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강화(17) - #강화 #광성보(廣城堡) #신미양요 #광성나루 #어재연장군 #광성돈대 #안해루 (1)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광성나루(광성진)에 위치한 사적 제227호의 성보(城堡) 이다. '보'의 개념이 '뚝', '방죽' 등의 의미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흙과 돌로 쌓은 작은 성'이라는 의미다. 강화도 동쪽 해변을 따라 축성된 성으로 이곳 광성보에는 세 개의 돈대(광성돈대, 손돌목돈대, 용두돈대)와 해안가로 광성포대가 있다.
[강화 광성보 안해루]
조선 효종 9년(1658)에 강화유수 서원이(徐元履)가 설치한 강화도 해안수비 진지로 강화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숙종 5년(1679)에 강화도의 국방시설을 확장할 때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함께 축조하고,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1874년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 하였다고 한다.
[안해루 풍경]
이곳은 고종 8년(1871)의 신미양요 때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인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해에 통상을 요구하며 침입한 미국함대가 강화해협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을 광성.초지.덕진.덕포 포대에서 일제사격을 가하여 물리쳤으나, 4월 23일에 450명의 미국해병대가 초지진에 상륙하여 진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광성돈대 성곽과 출구]
이튿날 미군이 북상하여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광성보를 지키던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 이하 전장병은 열세한 무기로 분전하다가 중상으로 기동이 어려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다고 한다.
[광성돈대 내부 모습과 전시된 대포,소포,불랑기]
이때 성첩과 문루가 파괴된 것을 1976년에 복원하는 동시에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들의 무덤과 어재연의 쌍충비각을 보수.정비하였단다.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350여 명의 순국 영령들을 기리기 위한 <신미순의총>이 안해루 남쪽 능선을 따라 가다보면 좌측에 그리고 그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다.
[방향을 달리한 포좌와 당시 사용된 무기]
광성보의 성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세워져 있는데, 편액은 영조때 쓰였다는 <안해루>이다. 왼쪽으로 성곽과 이어져 원형의 돈대가 <광성돈대> 이다. 이 돈대는 숙종 5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하니 상당한 인원이 동원되어 짧은 시간에 성축을 한 것으로 보여진다.
[광성보 안해루를 해안가의 외부에서 본 모습으로 우측의 성곽이 광성돈대다]
돈대의 성곽에는 4개의 포좌가 있고, 푸르스름한 잔디 위에 3기의 포(대포, 소포, 불랑기)는 1977년 설치하였다는 내용이다. 대포는 '홍이포'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했고, 병자호란에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광성보의 해안으로 아름답게 조성된 공원]
소포는 사정거리가 300m로 대포와 달리 조존이 가능하다고 한다. 작은 '불랑기'는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고 한다. 돈대에는 작은 문이 하나 시설되어 있는데, 신미양요 당시 미해병대가 덕진진에서 북상하였다면 광성보의 성내에서 방어해야만 했을 우군의 피해가 엄청컸을 것으로 보여진다.
[오위장이공복현위]
광성보의 안해루를 지나면 성곽 밖으로 주변의 조경시설을 잘 되어 참 아름답게 핀 꽃들을 보며 공원을 거닐 수 있다. 개인의 것인지 하얗게 만개한 배나무의 꽃과 복사꽃,.. 그리고 많은 야생화가 활짝피어 있다. 탐방중 많은 분들의 어르신 관광객과 서울의 한 중학교 학생들의 역사탐방길이 이어졌다.
[활짝핀 배나무 밭 꽃들,.. 저멀리 광성돈대]
두 아이를 이끌고 역사탐방에 나선 어머니의 열의에 찬 목소리와 그 아이들의 모습도 눈여겨 보았다. 볼거리가 많은 광성보,... 이곳에 오신 모든분들이 화창한 봄날 눈요기만 하지는 않을거라 여겨진다. 한 사람 한가지의 우리의 지나온 역사를 알고자 오셨을거라 여겨진다.
[광성돈대에서 본 안해루]
해안의 산책길을 따라 걷다보니 성곽으로의 오르막길로 이어진다. 이 곳에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각>이 있다. 쌍충비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1823~1871)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각]
1기는 <광성파수순절비>로 비의 규모는 높이 168cm, 너비 62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1826~1871) 순절비인데 높이 177cm, 너비 58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되었다.
[비각내 광성파수순절비]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들이 제사를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고 한다. 어느 시기에 제를 거행하는지는 알 수 없다. 두 비가 나란하게 서 있는 비각 내부에는 <쌍충비각순절묘단건립명단>의 액자가 걸려 있는데, 신해년 십일월 이십일일 준공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각내 쌍충비각순절묘단건립명단]
비각 앞으로 난 도로의 아래쪽에 <신미순의총>이 있다. 7기의 가묘로 보이는 상징적인 단 일거다. 많은 분들께서 묘단의 주변 관리를 위해 열중하고 있다. 단정하게 곡장이 둘러져 있고, 잘 자라지 않은 잔디의 규모로 보아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신미순의총]
이곳은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해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가 있는 곳이다. 비석에는 <순절묘단>이 새겨져 있고 자그마한 상석이 놓여 있다. 묘단에는 뒷줄 2기, 가운데 4기, 앞쪽 1기의 봉분이 있다.
[묘단 전경]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 사졸 53인의 전사자중, 어재연 형제는 고향인 충북 음성군 대소면 성본리에 안장하고, 남은 군졸 51인은 신원을 분별할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손돌목돈대로 가는 길에 본 묘단]
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시지 않았으니,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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