), 어향각(御香閣), 응향각(凝香閣), 진영각(眞影閣), 선방(禪房)인 현위실(弦葦室), 강원(講院)인 만수실(曼殊室) 등 총 15동 95칸의 대찰의 면모를 갖춘 큰 가람을 이루었다.

 

[창호마다 그려진 시화가 참 운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폐허화 되었고 근간 수해피해로 손실되었던 것을 8년의 각고끝에 홍진스님께서 중창하여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참 오랜 세월동안 이 사찰에 수 없이 많은 재앙이 있어 옛스러운 고건축의 사찰을 음미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사찰 입구의 명주사 부도군]

 

   사찰 진입로를 따라 오르다 보면 우측으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된 <양양 명주사 부도군>이 있다. 이 부도들은 명주사의 역대 고승들의 부도로, 조선시대 후기의 부도 중 도내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단다. 부처님의 사리는 탑에, 스님의 승사리는 부도에 모신다고 한다.

 

[원당형부도와 비석]

 

   남아있는 부도는 모두 12기로 원당형이 7기, 석종형이 5기이다. <원당형 부도>는 탑신(탑의 중심부)이 대부분 공 모양이나, 기단부(납신의 받침 부분)와 옥개석(탑신의 지붕)은 모두 8각으로 고려시대 이후의 팔각원당형의 전통을 잘 따르고 있단다. <석종형>은 종모양으로 만든 부도를 일컫는다.

 

[극락전 내 불전]

 

   이 부도들의 조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만든 솜씨로 볼 때 1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연파당부도는 짝을 이루는 탑비에 의해 조선 순조 18년(1818)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에는 부도와 함께 모두 4기의 비석이 있는데, 순조 12년(1812)에서 고종 20년(1883) 사이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종각 내 명주사 동종]

 

   부도군을 지나 오르면 대여섯 동의 건물이 보인다. 오래전 대사찰의 가람은 볼 수 없고, 그져 아담한 분위기의 사찰이라 여겨질 정도다. 사찰의 주차장에서 제일 먼저 법당으로 오르는 계단의 좌측에 종각이 있다. 이 종각 내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인 <명주사 동종>이 있다.

 

[오 자네 왔는가]

 

   이 종은 숙종 31년(1705) 2월에 주조되었다고 하는데,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종신 하대에는 당초문을 장식하고 하반부에 명문을 새겼으며, 상단 네 곳에 유곽을 마련하고 각각 9개씩의 유두를 배치하였다. 그 아래 사면에는 범자를 돋을새김한 뒤 범자 아래에 두광을 갖춘 보살상을 4구 배치하였다.

 

[가는자여]

 

   예로부터 어성전에서는 어성팔경(魚城八景)이라 해서 산사모종(山寺暮鐘), 즉 명주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를 팔경중의 하나로 쳤다고 하는데, 이 작은 종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가는 짐작할 수 없지만 대사찰의 명성에 걸맞는 그런 동종 이었을거라 여겨 보았다.

 

[이 사찰의 특색이려나]

 

   이 사찰의 법당은 극락전이다. 아미타불(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며 설법하는 부처)을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중생을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부처님이라고 하는데, 사찰마다 법당의 현판이 <대웅전>, <대적광전>, <약사전>, <미륵전> 등으로 나뉘어져 있어 어느 부처님인지 한참을 공부해야겠다.

 

[법당과 삼성각]

 

   이 사찰에서 특이한 것은 법당 외 스님들이 거쳐하는 건물의 기둥과 창호지에서 또 한 번 느낄 수 있다. 창호마다 진한 묵향을 풍기며 그려진 달마도와 수묵화의 그림들 속에 세겨진 서채가 무릇 병풍을 쳐 놓은 듯 아늑함을 더해 준다. 다른 사찰에서는 쉬이 구경할 수 없는 풍경이였기에 한참을 기웃거렸다. 기둥과 처마 밑으로 돌아가며 써 놓은 글들,...

 

[극락전]

 

   얼마나 태워야 오만이 없고, 얼마나 버려야 자유스러운가,...

   얼마나 속아야 행복하고, 얼마나 미워해야 사랑이 싹트고,...

 

   오 자네 왔는가 / 이무정한 사람아 그래 / 청풍에 날려왔나 / 현학을 타고왔나 / 자넨먹이나 가세 난 / 청심다나 끊림세

 

   나고죽고가고오고무슨관계랴 / 날때에 너는 또렷 아니 났었고 / 죽을때 또한 우뚝 안 죽었다네 / 그대로 분명 여기 눈 앞에 있네,..

 

   삶이란 구름 한 점 일어남이요 / 죽음이란 구름 한 점 사라지는것,...

 

[독특한 모습의 샘]

 

   이름 모를 스님의 글이지만, 많은 사람들의 번뇌를 찬찬히 사그러 놓을 그 어느 명언들 보다 가슴에 와 닿았다. 많이 보고 듣고 느끼면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만은 어쩌면 이렇듯 돌아다니는 내 인생은 너무 화려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의미?,..]

 

   사찰의 계곡쪽으로 통나무의 골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가 아주 짧은 길이만큼 전해져 낙수하듯 인생이 그런 것이고, 삶이란 구름처럼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숙연한 마음으로 이 사찰을 더듬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